아무리 같은 시대를 살아도 왜곡된 렌즈로 세상을 보거나 탐욕의 위장으로 사물을 대하면 진실과는 멀어지게 된다. 산민 한승헌 선생은 '동물농장'과 비슷한 시대에 일반 지식인들과는 관념의 깊이와 체험의 부피가 많이 달랐다.
그는 원칙과 신념의 지식인이고 법조인이었다. 체득한 지식을 앎으로 묻어두지 않고 삶의 과제로 삼아 실천하였다. 그 길은 비탈길이었다. 거기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역사의 몫을 찾았고 두려움 없이 망설임 없이 그 길을 걸었다. 험난해도 항상 얼굴에 잔잔한 미소 띄우고 유머 펀치 날리면서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사회 곳곳에 몰염치와 파렴치가 판치고, 철면피가 초근목피를 지배하고, 법치가 망치를 휘두르고, 이죽거림과 패악질이 공론의 장을 어지럽힐 때도 그는 늘 깨어 있는 영혼, 맑은 정신이고자 하였다. 후각이 발달한 지식인ㆍ언론인ㆍ법조인 중에는 정ㆍ관ㆍ재계를 넘나들며 출세를 뽐내었다.
그는 과거에 머물지 않았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추구하며 느리지만 지체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출세주의자들이 돼지의 포만을 즐길 때, 고뇌하는 소크라테스처럼 '등애'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역사의 기능 중에는 인간사의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는 역할도 포함된다. 누구나 겪게 되는 '떠남'의 자리에는 세상에서의 성적표가 제시되고 평가받는다. 각계에 지도자는 넘쳐도 원로다운 원로가 드문 우리 현실에서 선생은 원로로서, 원로가 어떠해야 하는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산민 선생이 조선 후기에 태어났으면 양명학 계열의 선비(실용주의), 일제강점기에 청년이었다면 아나키즘계열(자유분방)의 지사가 되지 않았을까 그려본다.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는 조국의 정치ㆍ도덕ㆍ종교적인 타락상을 지켜보면서 원칙과 신념의 지식인ㆍ활동가 존 밀턴(1608~1674)이 간절히 필요한 시대라고 설파하는 한 편의 소네트를 써서 밀턴에게 바쳤다. 웨즈워스의 심경으로 산민 선생의 영전에 드린다.
밀턴, 그대야말로 우리 시대에 살아 있어야 하겠다.
영국은 그대를 요구함이 간절하다.
지금 이 나라는 괴인 물 썩어가는 늪 같으니,
교회도, 군대도, 문학도, 가정도, 웅장한 부호의 저택도
마음 속의 행복을 잃었도다.
아, 우리를 일으키라, 우리에게 돌아오라.
그리하여, 우리에게 예의와 덕행과 자유와 힘을 달라.
그대의 영혼은 아득한 별 같이 고고하게 살았고,
그대의 목소리는 바다같이 울렸다.
맑은 하늘처럼 깨끗하고, 위엄 있게, 그리고 자유롭게
그대는 인생의 대도(大道)를 경건한 기쁨 가운데서 걸었다.
그러나 또한 가장 낮은 의무마저 피하지 않고. (주석 3)
한국처럼 이념ㆍ계층ㆍ지역ㆍ세대 간의 벽이 두터운 나라에서 사회의 지도적 인물이 벽을 넘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기란 쉽지 않다. 한 쪽의 인물이 상대 쪽에서는 배척당하기 일쑤다. 식민지→분단→전쟁→독재가 남긴 생체기라 하겠다.
산민 한승헌 선생은 벽을 뛰어 넘은 인물 중의 한 분이 아닐까 싶다. 진보진영에 속하면서도 보수 쪽 인사들과도 소통이 가능했다. 그렇다고 그의 길이 중도노선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독재ㆍ부패ㆍ독점ㆍ불의에 단호하다. 심장이 뜨겁고 영혼이 맑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의 진심이 통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다시 법치가 망치로 둔갑하고 관제 자유가 민주와 공화를 유린하는 시대에 선생의 빈 자리가 더욱 넓어보이는 것은 왜일까.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주석
3> 박상익, <밀턴평전>, 11~12쪽, 푸른역사, 2008.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