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수당을 만든 사람", "우리를 위해 밥도 굶어준 사람", "배지 없이도 구의원보다 더 열심히 일한 사람", 동네에서 아이스팩을 모으고, 중고생 100원 버스를 만들고, 은행ATM기 설치 서명을 받으며 당선된 진보당의 지방의원들. 그러나 당선의 기쁨도 잠시, "진보 지방의원은 뭐가 다른데?" 더 큰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배지를 달고 더 바쁘게 뛰고 있는 지방의원들의 분투기를 담습니다.[편집자말] |
윤석열 정부가 '민주노총 적폐화'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윤 대통령은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을 강경 일변도로 무릎 꿇리더니, 최근에는 '노조부패'를 운운하며 노동조합에 대한 적대감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다. '반노동 정치'인 셈이다.
여기, 민주노총 조합원인 지방의원이 있다. 전남 광양시 광양시의회의 진보당 백성호 의원이다. 그는 2010년 민주노동당의 노동자 후보로 출마해 첫 임기를 시작했다. 그 후로도 지역 시민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아 내리 4선을 이어갔고, 관록을 인정받아 올해 광양시의회의 부의장까지 맡았다. 그의 '노동자 정치'는 어떤 변화를 만들어 왔을까.
덤프트럭 기사에서 시의원으로
의원이 되기 전 그는 덤프트럭을 몰던 기사였다. 지금도 건설노조의 조합원이다. 체불임금을 받기 위해 투쟁하며 지회장까지 지냈다. 당시 당직자의 권유로 민주노동당에 가입하고 후보 출마까지 결심했다.
"실은 몇 개월은 후보 안 한다고 도망 다녔습니다. 당선될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사명감 같은 게 있었죠. 지금의 가시밭길을 자갈밭 정도로 만들어 놓으면, 다음의 누군가가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결심했어요."
노동조합 활동만 했다 보니 시민들에게는 처음 보는 후보였다. 그가 택한 방법은 요즘은 흔한 '피켓 인사'였다. 차량 통행이 많은 지역에서 이름 석 자 쓰인 피켓을 들고 매일 1시간 반씩 인사했다. 이렇게 세 달을 보냈다.
반면 가장 큰 경쟁자였던 민주당 후보들은 당내 경선이 끝나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비교가 되며 지역 분위기가 바뀌었다. '저런 사람을 한 번 뽑아줘야 한다'는 여론이 생겼다. 처음으로 노동자 후보를 낸 조합원들도 헌신적으로 선거운동에 임했다. 첫 선거의 결과는 1등 당선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길에서 인사를 하던 그의 모습을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민들은 기억했다.
의원이 되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
백 의원은 당선 직후 혹시나 있을 청탁을 피하고자 주변 사람들과 밥 한 번 먹지 않았다. 선거운동을 도왔던 이들도 혹여 부담을 줄까 내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그가 처음 찾아갔던 곳은 따로 있었다.
"건설노동자로 일할 때, 임금을 바로 지급하지 않고 어음으로 주던 관행을 바꿔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임금체불은 자주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원이 되고 제일 처음 찾아갔던 곳이 건설과였어요."
건설과 공무원과 마주한 자리, 시민들의 세금으로 발주한 공사에서 임금이 체불돼서야 되겠느냐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공무원들은 원청에 대한 관리감독만 하지 하청에 개입하지 않는다며 발을 뺐다. 백 의원은 이를 시스템의 문제로 보고 소극적인 공직사회의 태도를 고치기 위해 조례들을 더하고 보완했다. 그렇게 12년을 이어왔다.
"일 시켜놓고 돈 안 주는 게 제일 나쁘죠. 공무원들의 분위기도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시에서 발주한 공사뿐 아니라 민간에서 발생한 임금체불에도 적극 개입합니다. 체불임금과 관련해서는 공무원도 '우리 일'이라고 생각해요. 의정활동하며 제일 보람 있던 성과입니다."
노사갈등의 중재도 그가 자주 맡는 역할이다. 광양환경공사 갑질사건도 한 예다. 한 달을 넘게 천막농성을 이어오며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았는데, 그가 적극 개입해 합의를 이끌어냈다. 노동조합에서는 민주노총 조합원인 그에게 신뢰를 갖고, 사측에서도 시의원의 중재에 귀를 기울였다.
"의원의 역할 중 하나가 사회 갈등의 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사 분쟁이 있을 때도 제도권에 있는 시장과 국회의원, 시의원들이 다 역할을 해야 하거든요. 서로의 주장이 팽팽한데 팔짱만 끼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은 정치인의 역할이 아니라고 봐요."
200만원 버는 사람의 20만원
그가 생각하는 좋은 정치란 무엇일까.
"저는 정치가 우리 사회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 빈부의 격차, 학력의 격차가 결국 제도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번 임기 백 의원이 가장 역점에 두는 것은 생활임금이다. 사회복지시설이나 시에서 고용한 기간제, 민간위탁 노동자부터라도 최저임금 이상의 생활임금을 지급해 처우를 개선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난 임기 두 차례 조례를 발의했는데 모두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의회를 설득하고자 한다.
"지난 7월 시정 질문을 했는데, 시장이 그럽니다. '생활임금 조례를 제정한다고 하더라도 월 2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의원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라고요. 하도 괘씸해서 화를 냈지요. 천만 원 받는 사람의 20만 원은 예를 들어 하루 밥값이겠지만 200만 원 받는 사람의 20만 원은 자녀의 학원비일 수 있는 거니까요.
생활임금 이상의 임금을 받아 가계를 꾸리는 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어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겠지요. 모든 일은 사람이 합니다. 그런데 그 처우가 너무 열악하면 나아져야지요."
그에게는 지금 시민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최대 관심사다.
"시민들께서 가장 원하시는 건 역시 지역 발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나아지는 건 아니거든요. 일자리가 많이 생겨도 양질의 일자리가 아니라 저임금, 고강도 일자리가 생기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어요. 이런 고민 없이 막연히 지역 발전을 이야기하는 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무기는 '생일 연락'
그는 모든 민원과 현안을 '내일'처럼 여기고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다른 시의원들도 해결하지 못한 일을 끝까지 파고들어 해결하고 나면 그 민원을 요청했던 사람은 백 의원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일 잘한다'고 소문이 나니 이제는 먼저 백 의원을 찾아왔다.
"제가 1997년도에 덤프트럭을 시작해 13년을 했어요. 그리고 의정 활동이 12년. 제 인생에서 가장 오래 한 일, 가장 잘하는 일, 그리고 가장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 이것이었으면 해요."
백 의원은 소셜미디어를 자주 하지 않는다. 지역에 현수막도 걸지 않는다. 그의 무기는 따로 있다. 바로 '생일 연락'이다. 의정생활을 하며 저장된 시민들의 연락처만 1만5000여 개. 그중 1만2000개에 모두 생일이 빼곡히 입력돼 있다.
"의원으로서 평소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접하는데, 그중 1년에 한 번이라도 연락을 하는 사람을 몇이나 될까 생각하다 시작했어요. 전화를 받으시면 다들 좋아하시죠. 안부만 묻고 끝나는 통화도 있지만, 민원이나 고충을 듣는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인연을 맺기는 쉽지만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선거 때만 문자 보내는 건 별로잖아요."
매일 저녁 손수 연락처의 생일을 체크해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축하메시지를 예약하고, 오후가 되면 전화를 돌리는 것을 10년째 이어왔다. 백 의원에게는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4선을 이어온 힘
백성호 의원은 민주노동당에서 시작해 통합진보당, 민중당, 진보당으로 선거를 치렀다. 매번 쉽지 않은 선거였다. 탄압받고 무관심에 놓일 때면 '당을 바꿔보라'는 제안도 이어졌다. 하지만 '진보 의원 한 번 만들어보자'고 노력한 이들을 떠올리면 안 될 말이었다. 그렇게 4선을 했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시의원의 봉급은 활동비를 메우기도 부족하다. 초선 의원을 지내고서는 되레 빚이 늘었다.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대리운전을 뛴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이 길을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만족이죠. 사회 구조를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더라도 우리 지역의, 공직사회의 변화를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있어요.
요새 여수MBC 라디오에 출연하는데요,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 진보당 광양시의원 백성호입니다'라고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항상 세상이 우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이라도 분명 좋아지고 있다고, 저도 작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재밌습니다."
덧붙이는 글 | 진보당은 지방자치위원회(위원장 장진숙)를 두고, 지역정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지방의원> 연재기획은 지방자치위원회 편집팀에서 공동 취재해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