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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구집' 돌 박사 김진화 선생 .
'절구집' 돌 박사 김진화 선생. ⓒ 최미향

"암만 좋은 소나무가 있어도 소나무만 심으면 멋이 없어요. 넓적한 바위가 옆 아니면 밑에 있어야 조화를 이룬답니다. 돌은 남자고 소나무는 여자거든요. 우리 집에는 다 그렇게 해놨어요. 조경에도 음양이 맞아야 해요."

서산시 해미면 '절구집' 주인장 김진화(79)씨는 돌박사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전국의 산과 들, 계곡과 바닷가, 숲길, 마을 길 등에 머물던 흔하디흔한 돌멩이들을 하나씩 또 하나씩 모아 황금으로 만들어가는 그는 "우리 집에 만들어진 형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 똑같은 것들이 다섯 개예요. 아들만 5형제를 뒀거든요. 그래서 5라는 숫자에 유난히 애정을 둬요"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그는 지금으로부터 63년 전, 부모님의 손을 잡고 땅이 비옥하다는 서산을 가기 위해 7남매가 툰드라족의 네네츠 유목민처럼 이른 아침부터 먼 길을 넘어 이곳으로 안착했다. 그리고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멋진 집을 짓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돌을 모아 서산시 해미면 오학리에 '절구집'을 만들었다.

"평생을 적금 모아 그 돈으로 돌을 사 모으고, 절구를 사고... 그렇게 부지런 떨며 악착같이 살았어도 돌 모으고 사느라 가진 게 없어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돌들이 제 곁에 남아 저와 함께해주잖아요."
 
돌 박사 김진화 선생 .
돌 박사 김진화 선생. ⓒ 최미향
 
- 고향이 경북 문경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서산으로 오게 되셨는지요?

"우리 집은 경상북도 문경입니다. 8대 종손이었던 저희 부친은 모든 재산을 몽땅 팔아 문경 시골 부지에 벨벳공장을 운영하셨지요. 나일론이 출시되기 전까지는 아주 잘 됐어요. 그러다 1950년대 초, 새로운 신소재인 나일론이 등장하면서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게 됐죠.

그 무렵, 시골 동네에 서울 영락교회 교인들이 봉사활동을 왔어요. 그들은 '서산지역이 피란민 정착지로써 먹고 살기에는 아주 풍요롭다'고 해줬어요. 아버지는 7남매에 장남이었던 저를 불러 앉혀놓고 그러더군요. '이곳(문경)은 호밀이나 고구마밖에 심어 먹을 것이 없다. 하지만 서산 가면 배는 굶지 않는다.' 그렇게 부모님은 일곱 7남매를 끌고 서산으로 왔답니다.

빚을 내어 땅 3000평을 사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유난히 물기가 많아 여자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애를 먹었습니다. 정말 밤낮으로 농사일에 매달렸어요. 시간이 남으면 남의 집 일을 해가면서요. 결국 10년 만에 빚을 모두 갚는 기적을 낳았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참 억척스럽게 살았습니다."
 
집안에 가득한 수집품들 .
집안에 가득한 수집품들. ⓒ 최미향
 
-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 가장 힘들었을까요?

"아무래도 배고팠던 일이죠. 6.25 전쟁이 일어났어요. 낙동강을 건너지 못했죠. 우리는 전투 속으로만 돌아다녔어요. 불을 피우지도 못했습니다. 비행기가 북한군을 폭격하기 위해 연기만 나면 아군과 적군 할 거 없이 무조건 폭격을 가했죠.

그러다 보니 늘 배가 고팠습니다. 그럴 때는 말린 쌀과 보리, 콩을 빻아 하얀 천에 싸 놓곤 배고프면 찬물 한 모금에 보자기 안의 생가루를 입안에 털어 넣곤 했죠. 그것도 없어서 못 먹을 시절이었답니다.

그것 말고는 돌 지고, 나르고, 쌓는 것은 제가 좋아서 하니 별 어려움 없이 해나가고 있어요. 오죽했으면 비 오는 날이 참 싫을까요. 일을 못 하잖아요. 비만 그치기를 바랄 뿐이죠. 일하는 게 좋거든요."

- 해미면 비행장 입구에 계시다가 이곳 오학리로 오셔서 절구집을 만드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걸 하시겠다고 생각하셨는지?

"이곳 해미향교 옆에 터를 잡은 지도 어언 18년이 넘어가려 합니다. 산을 낀 곳을 찾다 찾다 겨우 찾은 곳이 여기예요. 특히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가 가장 많은 곳이 또 여기고요. 무엇보다 아름답기가 서러울 정도죠. 해미향교가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워낙 가난해서 소원이 멋진 집에서 한번 살아보는 것이었죠. 이곳이 제 꿈자리를 풀어놓기에는 딱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풍광이 워낙 출중해서 그 모습에 반해 계약을 했지요.

이사 온 그해부터 지금껏 손수 조경을 해오고 있습니다. 물레방아를 사다가 웅덩이를 만들었어요. 전국의 돌을 실어나르도록 자동차 트렁크를 아주 넓게 개조하기도 했답니다. 모든 것이 장착됐으니 그때부터 전국의 돌이란 돌은 다 실어나르며 돌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한번 보시겠어요? 돌탑인데 묘하게 세워져 있지요. 이것은 시멘트 대신 돌가루를 사다가 쌓았기 때문에 태풍이 아무리 불어도 꼼짝하지 않고 아주 튼튼하게 세워져 있답니다. 자그마치 트럭 아홉 대 분의 돌가루가 사용됐어요. 돌가루를 사용하면 다시 뜯어서 새롭게 쌓을 수도 있어 안성맞춤이에요."
 
해미면 절구집에 서 있는 돌탑 .
해미면 절구집에 서 있는 돌탑. ⓒ 최미향
 

- 절구집에는 특별한 것이 눈에 띄는데 '오송룡'이란 글자뿐만 아니라 대부분 같은 것들이 다섯 개씩 있네요. 왜 그럴까요?

"특별한 것을 발견하셨군요. 우리 집은 절구도 많지만 돌탑이 아주 많습니다. 돌탑들은 대부분 다섯 개의 돌에 맨 꼭대기에는 용머리로 마무리를 해놨지요. 소나무도 다섯 그루고요. 뭐든 5라는 숫자는 제겐 상당히 의미 있습니다. 제게는 아들만 다섯이거든요. 그래서 숫자 5에 유난히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웃음). 하나하나 쌓아 올리면서 아이들의 건강을 소원하고요. 조심스럽게 소나무를 심으면서 행복을 기원하지요.

제가 봐도 저는 참 부지런해요. 이 나이에도 농사를 지으면서 집으로 들어올 때마다 절대 빈손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거든요. 돌 하나라도 들고 들어와야 직성이 풀리죠. 참 재밌죠. 그래도 각자 생활하면서 외로울법도 하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게 바로 우리 아이들이 늘 절구집을 지켜주며 아버지와 함께 해주기 때문에요. 또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절구집'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풍미가 됐고요.

사실 돌은 백 개, 천 개, 수억 개가 있어도 같은 것이 없어요. 모양이 다르거나 크기가 다르거나. 사람도 변하고 굳은 약속도 변하지만 돌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게 참 좋아요."
 
돌 예찬가 돌박사 김진화  선생 .
돌 예찬가 돌박사 김진화 선생. ⓒ 최미향
 
- 해미향교에 올 때마다 눈에 익은 돌탑이 굉장히 신기했고 누가 만들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절구집'이라고 적혀 있는데 혹시 무슨 뜻이라도 있나요?

"사실 저는 돌이라면 무조건 좋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독 절구는 더 사랑하지요. 길을 가다가도 눈에 띄는 절구가 있는데 안 사고 돌아오면 몇 날 며칠 천장 위로 절구가 막 떠다녀요. 아예 생 몸살을 앓죠. 결국 뒤척이다가 다시 그곳으로 사러 떠납니다.

시골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절구를 찾아 헤매기도 했어요. 쌀도, 보리도, 콩도 찧는 절구. 밥도 반찬도 다 절구에서 나오는 그 풍성함이 저는 너무 좋았거든요. 절구의 채워짐도 좋고, 절구의 비워짐도 좋아요. 비워야 비로소 채울 수 있으니까요. 절구는 일단 쓸모가 있어요. 사람도 쓸모있는 사람이 좋잖아요. 그러고 보면 절구와 사람은 참 닮아 있어요.

그런데 강산이 참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이제는 1년이면 변할 정도로 바뀐 세상 속에서 우리는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있어요. 이처럼 사람도 세상도 빠르게 변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건 절구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소나무도 때가 되면 변할 것이고 아무리 잘 다듬어진 조경도 손이 가지 않으면 폐허가 돼요. 하지만 여전히 담을 수도 채울 수도 있는 절구는 그 자태를 당당히 내보이며 천년이든 만년이든 제 곁에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매력이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변한 마음에 받은 상처가 워낙 컸어요. 하지만 제 곁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은 절구와 돌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평생 저와 같이 살고 있어요. 더 이상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선생에게 돌은 애인이며 어머니다. .
선생에게 돌은 애인이며 어머니다.. ⓒ 최미향
 
- 선생님에게 돌은 어떤 존재인가요?

"하나하나의 돌이 제게는 반가운 친구고, 귀한 이웃입니다. 같이 살다가 몇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이기도 하고 지금은 다 커서 흩어져 사는 다섯 아들이기도 하지요.

거금을 주고 돌을 사러 온 사람도 커피 한 잔 대접해 그냥 돌려보내는 마음도 다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빈자리 든 자리 정확히 눈으로 짚으며 날마다 눈인사, 마음 인사 건네는 돌이 누구보다 제게는 말벗이고, 평생의 연인입니다. 돌과 저의 인연은 이렇듯 소중함을 넘어서 사랑 그 자체이지요. 어쩌면 그래서 더 돌 보기를 마치 황금 보듯이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합니다. 돌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큼은 천년만년 돌처럼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절구집에 세워진 돌탑과 소나무 그리고 옹기 .
절구집에 세워진 돌탑과 소나무 그리고 옹기. ⓒ 최미향
 
- 절구집은 또 다른 소중한 공간이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혼자 어머니를 모시고 절구집에서 살았습니다. 추억이 너무 많아요. 어머니가 떠나시고 난 후 한동안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빈자리를 절구들이, 소나무가, 돌들이 어머니가 저를 지켜주듯 지켜주었죠. 홀로 모시고 산 10여 년의 추억을 자연과 함께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혼자 남았지만 그렇다고 혼자가 아님을 이제는 압니다. 다섯 아들과 소나무, 절구, 물레방아, 채전밭, 돌탑들 그리고 하늘나라 별이 되어 저를 바라보시는 어머니.

지금까지 그랬지만 앞으로도 그리워할 틈 없이 늘 바쁘게 생활하니 심심할 새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유가 되면 다시 훌쩍 떠나, 어디에선가 또다시 나의 애인 돌을 줍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그렇게 모은 돌들은 11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새겨주신 '절구집' 어딘가에 고이 새워져 지나는 사람들의 흔적을 담아내고 있을지도요."
 
김진화 선생이 직접 쌓은 절구집 입구 .
김진화 선생이 직접 쌓은 절구집 입구. ⓒ 최미향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많은 분이 우리 집을 찾습니다. 커피는 얼마든지 열려있습니다. 부담 없이 드셔도 좋습니다. 특별 대접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돌 앞에서만큼은 잘 안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게 돌이지만... 거실이고 마당이고 간에 작은 돌멩이 하나도 제게는 귀한 자식이니까요.

아무리 조르는 사람이 있어도 선뜻 내주지 못해요. 물론 마음은 드리고 싶지만요. 그 빈자리가 너무 커서, 계속 가슴 한 켠에 맺힐 것 같아서 그 청을 과감히 물리칩니다. 너무 서운타 말아주시면 좋겠어요(웃음).

어느 계곡에서 가져왔는지, 또 어느 바위틈에서 빼 왔는지, 길을 가다 발에 밟혔는지, 어느 산길 모퉁이에서 가져온 돌인지 모두 기억해낼 수 있어요. 단 한 번도 허투루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제게는 귀하고도 귀한 존재들입니다. 왜냐면 이 아이들을 보면서 행복이 어떤 것인지 비로소 알 수 있으니까요."
 
입구에 서 있는 시비 김풍배 시인의 '돌탑쌓기' .
입구에 서 있는 시비 김풍배 시인의 '돌탑쌓기'. ⓒ 최미향

아래 글은 얼마 전, 돌절구 집 초입에 세워진 시비 김풍배 시인의 '돌탑쌓기'다.

모나게 태어나서 모난 대로 살다가
둥근 돌처럼 살고 싶어
모난 돌끼리 모여 돌탑을 쌓았다

그대와 나 아직도 깎이지 않은
모서리끼리 맞닿을 때마다 아파도
예쁜 돌탑 쌓아 비바람 견뎌냈다

함께 산다는 건 돌탑을 쌓는 일이다
큰 돌, 작은 돌, 세모 돌, 네모 돌
모난 돌끼리 어우러져
둥글고 멋진 돌탑을 만드는 일이다

너의 모서리에 내 모서리를 대주마
각진 모습 서로 보듬어
사랑으로 맺음으로 둥글게 쌓아보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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