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보강 : 28일 오후 6시 30분]
"총 투표수 271표 중 가 101표, 부 161표, 기권 9표로 부결되었음을 선포한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의 부결을 선포했다. 제21대 국회 들어 현역 의원 체포동의안이 처음으로 부결됐다. 2020년 2월부터 5번에 걸쳐 총 6000만 원의 뇌물 및 불법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는 노웅래 의원은, 이로써 구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검찰 조사를 받을 수 있게 됐다.
28일 오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제401회 국회(임시회) 제4차 본회의에 상정된 노웅래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은 무기명 투표로 진행됐으나 표차는 상당했다. 민주당이 여전히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앞선 체포동의안 가결 사례와 달리 범죄 혐의 입증에 있어서 다소 다툴 소지가 있다는 점 등에서 사실상 예견된 결과였다. 정의당은 앞서 체포동의안 찬성 표결을 당론으로 정했지만,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전례를 찾기 드물 정도로 거칠었다.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마치 공소장을 읽듯이 "증거가 차고 넘친다"라며 검찰이 확보한 증거를 설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장관 한동훈이 국회 본회의장에 선 게 아니라, 검사 한동훈이 법정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듯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고성을 내지르며 격렬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한동훈 "현장이 이렇게 생생하게 녹음된 사건 본 적 없다"
한동훈 장관은 "동료 국회의원에 대한 체포동의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서, 다음 두 가지 점을 고려하실 거라 생각한다"라며 "첫째, 증거는 확실한지, 둘째, 국회의원을 체포할 만큼 무거운 범죄인지가 그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우선 "노웅래 의원이 청탁을 받고 돈을 받는 현장이 고스란히 녹음된 녹음파일이 있다"라며 "구체적인 청탁을 주고 받은 뒤 돈을 받으면서 '저번에 주셨는데 뭘 또 주느냐', '저번에 그거 제가 잘 쓰고 있는데'라고 말하는 노웅래 의원의 목소리, 돈 봉투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도 그대로 녹음되어 있다"라고 밝혔다.
검찰이 혐의를 입증할 어떤 패를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거의 피의사실공표나 다름없는 상세한 설명에 장내에선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한 장관은 "저는 지난 20여 년간 중요한 부정부패 수사 다수를 직접 담당해왔지만, 부정한 돈을 주고받는 현장이 이렇게 생생하게 녹음되어 있는 사건은 본 적이 없다"라며 유죄를 자신했다.
이어 그는 검찰이 확보한 증거를 법정에서 나열하듯 "돈을 줘서 고맙다고 하는 노웅래 의원의 문자메시지도 있고, '저번에 도와주셔서 잘 했는데 또 도와주느냐'는 노 의원 목소리가 녹음된 전화통화 녹음파일도 있고, 청탁받은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 달라는 노 의원의 문자메시지도 있고, 청탁받은 내용이 적힌 노 의원의 자필 메모와 의원실 보좌진의 업무수첩도 있으며, 청탁을 이행하기 위해 공공기관에 국회의정시스템을 이용해 청탁 내용을 질의하고 회신 받은 내역까지 있다"라고 말했다.
한 장관은 "공여자 측과 참고인들도 일관되게 노웅래 의원에게 돈을 준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라며 "뇌물 사건에서 이런 정도로 확실한 증거들이 나오는 경우를 저는 보지 못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2022년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공직자라도, 직무와 관련된 청탁과 함께 수천만원을 받고, 명확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이 조작한 거라고 거짓 음모론을 펴면서 혐의를 부인하는 경우 거의 예외없이 구속수사를 받게 된다"라며 "대한민국의 다른 모든 국민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이 당연한 기준이 노웅래 국회의원에게만은 적용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저는 찾지 못하겠다"라고도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항의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고성이 장내를 채웠다.
노웅래 "조사과정에서 아무것도 안 물어봐... 방어권 완전 무시"
그러자 신상발언에 나선 노웅래 의원은 격앙된 목소리로 한 장관의 발언을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노 의원은 "한 장관, 증거가 차고도 넘친다고 얘기했는데, 그렇게 차고 넘치면 왜 조사 과정에서 (그걸) 묻지도, 제시하지도, 확인하지도 않았느냐?"라며 "(조사 당시)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갑자기 '녹취가 있다', '뭐가 있다' 이거는 방어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거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이어 "더군다나 한 장관은 '개별 사건 보고 받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했다"라며 "그런데 지금 국회 표결에 영향을 미치려고, 혐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증거가 차고 넘친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이런 정치 검찰의 수사를 믿을 수 있는 건가?"라고 따져 물었다.
그는 검찰이 확보했다는 해당 녹취에 대해 "우리 행정비서가 퀵서비스를 통해서 (전달자가 본인 몰래 의원회관에 두고 간 돈을 다시 돌려)보냈다는 것"이라며 "증인도 있고, 돈 줬다는 사람도 자기가 돌려받았다고 하는 건데 그걸 녹취했다고 지금 새로운 내용으로 부풀려서 언론 플레이를 해서 사실 조작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저도 (법정에서 사실관계를) 다투겠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 부정한 돈 받지 않았다"라며 "양심껏, 구설수 없이 의정활동 해왔다. 그런데도 하지도 않은 일을 (통해) 범법자로 몰아서 정말 억울하다"라고 호소했다.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 "억울하다"라는 호응이 터져 나왔다.
그는 검찰이 자택 압수수색 당시 확보한 돈다발이, 과거 축의금 등으로 받은 돈을 봉투에서 일일이 꺼내어 돈다발로 보이도록 만든 것이라고 재차 항변했다. 또한 "검찰은 이틀이 멀다하고 불법 피의사실 공표를 하고 있다"며 "언론 플레이"라고 비난했다. "조사조차 (제대로) 안 해놓고는 갑자기 표결을 앞두고 녹취록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제 방어권을 고의로 악질적으로 무력화 시키는 것이고, 녹취록이 진짜 존재하는 것인지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도 강조했다.
전직 장관들 체포동의안 설명은 300여자 수준... 한 장관은 1900자
한편, 한 장관은 이후 기자들과 만나 이날 표결 결과에 대해 "이게 잘못된 결정이란 건 국민들도 그렇고 여러분도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한다"라며 "국민도 오늘의 결정을 오래도록 기억하실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본인 발언을 두고 노 의원이 반발한 데 대해서도 "법무부장관이 국회에서 책임을 가지고 드린 말씀"이라며 "증거관계나 범죄 경중에 대해 말한 것이다. 제가 말한 대로 이해해 달라"라고 당부했다. 본회의장에서 녹취파일에 대해 공개한 것이 방어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원들이 체포동의서 내용을 못 보셔서 그런 것 같은데, 체포동의안에 들어있는 구속영장의 사유에 그 내용이 다 기재돼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한 장관의 이날 발언은 이전 법무부장관들의 체포동의안 설명에 비해 다소 이례적인 건 분명하다. 제21대 국회 들어서 가결된 체포동의안 3건의 경우, 법무부장관이 체포동의 요청 이유 설명을 위해 직접 나서기는 했지만 이토록 길고 상세하게 밝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2020년 10월 29일 정정순 의원 체포동의안 표결 당시 추미애 법무부장관의 발언은 국회 속기록 기준 띄어쓰기 포함 330여자였고, 2021년 4월 21일 이상직 의원 체포동의안 표결, 2021년 9월 29일 정찬민 의원 체포동의안 표결 당시 박범계 법무부장관의 설명도 각각 300자와 370자 수준이었다. 모두 해당 의원의 혐의와 체포동의 요청 경과를 정리해 알리는 수준이었다. 반면, 이날 한동훈 장관의 발언은 녹취록 기준 띄어쓰기 포함 1900자 이상이었다.
법무부는 입장문을 통해 "국회 체포동의안 표결 전에 표결의 근거자료로서 범죄혐의와 증거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국회법 제93조에 따른 법무부장관의 당연한 임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