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 조선후기 당시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에는 실학의 대가이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집대성해서 오늘날 <여유당전서>라는 걸작을 남겨준 정약용의 생가가 있다. 정약용은 어린 시절과 강진 유배 이후 남은 18년 여생을 이곳에서 함께했다. 여유당 아래에는 두물머리에서 합쳐져 하나가 된 한강이 서울로 흐르고 있다.
여유당에서 정북 방향으로 바라보면 운길산이 보인다. 운길산에는 두물머리를 위에서 한눈에 볼 수 있는 명소인 수종사가 유명하다. 어찌 보면 작은 암자처럼 생겼지만, 조선 왕실 여성들이 세대를 걸쳐서 팔각 오층석탑 안에 작은 불상을 시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석탑 옆에는 조선 태종의 딸 정혜옹주를 추모한 사리탑도 있다.
정약용 생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여유당과 조선 왕실 여성들이 사랑했던 수종사로 가 보자.
소년과 노년의 인생이 깃든 다산의 여유당
수도권에서 대중교통으로 정약용 유적지로 가려면, 경춘선 마석역 또는 중앙선 운길산역에서 내려서 58번 버스로 종점까지 가면 된다. 충청, 호남에서 오는 경우, 중부고속도로 하남 나들목을 지나 팔당대교를 건넌 다음 양평 방향 6번 국도로 꺾어 오른편 팔당댐과 정약용 유적지로 빠지는 길로 나가 유적지까지 쭉 가면 된다. 영남, 영동에서 오는 경우, 중부내륙고속도로 양평 나들목까지 간 다음 구리방향으로 한강을 따라 6번 국도를 타자. 이후 조안교차로에서 내려 좌회전한 후 쭉 들어가면 왼편으로 유적지가 보인다.
유적지로 들어가기 전 수많은 책들을 나선형 탑으로 표현한 조형물이 눈에 띈다. 1818년 강진에서 기나긴 18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인생 말미까지 자신의 모든 저술을 정리하려고 한 곳이기에 조형물이 세워졌다고 해야 하나.
그는 일생 동안 남겼던 문집들을 <여유당집>으로 정리하려고 했지만, 생전에 이루지 못한다. 대신 그의 후예들이 일제강점기 때 신조선사가 <여유당전서>로 편집하였다. <여유당전서>에는 다산의 시, 문, 사서삼경, 정책 심지어는 의학지식까지 집대성되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조형물을 지나 정약용의 생가로 들어섰다. 주변의 거대한 고목들이 다산 생가의 운치를 더한다. 생가의 이름은 그의 저서 이름과 같은 <여유당(與猶堂)>. 이 문구는 도덕경에서 따왔는데, 원문은 다음과 같다.
豫焉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코끼리처럼 머뭇거리니 겨울 개울을 건너는 것과 같고, 원숭이처럼 주저하니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다.
근데 구절 각 앞글자가 예유(豫猶)다. 그런데 다산의 여유당기에는 예(豫) 대신 여(與)로 표기해 당호를 지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음운상으로 예(豫)와 여(與)는 비슷해서 두 글자를 통용했다고 보고 있는데, 다산은 여(與)로 표기된 도덕경을 읽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與는 '주다'라는 의미 외에도 '의심하다'라는 의미도 있는데, 어찌 보면 정조 시절에 명망 깊던 문관이었다가 18년의 혹독한 강진 유배생활을 겪으며 더욱더 신중한 성격이 된 자신을 말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여유당을 보면 기둥이 덜 바랜 느낌이다. 정약용의 생애가 깃든 원래의 여유당이 1925년 을축년 홍수로 떠내려가 1980년대 들어서 새로 지었기 때문이다. 다산 인생의 마지막도 여유당과 함께 했다. 이는 여유당 서편에 그를 추모하고 영정을 모신 서당과 뒤편에 아내 풍산 홍씨와 함께 묻힌 무덤으로 알 수 있다.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로 핍박받은 삶을 살았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도 평생 동안 저술활동이라는 사명에 힘썼기 때문에, 1986년부터 다산문화제를 열어 그를 추모하고 있다.
조선 왕실 여성들이 사랑했던 수종사
정약용 유적지에서 정북으로 바라보면 600여 m 남짓한 산이 보이는데, 오늘날 중앙선 전철 역명에도 있는 운길산이다. 산 아래에는 조선시대에도 사랑받았던 조계종 사찰인 수종사가 있다. 시간이 여유가 있다면 운길산역이나 조안보건지소에서 출발해 등산이 가능하다. 소요시간은 편도로 약 1시간 40분. 만약 차를 가지고 왔다면 수종사 일주문 앞까지 갈 수 있다.
일주문, 불이문을 지나 계단을 계속 오르면 드디어 대웅보전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약용도 어린 시절과 노년기에 이곳을 자주 찾아갔다고 했는데, 독서를 위해 왔다고도 한다. 수종사 아래로 하얀 눈으로 소복이 쌓인 두물머리 일대를 보니, 이곳이 왜 다산의 안식처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수종사도 봉선사와 같이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운명을 겪었다. 그래서 대웅보전을 비롯한 건물들은 비교적 최근에 중창한 것이다. 다만 수종사가 적어도 조선 초기부터 이어졌다는 증거가 여럿 있는데, 대웅보전 옆에 사리탑, 작은 삼층석탑, 조선 초기 불탑형식으로 이뤄진 팔각 오층 석탑이 그 증거다.
먼저 왼쪽에 있는 사리탑을 봤는데,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팔각원당형 부도다. 보통 부도는 고승을 기념하는 게 대다수인데, 이 부도는 뭔가 특이한 점이 있다. 부도 지붕돌 추녀 각 끝면에 이런 글자가 적혀 있다.
太宗太后貞□翁主舍利造塔施主□□柳氏錦城大君正統四年己未十月日
태종태후정□옹주사리조탑시주□□유씨금성대군정통4년기미10월일
내용을 보면 태종의 태후가 정통 4년(1493)에 발원하고, 유씨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시주한 사리탑이다. 옹주면 후궁의 딸인데, 학자들은 태종과 의빈 권씨(위에서 말하는 태후이기도 하다)의 딸인 정혜옹주로 보고 있다.
옹주에 대한 기록은 실록에 몇 구절만이 남아 있는데, 훗날 세조의 계유정난에 참여한 박종우와 혼인했다는 기록과 혼인 후 5년 만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있다. 즉 고승이 아닌, 불심이 깊었던 왕실 인물을 추모한 특이한 사리탑인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널리 유행한 양식이다.
수종사와 왕실 여인들과의 인연은 그 옆에 있는 팔각 오층석탑에도 이어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조선 초기 석탑으로 보이는데, 1957년 해체수리 중에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기단부 중대석에서 18구가, 1970년 석탑 이전 때 2, 3층 지붕돌에서 12구의 불상이 발견되어 눈길을 끌었다(안타깝게도 이들 중 4구의 불상이 분실되어 오늘날에는 26구만 남아 있다).
불상들은 두 시기에 걸쳐 조성이 되었다. 먼저 태종의 후궁이었던 명빈 김씨가 1479년 시주, 발원한 후, 성종의 후궁들이 왕실의 번영과 수복장수를 위해 석탑의 1층 몸돌에 불상 6구와 금동불감을 안치했다.
나머지는 1628년 인목대비가 발원한 불상이다. 인목대비하면 광해군 때 아버지 김제남, 아들 영창대군과 역모에 몰려 서궁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서궁에 유폐될 때,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불경을 필사했는데, 복위 후 가족들을 추모하기 위해 발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정혜옹주를 기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인목대비의 불상까지 수종사는 적어도 200년 넘게 조선 왕실 여인들이 사랑했던 사찰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남양주 조안면의 두 명물인 정약용 유적지와 수종사. 정약용은 두물머리 근처인 이곳 여유당에서 태어났다. 정조에게 촉망받는 인재였다가, 그의 사후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18년의 유배생활이라는 굴곡진 삶으로 가득했다. 이로 인해 말년에는 정계에 나아가지 않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본인의 저술을 집대성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출세는 하진 못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여유당전서>라는 귀중한 유산을 남겼다.
정약용 생가 뒤편으로는 운길산이 있는데, 그 아래는 다산이 안식처로 삼았던 수종사가 있다. 처음 볼 때는 작은 암자처럼 보이지만, 정혜옹주를 추모한 부도탑부터 인목대비의 불상까지 조선 왕실 여인들의 숭유억불을 넘어선 불심을 볼 수 있다. 여유당 바로 앞에는 두물머리를 거친 한강이 흐르고 수종사에서는 두물머리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 정약용의 유산과 조선 여인들의 불심은 한강을 따라 한양을 거쳐 넓은 바다로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 동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