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되면 배가 못 들어올 정도라 낫 들고 쳐서 들어왔어."
경남 남해군 창선면 가인리 언포 어촌계장 강경율(77)씨는 잘피숲이 넘쳐나던 옛 기억을 떠올렸다. 연안 낮은 수심지에서 자라는 잘피숲은 잠시 귀찮긴 하지만, 어민들에겐 그야말로 보물과 마찬가지다. "고기가 난(알)을 주면 (잘피숲에서) 커서 바다로 나가"라는 강씨의 말처럼 잘피숲은 물고기 산란지이자 치어 은신처와 서식지로서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곳 어민 정해환(57)씨는 "5~7월에 산란하려는 감성돔이 진짜 많이 들어왔다"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잘피를 퇴비로 만들어 육지를 풍성하게 만들기도 했다. 잘피숲은 바다 오염원을 정화하고 적조 현상도 방지하며 물속으로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또 항균 작용과 연안 생태계 에너지 균형을 통해 1차 생산성을 증대해 주변 해양 생태계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더욱이 기후위기 시대 잘피숲은 중요한 탄소 흡수원이다. 육상 탄소 흡수 식물을 '녹색 탄소'(그린카본, Green Carbon)라고 하고, 잘피숲, 염습지 식물, 맹그로브 등 해양 탄소 흡수 식물은 '푸른 탄소'(블루카본, Blue Carbon)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맹그로브는 없고 염습지는 극히 일부만 있기에 대부분 잘피숲이 블루카본 역할을 한다.
IUCN(세계자연보전연맹)은 2009년 블루카본이 육상 생태계보다 최대 50배 이상의 탄소 흡수 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했다. 잘피 등이 있는 연안 생태계의 해저 면적은 0.5%에 불과하지만, 해양 탄소저장량의 70%까지 담당한다. 그에 따라 잘피숲은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풍성하고 깨끗한, 그리고 건강한 바다와 하나뿐인 지구를 위해 중요한 존재가 바로 바다숲, 즉 잘피숲이다.
잘피는 'Seagrass'라는 영어 명칭처럼 '바다에서 자라는 풀(해초)'의 총칭이다. 해양수산부 자료에 따르면, 지구상 해초류 대부분은 열대지방에 사는데 온대 해역에 속하는 우리나라엔 거머리말, 애기거머리말 등 9종이 있다. 9종 중 6종은 해양보호생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연안 잘피의 80%는 거머리말이다.
잘피와 같은 해초류와 해조류를 혼동하기 쉬운데, 미역이나 김과 같이 포자로 번식하는 해조류와 달리 해초류는 바닷속에서 꽃을 피우고 씨도 맺는다. 그러면서 육지 잔디처럼 땅속으로 뻗은 줄기로도 번식한다. 육상 포유류가 바다로 가서 고래가 됐듯이, 잘피도 약 1억 년 전 육상 식물이 다시 바다로 간 사례다.
예전 같은 바다를 만들기 위한, 잘피숲 복원
언제부터인가 흔했던 잘피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실제 언포 주변에선 군데 군데 한두 개체만 보일 뿐 예전 '배가 못 들어올 정도'의 잘피숲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피숲은 더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아니 그곳에서만 살아남았다. 언포 지역은 국내 대표적인 잘피 군락지인 동대만 인근으로, 동대만엔 약 159ha(헥타르)의 잘피숲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는 4년 전에 비해 40% 격감한 수치였다. 해양생태기술연구소 박정임 박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로 봤을 땐 1970년 이래 50~80%의 잘피숲이 사라졌다. 국제적으로도 30초마다 축구장 넓이의 잘피숲이 사라지고 있으며, 1990년 이후 매년 7%씩 감소하고 있다는 분석(김웅서 한국해양학회회장)도 있다. 매립과 준설, 과도한 어업 행위와 해양 오염 등이 잘피숲 감소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잘피숲이 사라져 황폐해진 곳에선 바다 사막화가 나타난다. "바다가 예전 같지 않다"라는 어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잘피숲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잘피숲 복원이 추진 중이다. 국제적으로는 1940년대부터 잘피숲 복원이 진행됐고, 우리나라에선 2009년부터 정부 중심으로 잘피숲(거머리말) 복원 사업이 추진됐다.
지난 12월 19일부터 23일까지 경남 남해군 창선면 가인리 언포 연안에선 민간단체 중심의 바다숲(잘피숲) 복원 활동이 진행됐다. 이 사업은 KB국민은행이 조성한 기부금(KB Net Zero S.T.A.R.)을 바탕으로 국제환경전문단체 에코피스아시아와 해양생태기술연구소, 한국수산자원공단(FIRA)이 협력했다.
이태일 에코피스아시아 사무처장은 "잘피숲 복원이 바다 사막화 해결의 대안으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라며 이 사업 취지를 밝혔다. 잘피숲 복원은 성체 이식과 종자 파종 등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기자는 21일 아침부터 잘피숲 복원 과정에 참여했다. 수도권에 폭설이 내릴 때 남해군 일대는 비가 내려 체감 온도를 떨어뜨리는 날씨 속에서 작업이 이어졌다.
이날은 성체 이식 작업이 진행됐다. 성체 이식은 잘피 채취부터 시작한다. 언포에서 작은 연근해 조업용 1톤짜리 어선을 타고 10분 남짓 이동해 식포에 도착하자 해양생태기술연구소 소속 연구원들은 20여kg 잠수 장비를 메고 썰물로 물이 빠진 동대만 수심 2m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30여 분 지나 물 위로 올라오면서 포대 자루 가득히 잘피를 담아왔다. 한 포대에 200~250개의 잘피가 담겨 있다.
전날보다 물살이 셌다. 어민들은 이를 "물이 산다"라고 표현하는데, 물속 작업이 그만큼 힘들다는 걸 의미한다. 게다가 잘피 채취는 그냥 뽑아내는 게 아니었다. 해양생태기술연구소 송휘준 박사(48)는 "지하경(땅속줄기) 세 마디까지 손을 집어넣어서 따낸다"라며 "한 개 한 개 솎아서 채취한다"라고 말했다.
공들여 하나하나 채취하는 건 이유가 있다. 이식 과정에서 광합성을 못 하는 잘피는 지하경의 양분을 사용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세 마디 이상 확보해야 이식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 또 한 개씩 솎아서 채취하는 것은 뽑은 자리에서도 복원이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채취한 잘피는 이동 중 덮개를 덮어 대기 노출을 최소화하고, 이식지에 도착해선 우선 바닷물 속에 담가둔다.
군락지 훼손 줄일 수 있는 종자 파종이 대세
잘피 성체 채취 지역에서 이식지가 가까워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잘피가 받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겨울 작업은 고될 수밖에 없지만, 상대적으로 잘피 성장이 더딘 가을부터 겨울철이 잘피 성체 이식의 적기라는 것이 이 분야 전문가의 판단이다.
성체 이식의 두 번째 과정은 다듬는 과정이다. 해양생태기술연구소 연구원 8명이 물에 담긴 잘피 주변으로 쪼그려 앉아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잘피를 50cm 크기로 자르면서 잘피 성체 2개마다 뿌리 부분에서 철사를 끼운다. 이는 식재했을 때 양성부력으로 잘피 성체가 뜨는 것과 파도나 조류에 따른 유실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러한 철사고정법(Staple method)은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한다.
해양생태기술연구소 박정임 소장(55)은 "20~30개체를 한 번에 이식한다 해도 서로 성장에 방해를 줄 수 있어 100% 다 살기 힘들다"라면서 "적은 개체를 넣어서 많이 번식하도록 하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박 소장은 "1년 후면 300%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잘피 이식은 아주 대단한 기술은 아니지만, 정성을 들여서 잘 살게 하는 게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라고도 덧붙였다.
이날까지 채취한 잘피 성체는 7200개에 이른다. 이를 하나씩 다듬는 과정은 며칠씩 걸린다. 이식 준비를 일부 끝내고 나면 이식 단계로 접어든다. 이식은 언포 주변 훼손지가 대상이다. 박정임 소장, 송휘준 박사 등이 직접 잠수해서 우선 부표를 달아 이식 지역을 표시한다. 이후 바구니에 담긴 잘피를 물속으로 가져가서 50cm 간격으로 하나씩 심어나간다. 3일에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이날은 잘피 식재 작업만 대략 2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2000년대 이후 선진국에서부터 종자 파종 방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기존 군락지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최근 국내에서도 종자 파종 방법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여름이 되면 잘피는 2m까지 자라면서 한 개체 당 100개 정도의 종자를 맺는다. 이들 단체는 6~7월 정도에 종자를 채취해 성장 유도 황토 매트 방법을 활용해 가을이나 겨울철 파종할 예정이다.
1997년 해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잘피숲의 경제적 가치는 1ha당 연간 1만9000달러(한화 약 2400만 원)라고 한다. 동·서·남해안 잘피 현황을 조사한 박정임 소장에 따르면, 우리나라 거머리말 군락지 면적은 4000ha라고 한다. 이를 단순 계산하면 연간 960억 원(4000ha×2400만 원)의 경제적 가치가 있는 셈이다.
중요한 것은 1997년 연구엔 탄소 흡수 편익이 빠져있다. 탄소 흡수에 따른 편익까지 고려한다면 잘피숲의 경제적 가치는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박정임 소장의 말이다. 그는 "(잘피숲이) 계획대로 잘 번성되는 걸 보면 매우 보람이 있다"라면서 "복원도 중요하지만, 가장 급선무는 (잘피숲을)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에코피스아시아와 해양생태기술연구소 등은 언포 주변에서 성체 이식 0.25ha, 파종 0.75ha 등 총 1ha의 잘피숲을 복원할 계획이다. 이들 단체는 잘피 성체 이식과 종자 파종 이후 2025년까지 3년 동안 분기당 1회씩 발아율, 밀도, 형태적 특성을 직접 확인하는 등의 사후 관리에도 집중할 예정이다.
|
▲ 블루카본 바다숲(잘피숲) 복원은 어떻게? 지난 12월 19일부터 23일까지 KB국민은행, 에코피스아시아, 해양생태기술연구소, 한국수산자원공단(FIRA)이 공동으로 경남 남해군 창선면 가인리 언포 일대에서 잘피숲 복원을 위해 작업에 나섰다. 영상엔 잘피 채취부터 다듬는 과정, 이식 과정을 담았다.
|
ⓒ 에코피스아시아/해양생태기술연구소 |
관련영상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