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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감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1년 여 동안 돌보지 못했던 벌교사립송명학교와 남선무역회사 등이 많은 빚에 몰려 휴업상태가 되어 있었다. 일제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반도를 병력과 물자의 보급기지로 만든 일제는 징병제·학병제·여자정신근로령을 잇달아 공포하면서 청장년들을 총알받이로 끌어갔다. 

벌교집 지하실에서 고성능 라디오로 매일 2~3회씩 영어방송을 듣고 있었으므로 전황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알수 있었다. 전세가 점점 일본이 불리해지는 것을 알고 몰래 일장기를 구하여 태극기로 변경해 만들어 비밀리에 감추어 두었다.

일경의 눈을 피해서 순천에 있는 김양수씨와 몰래 만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상의하였고 해방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희열에 찬 대화를 서로 나누었다. 전날에 가까이 하지 않았던 친구들도 번번히 찾아와서 세계정세에 대하여 문의하였고,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상의해 오기도 했으므로 나는 동지를 많이 규합할 수 있었다. (주석 1)

일제 말기 총독부는 이른바 미전향 사상범과 위험인물들을 대대적으로 감금하거나 전향공작을 폈다. 이때 변신한 민족진영의 인물이 적지 않았다. 서민호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고 풀려나와서는 고향집에 칩거하는 등 끝까지 몸을 더럽히지 않은 소수의 엘리트였다. 그리고 마침내 8월 15일 일제는 연합국에 항복했다. 

나는 광복이 올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물러선 후의 혼란상태에 대비할 갖가지 준비에 전력을 다했다. 8월 17일 광복축하 행렬을 하겠다는 김양수 동지의 연락을 받고 감격에 찬 마음으로 순천에 올라가 대열에 참석했다. 전남에서는 순천이 제일 먼저 축하행렬이 있었고, 그 이틀 후인 8월 19일에 벌교에서도 축하행렬을 했다. (주석 2)

그는 사회적 혼란을 막고자 8.15 직후 벌교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위원장에 선출되고 부위원장에는 박평준·최창문이 선임되었다. 귀환 장병들과 마을청년들로 특보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도망치는 일본인들을 붙잡아 맥아더 사령관이 포고한 대로 1인이 1천 원 이상은 못가지고 가게 통제하였다. 그리고 신발을 벗고 태극기 앞에 절을 하도록 지시했다.

"이들이 준 35년간의 지긋지긋한 고통과 수모가 이 정도로 해서 보상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우리 조국과 민족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할 당연한 응분의 벌은 있어야 했던 것이다." (주석 3)

이런 일이 광주의 일본군 위수사령부에 알려진 것인지, 8월 19일 고바다깨 위수사령관의 인솔 아래 법원장, 검찰장, 경무부장, 내무부장 등이 무장한 일본군 50여 명을 대동하고 벌교지서에 도착하여 서민호를 불렀다. 심한 언쟁이 벌어졌다. 고분고분할 그가 아니었다. 소싯적부터 쌓이고 쌓인 원한도 작용하였다.

일본군 책임자가 칼을 뽑아들고 군인들에게 사살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서민호는 준엄하게 타일렀다.

"너희 천황이 미주리 선상에서 무조건 항복했다는 방송을 들었다. 8.15 이후부터 잔인한 너희들 식민정책은 끝이 났고, 우리가 그동안 받아온 고통을 너희들에게 돌려줄 단계에 왔다."고 호통을 쳤다.

이런 사이 1만여 명의 주민이 지서를 둘러싸고 지켜보고 있었다. 군인 하나가 다시 총격의 자세를 취하자 서민호는 주민들을 바라보면서 "너희가 살아 돌아가려면 무기를 놓고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그제서야 주민들의 숫자에 깜짝놀란 고바다깨가 무사히 귀국하도록 도와달라고 읍소하였다. 

중앙의 해방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망명지사들은 아직 귀환하지 않았고, 미군정이 들어섰으나 체제가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혼란상태는 지방도 다르지 않았다. 중앙의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벌교 건준에도 지침을 내렸다.

서민호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수·순천 좌익청년 150여 명이 곡괭이·죽창을 들고 집으로 몰려왔다. 이들은 손에 수갑을 채워 이유 불문하고 광주도청 지하실에 감금하였다. 어처구니없는 봉변이었다. 

"내가 왜 이런 지하실에 수갑을 찬 채 자야 하는 지 그 이유나 알자"고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광주치안대장 주봉식(체육학교출신)씨가 들어왔다. 전부터 친분이 있어 퍽 가깝게 지냈던 터라 반가운 생각에서 내가 당한 사정을 얘기했더니 그는 술이 만취되어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지금은 무어라 말할 단계가 아니야"하고는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 자게 되었다.

다음날 도청, 법원에서 나온 직원들이 조사를 하는데 "무슨 권리로 나를 조사하느냐. 큰 과오를 범하지 말아라. 미군이 진주하면 사태가 달라질 것이다" 하였더니 조사를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벌교에서부터 최영실(후일 광주·부산서장)·설창구·장희춘 동지들이 내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 계속 따라 다녔는데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줄 알고 세사람이 주동이 되어 하룻밤에는 형무소문을 때려 부수고 치안대와 대치하면서 나를 구출하려다 설창구씨는 이가 몇 개 빠졌고 장희춘씨는 다리를 다치는 등 나를 구출하려는 동지들은 심한 상처를 입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끌려가고 말았다. (주석 4)


주석
1> <이 정권과의 투쟁(15)>.
2> 앞과 같음.
3> 앞의 글 (16).
4> 앞의 글 (18).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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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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