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여 납북귀환어부들의 구술을 채록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연재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납북귀환어부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고, 이들이 국가의 보호로부터 버림받은 '피해자'라는 인식이 높아졌다.
특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서 1000여 명에 가까운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을 직권조사하고 있으며, 지난해 6월에는 파비안 살비올리 유엔 인권이사회 진실·정의·배상·재발 방지 특별보고관이 납북귀환어부 면담을 통해 피해자 배상이나 명예회복 관련 조치가 미흡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사법적 회복을 위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에 지원팀이 만들어져 재심 등 법률 지원을 하는 중이다.
이런 노력으로 인해 지난해 춘천지검 속초지청은 '납북귀환어부 인권침해진실규명 협력 TF'를 만드는 등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속초지청의 이러한 노력은 납북귀환선박 창동호 피해자들의 재심을 직접 청구하는 등 피해자 권리구제를 위해 노력해 무죄를 선고받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지난 2월 7일에는 진실화해위에서 1969년 5월 28일 귀환한 선박 23척 150명에 대해 대규모 진실규명을 밝혀내는 성과도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언론과 방송을 통해 알려졌고 숨죽여 지내던 납북귀환어부 피해자, 유족 등이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오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까지 민변 등에 동·서해안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로 신고한 이들이 100여 명(선박 35척가량)에 이른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밝혀진 납북귀환어부 진실규명 등을 통해 당시 당국의 처리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불법 구금의 문제다. 귀환한 어부들을 조사했던 수사기관은 구체적 물증이나 혐의도 없이 연행하여 구속영장도 없이 짧게는 며칠에서부터 길게는 몇 개월 동안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구타, 고문 등 가혹행위를 통해 고의월선 혐의 등을 조작하였다.
여수선적 동림호의 경우 1971년 5월 19일 북한에 의해 납치되어 다음 해인 1972년 5월 11일 새벽 인천항으로 귀환했다. 13일 오후 1시까지 경찰의 고문 수사를 받은 뒤 중앙정보부로 인계되어 추가 조사를 받았다. 선원들은 16일 오후 1시에 여수경찰서로 인계되어 여수 세관감시구역 안전가옥에 불법 감금된 채 고문 수사를 받았다.
선원들은 구속영장도 없이 십수 일간 조사를 받고 29일에서야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동림호 선장 신평옥씨는 20여 일 넘게 감금 조사를 받고 6월 9일에서야 구속영장을 받았다. 동림호의 경우처럼 납북귀환어부를 불법 수사한 경우는 앞선 사례에서 수도 없이 확인하였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수사 과정에 경찰뿐 아니라 당시 내무부, 수사지휘권한이 있는 검찰, 중앙정보부 등이 모두 관여했다는 점이다. 이번 취재를 통해 이런 기관들이 귀환 당시부터 인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이는 귀환어부들이 불법 감금된 채 수사받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조했고 수사를 지휘·감독한 해당 검찰청은 불법 수사를 알면서도 이들을 기소하고 처벌했다는 것이다.
2020년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된 납북귀환어부 김봉호 재심 사건(속초지원 2019재고단1)의 판결문을 예로 들어보자.
"피고인 등에 대한 범죄인지보고는 1972. 5. 10자로 작성되었고(증거목록 2번), 1972. 5. 11자 한국일보에는 '귀환선원들은 방역을 마친 후 춘천지검 속초지청 이갑열 검사에 의해 국가보안법 및 수산업법위반 혐의로 전원 구속되었다'는 기사가 게재되었으며, 피고인 등에 대한 경찰 피의자신문조서는 1972. 5. 13 및 같은 달 14.에 작성되었을 뿐만 아니라(증거목록 14,16, 18, 20, 22, 25번), 피고인 김봉호의 신병은 1972. 5. 15 중앙정보부로 인계되었는바(증거목록 13번), 피고인 등은 귀환한 날인 1972. 5. 10. 수사기관에 의하여 검거되었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피고인 등에 대한 구속영장은 1972. 5. 15 또는 1972. 6. 7 발부되어 집행되었는바, 피고인 등은 불법으로 체포, 감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인정된다."
위 재심 판결문에 따르면 경찰의 불법감금 등을 통한 불법 수사를 검사는 이미 인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서해안에서 납북되었다가 지난 2019년 7월 군산지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남정길씨 등 재심판결문(2018재고합2)에도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어부들은 정말 월선했나
납북귀환어부에게 적용한 반공법, 국가보안법, 수산업법 위반 혐의에 대한 증거는 선원의 자백과 그 자백을 통해 경찰이 납북지점을 표시한 해도가 전부이다. 그러나 당시 바다에는 군사분계선이나 어로저지선을 표시하는 표식이 없었다. 또한 당시 선박에는 나침반 외에 해도 등 해양 위치를 알 수 있는 장비가 부재했다.
앞서 살펴봤듯 귀환어부에 대한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불법 구금, 가혹행위를 통해 임의성 없는 자백을 받은 것으로 이는 증거 능력이 없어 보인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선장 중에는 글을 모르는 경우도 있어 경찰 조사에서 북위, 경도의 위치를 진술한 것은 허위 자백으로 보였다고 한다.
납북귀환어부들의 북한해역 월선이 허위라고 의심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납북귀환어부 귀환 당일에서야 피랍장소가 기재됐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납북 당시에는 피랍 사실이나 지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던 당국은 선박이 귀환되어서야 피랍지점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로지 납북된 선원들의 자백이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실제 지난 2017년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충남 장항의 신성호와 복순호 선원의 재심 판결문(서울고법 2015재노7)에는 이렇게 나온다.
"권○○(인천해양경찰대 경사)이 피고인들의 피랍 지점을 특정하는 과정에서 전제한 사실들, 즉 신성호와 복순호의 진행방향 및 속력, 예인관계, 운항시간 등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증거 능력이 없는 피고인들 등의 각 진술에 기초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진술들에 의한다고 하더라도 당시 신성호와 복순호는 해도도 없이 선장이 나침판을 이용하여 방위를 확인하고 항해하였는데 신성호와 복순호의 선장으로 항해를 지휘한 임○○와 임○○은 남한으로 귀환하지 않은 이상 그 진술들이 객관적으로 정확하다고 보기 어렵고, 권○○의 위 추론 역시 그 내용 자체로 대략적인 추론일 뿐이어서 과학적으로 그 정확성이 담보된다고 보기 어렵다."
즉 해도조차 없는 선박을 몰던 선장이 전자장비 없이 납치지점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당시 납북지점을 특정했던 해경 수사관 역시 선원의 추론적 자백에 의해 납북지점을 추정했다는 것으로 정확한 납북지점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심지어 납북되었던 선박이 군사분계선뿐만 아니라 어로저지선조차 넘지 않고 우리 해역 안에서 조업하던 중에 납치되었다는 것을 파악했음에도 이들을 국가보안법, 반공법으로 처벌한 사례까지 있다. 1968년 10월 31일 고성경찰서에서 작성한 '납북선박 발생보고'에 이렇게 나온다.
"1968. 10. 30. 08:30경 목격자 복성호 선장 김자하 외 7명은 어로저지선 남방 지점에서 어로 작업 중 아 선박 2척이 북괴 쾌속정에 의하여 포위 선회하다가 북괴쾌속정 2척이 추가로 달려와 동 아 선박 2척을 나포 북상하는 것을 보았다고 귀항 후 신고"
이 보고에 따르면 어부들이 군사분계선이나 어로저지선을 월선하여 조업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성경찰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69년 5월 29일 이 선박이 귀환한 뒤 '고의월선'한 것으로 조사하여 처벌하고 만다.
이뿐만 아니라 같은 날인 1969년 5월 29일 귀환한 선박 중 7척에 대해서도 어로저지선(북위 38도 34분 45초)이나 북방한계선(북위 38도 35분 45초) 넘지 않은 선박을 처벌한 사실이 드러난다. 앞선 고성경찰서가 1968년 11월 8일 작성한 '납북선박 발생보고(제3보)'에 따르면 동선호(선장 황원식), 왕양호(선장 김병학), 대양호(선장 김용환), 수진호(선장 황복석), 영덕호(선장 고명봉), 대동2호(선장 김재수), 송학호(선장 이우호)' 등이 납북되었으며 해군으로부터 확인된 지점은 이렇다.
"1차 11. 8. 09:50 북위 38도 36분 20초, 동경 128도 30분 20초 어선 1척이 납북, 2차 11. 8 10:05 북위 38도 36분 20초, 동경 128도 29분 20초 지점에서 어선 2척이 납북, 3차 11. 8 10:25 북위 38도 33분 08초, 동경 128도 33분 지점에서 어선 4척이 납북되었다."
이는 어로저지선, 북방한계선 아래로 우리 해역을 침범한 북한 선박에 의해 우리 어선과 선원이 납치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를 통해 더욱 명확히 밝혀졌다. 지난 2월 7일 '1969년 5월 28일 귀환 선박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문'에 따르면 "당시 대부분의 납북귀환어부들은 남한 해역에서 정상적인 조업 중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수사 과정의 가혹행위로 인한 허위진술강요 등으로 인해 월선여부가 조작된 것이라는 의미다. 비단 1969년 5월 28일 귀환한 선박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앞서 살펴본 1972년에 돌아온 협동호, 탁성호 등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처벌 이후 계속되는 국가의 감시
1972년 5월 10일 귀환한 여수 선적 동림호 선장 신평옥씨는 출소 이후에도 '동네 사람들이 경찰에서 돈을 받고 나를 감시했다'고 말했다. 감시자들은 집 주변 대나무밭에 숨어 감시하기도 하고, 자신의 집 마루 밑에 들어가 감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사복차림의 경찰은 일상을 감시했으며, 전향을 종용하며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자녀가 광주에서 생활할 때도 경찰의 확인 전화와 감시를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좌제 피해는 여러 사람에게서 확인된다.
납북귀환어부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바로 보안관찰이다. 1971년 납북되었다가 1972년 9월 7일 귀환한 승운호 선원 김성대씨는 납북귀환어부로 처벌받고 출소한 뒤에도 오래도록 보안관찰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기관의 감시를 받으며 지내야 했다. 함께 귀환했던 해부호, 승해호, 승운호, 신광호 등 많은 귀환어부들의 대표적인 피해다. 감옥에서 출소했지만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수십 년간 해야 했다.
이러한 보안관찰과 경찰의 감시는 피해자들의 사회진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72년 9월 7일 귀환한 김성학(승해호)씨는 경찰의 지속적 감시로 인해 회사에서 퇴사 권유를 받아야 했고, 이성국(명성호)씨는 조업선박에 승선할 때마다 경찰이 찾아와 일자리를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납북귀환어부의 또 다른 어려움은 거주 이전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1969년 5월 29일 귀환한 대동호 선장 김재수씨는 출소 후 '어디 갈 때는 경찰서에 반드시 신고하라'고 하여 반드시 신고하고 다녔다. 1972년 9월 15일 귀환한 무진호 선원 손용구씨 딸 손금옥씨는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너무도 싫어 축구 선수였던 아들의 국가대항전 경기를 보러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감시는 결혼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명성호 선원 이성국씨나 해부호 선원 임○○, 대양호 선원 이덕천씨 등과 같이 결혼을 하지 않거나 어렵게 결혼했지만 당국의 지속적 감시로 이혼을 겪어야 했던 피해자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부친의 납북귀환 사실이 알려져 이혼했던 자녀도 있었다.
그밖에 출국의 제한(대양호 이덕천)을 받거나 납북귀환어부라는 이유로 군입대에서 차별(승해호 심운섭 등)을 겪는 피해자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공안 시국마다 이유 없이 불려 가 조사받기 일쑤였다.
"하남에서 하던 대리점이 번성하여 사업을 확장하고 있을 때인 1985년, 느닷없이 이근안에게 끌려가 고문당한 뒤 '간첩'으로 기소되었다가 다행히도 무죄가 되었다. 그러나 그 고문 이후 다리를 다쳤고, 인생의 동반자였던 아내와도 헤어져야 했다." - 승해호 김성학(1972년 9월 7일 귀환)
"1985년 가을경에 잠실 롯데월드 공사 현장에서 일할 때였어요. 퇴근하려고 나오는데 젊은 애들 2명이 있더라고. 나보고 '김상기지?'하더라고. 느낌이 딱 왔어요. 차에 태우더니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가더라고요. 수사관이 '지금부터 아무것도 묻지 말고 보지도 말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조사실에 들어가서 보니 문이 완전히 닫는 문이 아니야. 파티션처럼 아래는 보이는 문이야. 물트랜치(물배수관)가 양쪽으로 파져 있어서 물이 내려가는 거지. 거기 안에서 비명소리도 들려서 또 누구 때려잡는구나 했지." - 승운호 김상기(1972년 9월 7일 귀환)
"아버지가 한 번씩 사라져요.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자주 잡혀가요. 한번은 식구들이랑 같이 밥 먹는데 어느 기관 사람이 찾아와서 장천식 나와 보라고 해서 아버지가 옷을 걸치고 나가서는 사라졌어요. 그렇게 갔다가 한 일주일에서 15일 씩 조사를 받고 와요. 올 때는 파김치가 돼서 와요. 어디서 맞고 왔는지 다리를 절뚝대고 가슴도 아파하고 힘들어해요. 와서 며칠씩 누워 있어요. 그러면서 우리보고는 절대 밖에 못 나가게 해요. 나가면 누가 붙잡아 간다고 하면서 절대 나가지 못하게 해
요." - 대양호 장천식(1969년 5월 29일 귀환) 딸 장옥주
이처럼 이들은 당국으로부터 늘 감시받는 대상자였고, 모든 공안사건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전과자였으며, 아무런 법적 보호조치도 받지 못하는 인권침해 사각지대에 놓인 시민이었다. 조작된 월선 사실로 인한 납북귀환어부들의 인생은 비참했다.
납북귀환어부들에 대한 지속적 감시는 2차 피해를 낳았고, 납북귀환어부들은 ▲ 재판 처벌 후 지속적 감시(보안관찰 등) ▲ 연좌제 피해 ▲ 취업제한 ▲ 거주 이전의 제한 ▲ 파혼, 이혼 등 피해 ▲ 출국 제한 ▲ 군 입대 제한, 불법 조사 등의 피해를 당했다.
결국, 납북귀환어부의 범죄사실 여부는 생계와 조업을 위해 바다에 나갔던 어선이 고의월북 후 북한의 지령을 받고 귀환했느냐는 문제였다. 조사에서 군사분계선을 월선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고, 특히 월선을 입증할 근거가 없음에도 가혹행위를 통해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등을 무리하게 적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에 대한 체계적 관리를 위해 전담 카드 등을 작성해 관리하고 이를 토대로 범죄혐의가 없음에도 언제든 불러 불법 수사를 자행하기도 하였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까지도 연좌제 피해를 통해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을 받는 상황이 확인되었다.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부는 아직 생존해 있거나 피해사실을 드러낸 납북귀환어부와 유족을 상대로 피해를 조사하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가능하도록 하는 특별법 제정 등 실질적 조처를 통해 더 이상 눈물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납북귀환어부의 피해사실을 규명해 납북의 문제가 바다로 나갔던 어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군과 경찰에 있었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국가는 이들의 억울한 과거사와 고통에 사죄하고 납북귀환어부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납북귀환어부들에 대한 잘못된 기소로 선원과 가족의 인생을 더없는 고통으로 빠뜨렸던 검찰의 책임 역시 크다. 검찰은 진실화해위 권고에 따라 납북귀환어부 문제에 대한 '특별재심' 기구를 설치하고 재심이 신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의 상실된 몸과 마음이 치유될 수 있는 의료적 지원도 정부와 지자체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강원, 전남, 경북 일부 지역에 '납북귀환어부' 피해를 지원하는 조례가 제정되어 있다. 납북귀환어부 피해자가 가장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기, 충남, 전북에서는 조례 등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해당 지자체는 피해자 발굴에 적극적 의지를 보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의 구제를 위한 특별법에 국회가 나서야 한다. 현재 진실화해위 결정 등을 통해 억울함이 증명된 납북귀환어부들은 개별적으로 재심을 신청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피해자의 신속한 권리구제를 위해 특별재심단을 포함한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
납북귀환어부 피해자가 수천 명에 이르고 연좌제 등 피해를 당한 가족들까지 포함한다면 수만 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납북귀환어부들에 대한 '전체 피해규모 조사'는 요원한 상태다. '납북귀환어부'로 처벌받고 지속적 보안관찰 등을 통한 사회생활의 제약은 피해자들을 술 등에 의존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훼손'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국가에 의한 이러한 폭력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내용을 포괄적으로 담은 피해구제 법률이 마련되어야 한다.
정부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피해사실, 아직 숨죽이고 숨어있을 납북귀환어부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과거 반세기의 문제가 1~2년 안에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동안 밝혀진 수십 명의 피해자와 유족은 전체 피해의 일부라는 점을 인지하고, 각기 다른 고통을 수반했던 피해자들의 회복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