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늦잠을 자고 있으면 방문을 벌컥 열고 엄마가 늘 하시던 이야기가 있죠? '어서 일어나, 해가 중천에 떴어!' 어린 저는 중천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내가 엄청나게 게으르다는 뜻인가 보다라고만 생각했었죠.
아침잠이 없어진 요즘은 일출 전 하늘이 태양 빛으로 붉게 물드는 것부터 태양이 지평선 가까이에서 모습을 드러내 서서히 하늘 높이 올라가는 모습을 차례대로 볼 수 있어서, '해가 중천에 떴다'는 말의 의미를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새로 이사 온 집은 동향집이라서 오전에 집안 가득 햇빛이 들거든요. 해가 전혀 들지 않는 북향집에서 살다가 집안에서 햇빛샤워를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한 일이어서 오전 시간이 지나가는 것은 아쉽기만 합니다. 오전 10시 10분, 창밖을 보니 예전 엄마의 말처럼 정말 해가 중천에 떠있네요. 그 모습이 위풍당당해서 눈이 부십니다.
겨울에는 오후 2시 산책이 좋습니다
정오가 지나고 해가 중천에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하면 책상 앞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 시간입니다. 겨울 산책은 하루 중 온도가 가장 높은 오후 2시쯤이 가장 좋거든요. 산책을 하면 몸에 열이 돌기는 해도 추위를 이기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에, 추운 날씨엔 걷는 것이 힘이 듭니다.
'산책이고 뭐고 빨리 집에 들어가 따뜻한 이불속에서 몸을 녹이고 싶다.' 생각이 들면 산책이 전혀 즐겁지 않을 테니까요. 오늘은 예년보다 포근한 날씨라서 산책하기가 좋겠어요. 오늘은 어딜 가볼까? 풍경은 어제와 어떻게 미묘하게 달라졌을까. 그런 기대감이 생기는 순간입니다.
동네 산책에서 도서관 산책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가면 그 동네의 도서관을 먼저 둘러볼 정도로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도서관을 좋아한다고 하면 고루하거나 엄청난 독서광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아요. '독서'를 좋아한다기보다 '책'을 좋아한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그러니까 '라테는 말이지') 어린이 도서관도 별로 없었을 뿐 아니라 부모님과 도서관을 간다는 것이 익숙한 일이 아니어서, 초등학생 때까지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학교 근처에 위치한 구립 도서관에 들어갔을 때의 기분이란, '와, 이렇게 많은 책들이 꽂힌 이렇게 커다란 책장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니!' 그 광경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묘하게 마음은 편안했다고 할까요? 오래된 책냄새를 맡으며 책장을 걸어 다니는 기분이 꽤 근사했다고 할까요?
그 시절의 저를 되돌아보면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는 것,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는 것은 좀 고달픈 일이었던 것 같아요. 공부 수준이며 양도 늘어나고 친구관계도 성적순과 집안 수준에 따라 달라지니, 뭐랄까, 중압감 같은 것도 생기고요.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지금이 가장 좋을 때다'라고 말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런 말들은 아이들의 여린 마음을 감싸주지 못하는, 어쩌면 폭력적인 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에겐 도피처가 필요했습니다. 중학생에게 도서관만큼 도피처로 제격인 장소도 없었지요. 사회적으로 허용되며 권장되는 장소. 공부를 하지 않아도 들키지 않는(?) 곳이었으니까요. 저는 책장 끝에 위치한 구석자리에 숨었습니다. 어른들이 보기에 있어 보이는(?) 책을 골라서 읽는 척을 하곤 했어요.
그렇지만 책은 그렇게 어리석고 유약한 저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져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 꽂혀서 저를 바라보았어요. 그런 점이 저를 숨 쉴 수 있게 만들었지요.
만약 도서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종종 합니다.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꿈꾸곤 해요. 도서관이 없는 동네에 도서관을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20년 혹은 30년쯤 후엔 가능하지 않을까요? 30년이 걸린다면 지금보다 더 산책을 열심히 해서 체력과 건강관리를 열심히 해야겠네요.
옆동네 도서관 산책을 마음먹고 나섰더니
새로 이사 온 동네 도서관은 마침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공사가 완료되려면 2년 정도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어요. 지도앱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의 도서관을 검색해 보니 옆 동네 도서관이 버스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어요.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 오늘은 옆동네 도서관 산책이다. 마음을 정하고는 집을 나와 버스를 탔어요. 버스차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맑은 날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핸드폰 영상으로 찍다가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버렸고, 정거장을 지나친 것이 맞는지 확인하느라 또 한 정거장을 지나쳐 결국 2 정거장이나 더 가서 버스에서 내리고 말았습니다.
버스 2 정거장쯤이야 걸어서 갈 수 있지, 호기롭게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너무 먼 거리는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지도앱을 검색해 보았는데, 걸어서 20분 정도 되는 거리. 그 정도면 괜찮지 싶어 안심이 되었어요. 아무래도 저는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사람은 아닌 것인지.
버스 노선대로 되돌아가는 대신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단거리의 방법이 있어서 앱을 따라가 보았더니, 도서관 근처를 흐르는 작은 천과 공원이 나왔습니다. 버스정류장을 잘못 내렸더니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운 산책로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마치 너에게 길을 내어줄 테니 쉬어가라는 듯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요. 길을 잃은 곳에서 새로운 길을 찾듯, 살아가는 건 정말이지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가 봅니다.
겨울이라 공원의 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궈내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경이 잘 된 공원은 아름다웠습니다. 천(川)의 수면 위로 햇빛이 반짝이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의 발걸음은 여유로웠습니다. 이런 평화로운 광경만 매일 보고 살아간다면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우리가 매일 보고, 듣고, 느끼는 광경은 무의식에 남아 우리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저 멀리 도서관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랜만에 가는 도서관이라 책을 보면 독서 욕심이 샘솟을 것 같습니다. 보고 싶은 책들이 많아 네다섯 권이 되는 책을 쌓아놓고는 고작 한 권쯤 읽고 나서 나머지 책들은 잔뜩 빌려 나올지도요. 어쨌거나 오늘의 얼렁뚱땅, 사고뭉치, 왁자지껄(?)한 산책은 조금 성공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옆 동네 도서관은 괜찮았냐고요?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나란히 늘어선 풍경은 늘, 고요하고 평화롭지요. 책은 인내심 많고 현명한 친구이니 말입니다. 잘못 내린 곳에 새로운 길을 내어주심에 감사하며, 내일 산책도 기대해 봅니다.
내일도 함께 걸어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