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가 왔다.
'(문학동네) 똑똑 문자단입니다 :-)'
뭐지? 문학동네에서 왜 내게 문자를? 들어가 메시지를 확인하고서야 알았다. 문학동네 직원, 일명 '문동' 직원이 보낸 문자라는 것을.
얼마 전에 이웃블로그로 저장된 문학동네 블로그에서 문동직원 F가 그동안 모은 문장들을 문자로 배달할 예정이라며 신청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을 보았다. 애틋하고 먹먹한, 때로는 인용하기 좋은, 언젠가는 시린 가슴 덥혀줄 문장들을 문자로 배달해 준다니 신청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냉큼 신청하고는 잊고 있었는데, 그 첫 문자가 도착한 것이다. 문동직원 F가 보내온 오늘의 문장은 이러하다.
이제 하늘나라에 계신 알렉스 삼촌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알렉스 삼촌이 무엇보다 개탄한 것은 사람들이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삼촌은 행복할 때마다 그 순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셨습니다. 한여름에 사과나무 아래서 레모네이드를 마실 때면 삼촌은 이야기를 끊고 불쑥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그래서 저는 여러분도 남은 생애 동안 이렇게 해보길 권합니다. 인생이 순조롭고 평화롭게 잘 풀릴 때마다 잠시 멈춰서 큰 소리로 외치세요.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커트 보니것
커트 보니것은 <제5 도살장>으로 만난 작가다. 비교적 짧은 소설이지만 나에겐 시간 순으로 전개되지 않는 이야기가 뒤죽박죽인 듯했고, 블랙 유머나 위트 또한 난해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외 여러 작가들이 지대한 영향을 받은 작가라고 하니, 소설가들의 세상은 별세계가 분명하다. 한 편의 소설을 다 읽고도 흔들지 못한 내 마음을 문동직원 F는 짧은 문장으로 해냈으니, 실로 문장의 힘은 대단하다.
설이 주말에 걸쳐 있어 주말 산행을 앞당겨 다녀왔다. 의상봉 쪽으로 올라 용출봉-용혈봉-증취봉을 거쳐 부왕돈암문에서 하산하는 코스는 참 매력적이다. 산행을 발만 사용하는 운동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등산이 어떻게 전신운동이 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구간이다.
70도 이상 기울기의 위용을 무시로 드러내는 돌산에 오르려면 바위에 단단히 박힌 철재 난간을 두 팔로 꽉 붙들어야 한다. 좀처럼 근육이 잘 안 생기는 내 부실한 팔뚝이 제법 단단해진 걸 보면 다소 힘에 부쳐도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여러 번 올랐던 구간이긴 하지만, 오를 때마다 다른 모습이니 이 무슨 마력인가. 영하의 기온에도 후끈해진 등덜미를 시원하게 식혀주는 청량한 겨울 산바람인지, 멀리 촘촘히 박힌 눈과 빽빽한 나무들이 모자이크처럼 만들어내는 신비한 문양인지, 살얼음 낀 계곡에서 쫄쫄쫄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인지... 사람을 현혹하는 겨울산의 범인을 특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꽁꽁 언 계곡물 틈새를 뚫고 흐르는 맑고 서늘한 계곡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이 소리를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 떠올랐다. 20여 초 동영상을 찍어 그분께 톡으로 보냈더니 역시, "괴롭히는 거냐"는 곡소리가 돌아왔다.
눈이 박힌 첩첩 산세와 신비롭게 빛을 산발하는 해를 찍은 사진은 그런 풍광을 좋아하는 이에게, 의상봉과 용출봉이 우뚝 솟아있는 사진은 통통 튀는 매력을 가진 이에게, 마른 갈색 잎들을 나뭇가지 끝에 매달고 하얀 눈길 위에 늘어서 있는 단아한 나무들의 정경은 조용하나 다정한 이에게 차례로 보냈다.
하산길에 만난 눈 쌓인 큼지막한 바위 위에 남겨진 문구 하나, '딸 사랑해'. 작년 겨울, 딸과 함께 올랐던 한라산의 눈꽃 세상이 떠올랐다. 나도 딸에게 저런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딸아이의 입에서 잠금장치 풀리듯 터져 나오던 방언(이라고 쓰고 '욕'이라고 해석하는)에 놀랍고 우스워 그런 타이밍을 놓쳤었나.
쉽지 않은 구간을 함께 했을 엄마가 딸에게 남겼을 정겨운 장면을 찍어 함께 산에 오르곤 하는 지인들 단톡방에 올렸다.
"이건 세상의 모든 딸들, 우리 모두를 위한 거."
사진과 함께 보낸 메시지에 돌아온 뜨거운 반응에 차가운 겨울 산바람으로 언 몸이 훈훈해졌다.
애처로운 눈동자로 먹이를 구하는 냥이를 만날 때마다 작은 사과 하나 달랑 들고 산행에 오르는 내 무심한 습관을 탓했다. 냥이들은 왜 사과랑 오이는 싫어하는 걸까? 고양이 집사님들이 보면 분개탱천할 생각을 하며. 미안해. 줄 게 없어. 다음엔 꼭 소시지라도 들고 올게. 냥이와 눈빛을 교환하며 건넨 안타까운 마음을 그 아이는 알아들었으려나.
보통 하산길에 점심시간과 겹치면 김밥 한 줄 사들고 집으로 운전해 오는 내 차 안에서 먹곤 했는데, 4시간여 겨울 산행으로 노곤해진 몸이 뜨끈한 국물을 원했다.
북한산성 입구 칼국수집엔 7천 원도 안 되는 가격으로 7만 원의 맛을 뽐내는 칼국수가 있다.
함께 먹는 얼갈이김치를 담을 때 '남기면 벌금 만 원'이라는 문구에 잠시 뜨악할 수 있지만, 절대 남길 수 없는 맛이니 안심하시라. 뜨끈한 국물과 면발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래, 이 맛에 산에 오르는 거지! 커트 보니것이 전한 문장처럼, 오늘 좋은 것을 보고 공유했다. 오늘의 행복을 실컷 누렸다.
설 명절을 보내기 위해 시댁 가는 머나먼 길이 내내 주차장인 듯 기어가겠지만. 정체구간을 못 견디는 남편을 달래느라 스트레스 좀 받겠지만(차라리 내가 운전하겠다는데 왜 운전대를 안 넘기는 건지...), 이제 연로하신 시어머니 대신 할 일이 좀 더 많아지겠지만, 눈치껏 와서 빠릿빠릿 안 돕고 TV나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남편 덕에 시시때때로 복장 터지겠지만...
그래도 오늘 행복저장고를 미리 가득 채워 두었으니 괜찮다. 명절 증후군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조금씩 인출해 쓸 테니까. 기분 좋은 문장을 보내 주어 오늘의 행복을 실컷 누리도록 해 준 문동직원 F님,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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