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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병국씨.
 안양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병국씨.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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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 고향인 김병국(68)씨를 만난 곳은 경기도 안양의 한 카페였다. 김씨가 13살 때 가정형편이 어려워 오징어잡이를 하기 위해 강원도 속초로 이사했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김씨 역시 학업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부터 배를 타야 했다.
 
"16살 때에 아버지를 따라 오징어 배를 탔어요. 그런데 멀미를 해서 배를 오래 못 탔어요. 결국 몇 번 배를 타다가 그만두고 집에서 쉬었죠. 그러다가 17살 되던 해 여름에 다시 배를 탔어요. 오징어를 잡으려고 멀미약을 잔뜩 먹고 탔어요, 그러다가 하루는 해부6호를 타게 되었는데 그 배가 그만 북한으로 잡혀간 거죠."

오징어 철이 아닐 때는 밤빵을 만들어 파는 일을 했다고 한다. 겨울 명태잡이 철에는 그 밤빵을 만들어 항구에 들어온 명태잡이 선박에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명태와 바꿔 오기도 했다고 한다. 한번은 밤빵과 명태를 교환하기 위해 선박에 오르다 미끄러져 겨울 바다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1972년 납북된 '해부6호'에는 김씨 홀로 승선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지 않는 이유를 묻자 김씨는 부자지간에는 배를 같이 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배를 타다 보면 작업 중에 나누는 뱃사람들의 대화가 험하고, 행동 또한 거칠다 보니 작업을 하는 도중에 무척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보다는 친구들과 배를 타는 것이 편했다고 한다. 당시 함께 해부6호에 탄 친구들이 정용태, 박문길, 김두익 등이라고 했다. 오징어 배는 작업 전 그물이나 낚시 등을 정비하고 기계에 걸어야 하는데 친구들이 서로 도와가며 작업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고 했다.

해부6호가 출항한 때는 1971년 8월 18일 오후였다. 김씨와 친구들은 며칠 분량의 도시락, 쌀 등을 챙겨 출항했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 바다였기에 선실에 들어가 있기보다는 배 아무 곳에나 누워 바다를 보거나, 하늘을 보며 조업하는 곳까지 나아갔다고 한다.

해부6호는 나침반에 의존해 4시간 정도 항해했다. 나이 어린 김씨 등은 조업 장소나 방향을 알 리 없었다. 배에는 라디오, 무전기 등 전자장비도 없었기에 조업 장소를 알 방법은 없었다고 한다. 저녁 7~8시경 조업하는 곳에 도착한 김씨는 어구를 손질하며 준비를 마친 뒤 밤 9~10시경 조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조업 첫날 밤새도록 작업했으나 실적이 그다지 신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 날도 조업을 이어갔으나 비까지 오면서 오징어가 그다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선장은 철수하기로 하고 배를 돌려 속초항으로 향했다. 선실 안으로 들어가서 잠을 자던 김씨는 새벽녘에 시끄러운 소리에 깼다.

인민군 복장 북한 군인 보고 떨어

선실 안으로 총부리가 들어오면서 다 나오라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무슨 영화인가 하며 얼떨떨하게 있던 김씨는 인민군 복장을 한 북한 군인을 보고 나서부터 떨기 시작했다고 한다. 배 앞으로 선원들이 모두 모이자 해부6호에 줄을 걸어 곧장 끌고 올라갔다고 한다.
 
"두 시간 정도 끌려갔던 것 같아요. 도착한 곳이 장전항이라는 곳이었어요. 처음에는 장전항인 줄 몰랐는데 한국에 나와서 조사받으며 수사관들에게 들어보니까 장전항이라고 하더라고요. 장전항에서 며칠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북한에 있을 때 북한 사람들이 북한 실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북한이 잘 산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어려서부터 반공교육을 받았잖아요. 그래서 나는 속으로 '미친놈들, 진짜 그런가'하고 의심하면서 북한 사람들 말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저 북한 놈들이 우리가 네네 하지 않으면 아오지 탄광이나 보낼까 무서워서 형식적으로 네네 한 거죠. 그래도 속으로 인정을 안 했어요."

처음 장전항에 있는 동안 보름 정도 기초 조사를 받았는데 속초의 군부대 위치, 관공서 위치, 설악산 등에 대해 조사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평양 인근의 휴양소로 이동해서는 그곳에서 '선생'이라고 불리는 지도원들이 한배에 5명씩 배치되어 조사와 생활 감시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 달여간 조사를 받고 나자 남한으로 귀환할 때까지 북한에 대한 체제 선전과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해주, 강경, 원산, 김책시 등을 돌아다니며 김일성대학, 어린이궁전, 만경대, 모란봉, 백두산 해산진 등에 대한 견학을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북한의 체제를 선전한다고 해도 그리운 고향의 가족에 대한 생각만은 떨쳐낼 수 없었다.

겨울철 혹시라도 탈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스케이트를 타고 감시망을 피해 멀리까지 나간 적이 있다고 했다. 허름한 인가가 보여 들어간 김씨는 낡고 허물어져 가는 인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선전용 주택이라는 생각에 얼른 그곳을 빠져나와 휴양소로 돌아왔다. 그곳의 체제에서는 탈출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 뒤로 탈출은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한다.

김씨가 남한으로 귀환한 뒤 수사기관에서 더욱더 가혹한 고문을 당한 이유가 따로 있다고 했다.
 
"북한에 있을 때 똘똘한 아이는 따로 데려가요. 평양 고려호텔에 며칠을 잡아넣더라고요. 며칠 동안 별다르게 한 것도 없었어요. 고려호텔에서 나오는 음식을 주고, 평양 시내 몇 군데 다녔던 것 외에는 별다른 것도 없었어요. 고려호텔에 갔다고 해서 동요하거나 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 더 많이 맞은 것이 그 고려호텔에 갔던 것 때문에 더 많이 맞았어요. 북한에서 포섭 당했을 것이라고 의심을 당해서 더 많이 맞았어요."

군에서도 납북귀환어부라는 이유로 어려움 겪어
 
김병국씨의 메모. 그는 자신의 피해사실을 잊어버리거나 빠뜨릴까 걱정되어 메모해 다닌다고 한다.
 김병국씨의 메모. 그는 자신의 피해사실을 잊어버리거나 빠뜨릴까 걱정되어 메모해 다닌다고 한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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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1개월 동안 억류되었던 김씨는 1972년 9월 7일 한국으로 귀환했다. 귀환하자마자 속초시청으로 들어간 일행은 첫날 명단을 확인한 뒤 이튿날부터 조사받았다고 한다. 시청 건너편에 위치한 해동여인숙에 7~8명씩 호출되어 끌려갔다고 한다.
 
"여인숙 현관문을 들어가면 마룻바닥에 양쪽으로 방이 있어요. 문들은 닫혀있는데, '이 새끼 저 새끼, 아이고' 비명소리가 나고 난리도 아니더라고요. 완전히 겁을 먹은 상태였지만 죄지은 것도 없으니 설마 우리한테 고문하겠나 싶었죠. 근데 여인숙에 와 보니 더 비참한 거예요. 비명소리가 나고, 여기저기서 욕이 나오고, 윽박지르는 소리가 나니까.

두 평 정도 되는 내 방에 들어가니 수사관  3명이 있더라고요. 처음에 인적 사항하고 이런 걸 물어봐요. 그리고 북한 생활을 질문하길래 아는 대로 대답했죠. 지령 받은걸 질문하길래 지령받은 건 없다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불었다는 거예요. 그래도 난 (지령) 받은 것 없다고 하니까 각목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꿇어앉혀서 허벅지에 올라타서 짓밟더라고요.

소리를 지르니까 눕히더니 주전자로 얼굴에 물을 부었어요. 한 놈은 내 어깨를 누르고 한 놈은 다리 잡고 그러면서 입과 코에 수건을 대고 물을 부었어요. 숨이 막혀서 죽는 줄 알았어요. 주전자 크기가 한 되 정도 되는 노란 양은 주전자였어요.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수사관이 '이 자식 봐라. 너 여기서 죽어도 별거 아냐, 바른대로 말해'라고 하면서 또 한 번 물고문을 하더라고요.

너무 힘들어서 '지령'받은 거 있다고 허위 자백을 해버렸어요. 내 암호명이 '곰'이라고 했죠. 수사관이 거짓말 아니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하도 고문하니까 지령받았다고 하는 거지 암호 받은 사실 없다고 했어요. 곰은 그 전에 첩보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내용이었어요. 그랬더니 수사관이 '너는 평양도 다녀오고 한 중요 인물이다. 간첩 활동을 안 할 리가 없어'라며 제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서 비틀더라고요.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고문만 하더니 나를 내보내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시청으로 돌아왔어요. 하루 있다가 다시 여인숙으로 불려 나갔어요. 같은 수사관이었는데 덩치가 엄청 커요. 또 반복적인 내용으로 조사를 하는 거예요. 이런 말 하면 뭐하지만 북한에서는 인격적인 대우를 받다가 한국에서만 '개 취급'을 받았어요."

다음날 다시 불려 간 김씨는 수사관으로부터 종이 서류를 받았다. 김씨의 진술 내용이라며 지장 찍을 것을 강요받은 것이다. 구타하며 지장 찍을 것을 요구하기에 결국 김씨는 내용도 확인하지 못한 채 지장을 찍었다고 한다. 지장을 찍자 수사관의 고문도 멈췄다. 당시 시청 안은 김씨와 같이 고문을 받아 기어 다니던 선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일주일 정도 시청에서의 조사가 끝나자 30여 명의 선원들이 차출되어 헬기 4~5대에 나뉘어 서울의 미군 부대로 끌려가 약 1주일 정도 조사를 받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속초로 내려와 검찰 조사, 법원 재판을 받고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다행히 집행유예로 교도소에 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재판 후 감시를 피하기 위해 용접 기술을 배운 김씨는 부산의 자동차 정비소에 취업했다. 그러나 취업 직후부터 부산 남부경찰서 형사가 2주에 한 번씩 찾아와 동태를 감시하는 바람에 회사생활이 너무도 어려웠다고 한다. 결국 1년여 만에 군대에 입대한 김씨는 군에서도 납북귀환어부라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아직도 국가가 나를 감시한다고 생각"
 
"1975년 3월 26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했어요. 훈련이 끝난 뒤 경기도의 101 보충대로 이동해 후반기 교육을 또 받았어요. 그때가 5월이었는데, 하루는 지프차가 와서 저를 찾더라고요. 나를 부르더니 그냥 태워서 가더라고요. 그리고 서울로 내빼는 거예요. 오전 10시에 출발해서 12시 넘어서 도착했는데 서울 주택가 가운데 있는 위장 주택이더라고요. 2층 건물인데 가정집 같았어요. 방을 하나 주는데 작은 방에 넣더라고요. 하룻밤은 그냥 재우더라고요.

다음날부터 나를 때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수사관이 '너는 군인 신분이기 때문에 너 죽고 사는 건 별문제 없어. '훈련으로 사망'하면 끝나. 지령받은 거 있는 대로 내놔 봐'하더라고요. 수사관이 '사회 나와서 2~3년 동안 보고 들어온 거 보니까 별로 좋지 않던데' 하면서 저를 협박하더라고요. 그 말끝에 너 겁도 안 나냐며 고문 도구들을 보여주더라고요.

군복을 입은 채로 맞았어요. 위에서 잡고 구타하고 짓밟더라고요. 물고문도 당하고 허리를 짓밟고 하더라고요. 살려달라고 애원하니까 살려줄 테니 특수지령 받은 것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제 생각에 그 말을 들으려고 일부러 저를 군대를 보낸 것 같아요. 제가 그곳에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으니까 3일 연속을 고문 하더라고요."

그곳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허리통증이 시작되었고, 군에서 제때 치료받지 못한 김씨는 군 생활 내내 부대와 국군병원으로 오가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206보안대에서 찾아와 그의 군 생활을 감시하며 괴롭혔다.

제대 후 부산에서 7~8년가량 택시 운전을 하며 살던 김씨는 군수사령부 보안대에 끌려갔다고 한다. 여러 사람을 만나 포섭하기 위해 택시 기사를 하는 것 아니냐며 또다시 고문을 동반한 수사를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두 달에 한 번꼴로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것이 싫어 버스회사에 운전기사로 취업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정보과 형사들이 수시로 찾아왔고, 부담감을 느낀 회사에서도 권고사직을 강요했다고 한다.
 
"버스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서부경찰서에서 자꾸 찾아오는 거예요. 진절머리가 나죠. '그만 좀 찾아와라, 주위 사람들 보기에 창피하다, 나를 간첩으로 보는 것 같다' 했거든요. 사생활이 없어요. 결국 부산 회사를 그만두고 2년 있다가 서울로 올라왔어요.

2003년도에 서울 버스회사에 취직했어요. 거기서는 양천경찰서 정보과에서 따라다녔어요. 2015년도까지 경찰이 따라다니더라고요. 그리고 부모, 형제 찾아다니면서 나에 대한 조사는 계속했어요. 서울에 이사 와서는 통장을 통해서도 감시를 했어요. 아직까지도 국가가 나를 감시한다고 생각해요."
     
김씨는 자신 때문에 친척들이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조국이라고 돌아왔으나 자신을 간첩으로 취급하고 인격을 참담히 무시당했다고 하소연했다. 이제라도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태그:#평화박물관, #FIGHTING CH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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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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