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시민기자들이 '점심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
어느 날 지인이 권유했다. 박물관 답사 수업을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고. 엄마와 아이가 함께 공부도 하고 답사도 하는 장기 모임이라 했다. 자연스레 역사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흔쾌히 수락했다.
첫 답사로 1박 2일 간 충청북도 단양과 충주, 제천을 가게 되었다. 일정표를 받아드는데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뭘 먹을까?', '어디에 가 볼까?'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여행지에서 먹는 즐거움은 크다. 하지만 단체 여행의 특성상 개인 취향을 반영해 식당을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간식을 잘 준비해야 했다. 1박 2일은 짧다면 짧지만 길다고 하면 또 긴 일정. 팀원들과 간식을 나눠 가져가기로 했다.
단체 여행이 처음인 아홉살 아이
컴컴한 새벽, 준비해 둔 간식과 짐을 챙겨 답사 가는 고속버스에 올랐다. 첫 휴게소에 도착해 삼삼오오 모여 김밥을 먹었다. 그런데 아침 먹는 동안 아이는 마스크를 좀처럼 벗지 않았다.
"잠시 벗고 편하게 먹어"라고 말을 건넸지만 아이는 마스크를 잠시 내렸다 올려가며 밥을 먹었다. 휴게소 식당이라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싶어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일정에 맞춰 첫 유적지를 함께 둘러보고 눈 놀이를 한 후,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입장 순서대로 자리가 배정됐다. 앞자리의 낯선 얼굴을 마주한 채 아이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여전히 마스크를 쓴 채로.
아이는 왼손으로 잠시 마스크를 턱으로 내렸다 오른손으로 재빨리 음식을 입에 넣고 다시 올린 채 씹어 먹었다. 평소 많이 예민하거나 코로나에 두려움을 갖고 있지도 않은 편인데 아침식사 때부터 이어지는 아이의 행동을 보면서 놀랐다.
그러고 보니 단체 여행을 해 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아홉 해 인생의 무려 3분의 1에 해당하는 3년을 꼬박 코로나와 함께 보내며 마스크 쓰기를 생활화해 왔다. 여행의 설렘을 감추지 않았지만 아이는 낯선 사람들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에 쉽게 경계를 풀지 못했다.
버스 안에서도 내내 아이는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있었다. 그동안 배운 것처럼 충실하게, 조심해서 행동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마스크를 벗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편할 대로 밥을 먹게 두었지만, 그 마음을 짐작하는 한편으로 앞으로도 함께 식사할 일정이 남아 있는데 계속 이럴 것인가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내리는 눈과 추운 날씨로 인해 만만치 않은 1박 2일의 일정. 유적지를 보고 차로 돌아오면 간식을 먹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가져온 간식을 서로 나눠먹으면서, 자유 시간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잠시 마스크를 벗은 상대의 얼굴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면서 서서히 긴장감을 내려놓는 아이의 표정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 드디어 아이는 마스크를 벗고 밥을 먹었다. 심경의 변화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아이가 내일은 조금 더 즐겁게 일정을 소화하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더불어 나도 이 여행이 살짝 편안해졌다.
얼마 전 '알쓸인잡'에서는 심채경 박사와 김상욱 교수가 요즘 아이들이 맨 얼굴을 보여주기를 꺼리는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이유는 개인마다 다 다르겠지만 대인관계 속에서 마스크가 일종의 방어와 보호 기능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얼굴을 마주하며 언어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통해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3년 간, 또 학교가 문을 닫았다 열었다 반복한 그 시간에 아이들이 잃어버린 것은 학습의 기회만이 아니었음을 이번 여행, 아이의 행동을 보면서 확실히 실감하게 됐다.
다시 학교가 열려서 아이는 비록 마스크를 쓰고서라도 학교에 다녔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수업 외에 또래 아이들 또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가 일제히 사라지면서 사회적 상호작용의 긍정적인 면을 경험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진화론적으로도 고립된 종족은 기술적인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도태되어 가지만, 사회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다른 문화권과 교류한 종족은 문화를 발전시키며 살아남았다고 한다. 사회적 상호작용이 제한받았던 지난 3년은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후유증을 남길까?
지식보다 중요한 '접촉'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만이 현생 인류로 살아남게 된 이유로 사회화가 가능했던 친화력을 주장한다.
이번 답사지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살아온 동굴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동굴을 동그란 작은 불빛 하나에 의지해 걸어가면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해 봤다. 혹독한 환경 속에 내버려진 그때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 먹을 것을 구하고 나눠 먹으면서 살아남기 위해 친화력을 키워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친화력에는 명암이 있는데 동질감을 느끼면 이해력과 친화력이 높아지지만, 남이라고 여기면 얼마든지 냉담할 뿐만 아니라 가혹해지기까지 할 수 있다고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인류의 흑역사의 이유라고 같은 책에서는 증명하며,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접촉'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친화력을 느끼기도 어렵지 않을까. 마스크로 가린 얼굴만으로 서로를 만나고 그 만남의 기회조차 충분히 제공받지 못한 우리였다. 그런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으며, 친밀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시간이 더 지속되었더라면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지난 3년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힘들었던 시간이 마스크 해제로 모두 끝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접촉이 중요한 수단이라는 논리에 동감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더 실감하게 됐다. 한 끼, 한 끼 사람들과 식사를 거듭하는 동안, 친절하게 나누는 간식을 얻어먹고 내 것으로 감사함을 표현하는 사이, 마스크로 드러나는 아이의 마음 속 변화를 서서히 느끼면서 나만의 대답이 정리됐다.
분명 여행을 시작하면서 나는 아이가 역사적인 '지식'을 얻게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이젠 지나온 사람들의 삶뿐만 아니라 지금 세상과 사람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게 되기를 꿈꾸게 되었고, 이런 기회를 더 자주 만들어 주고 싶어졌다.
내가 아닌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지식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행하는 동안 함께 먹으면서 알았다. 구석기 시대의 조상들이 서로 의지하며 먹을 것을 구하고 나누고 협력하여 살아남았듯이, 수만 년이 지난 지금 우리도 그렇게 함께 하고, 나누고, 이해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덧붙이는 글 | 저의 개인 블로그 및 브런치에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