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위에는 없어도 큰 문제가 없지만, 있으면 편리한 '사소하지만 위대한 도구'들이 있다. ㄷ자 모양으로 생긴 작고 얇은 철심을 여러 장의 종이에 박아 한데 묶는 스테이플러(stapler)도 그런 물건이다. 집이나 사무실에 하나씩은 두고 사용하는 친근한 이 물품의 이름을 '호치키스'라고도 부른다.
일본이 처음 수입한 스테이플러가 미국 '호치키스(E.H.Hotchkiss) 사에서 제작한 것이어서 '호치키스'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우리나라도 일본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주방세제 '퐁퐁', 트렌치코트 '바바리', 스파클링와인 '샴페인'처럼 상품명이 보통 명사로 굳어진 경우다. 나도 '스테이플러' 보다는 '호치키스'가 훨씬 익숙하다.
우리 집과 사무실에서 사용했던 호치키스는 단순하고 견고한 형태에 무채색이었고,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로고와 'Peace'라는 브랜드명이 철제 표면에 새겨져 있었다. 늘 책상 위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그 물건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종합문구회사 '피스코리아'에서 만든 '평화 NO.35 스테이플러'다. 베이비 붐 세대부터 MZ 세대까지 60년이 넘도록 사용하고 있는 장수 상품으로 지금까지 2000만 개 이상 팔렸다.
인천 중구 개항로에 있는 문화복합상점 '개항백화'에서 피스코리아와 협업한 '평화문방구' 팝업스토어가 열리고 있다. 팝업스토어(Pop-up Store)는 짧은 기간 운영하는 임시 매장을 말하는데, 인터넷 웹페이지에서 떴다 사라지는 팝업창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난 13일 '개항백화' 3층에 등장한 평화문방구 팝업스토어는 오는 29일까지다. 문방구에만 가면 길을 잃는 문구덕후라면 팝업창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문구 덕후라면 놓칠 수 없는 곳
"피스코리아는 1959년에 '평화산업사'로 시작한 국내 업체예요. 문구와 공업용 기계를 생산하는데, 사무용품 분야에서 1위를 지키고 있죠. 그리고 오랫동안 인천에 터를 두고 있는 로컬브랜드랍니다."
인천에서 청년 로컬크리에이터로 주목받고 있는 최주영 대표(31)는 구도심에서 문화복합상점 개항백화를 열고 개성 넘치는 친구들과 함께 청년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 활동을 실험하고 있다. '개항로 플리마켓', '루프탑 디제잉 파티' 등 다채로운 이벤트를 벌이고 참신한 팝업스토어를 기획·운영하고 있는데, 개항백화×피스코리아 '평화문방구' 팝업스토어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저희 아버지가 피스코리아 직원이세요. 1985년부터 지금까지 38년 넘게 근무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죠. 팝업스토어를 해보자고."
최 대표가 태어나기 전부터 피스코리아 직원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최주영 대표는 피스코리아에서 생산한 호치키스, 가위, 커터칼 같은 문구용품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며 자랐다. 디자인에 거의 변화가 없어 촌스럽게만 느껴졌던 피스코리아 문구들이 어느 때부턴가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다.
"디자인이나 색감이 레트로 그 자체더라고요. 남동공단에 있는 피스코리아 공장 쇼룸에 전시돼 있던 빈티지 문구와 스테디셀러 제품, 최근 새롭게 개발된 신제품, 디자인 콜라보 제품 등을 옮겨와 팝업스토어를 열었습니다. 일부 제품은 이곳에서 직접 구매할 수 있습니다."
60년 역사 한눈에
팝업스토어 공간은 크지 않지만, 피스코리아의 기능성과 디자인이 돋보이는 대표 상품들과 창업 60주년을 맞아 기획했던 아티스트와의 한정판 콜라보 제품들, 그리고 피스코리아의 역사가 담긴 사진과 포스터가 알차게 준비돼 있다.
특히 가운데 전시된 빈티지 문구들은 피스코리아의 소비자들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을 이벤트를 통해 회사가 다시 거두어들인 것들이다. 낡고 손때 묻은 다양한 제품 그 자체로 피스코리아의 역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쌓인 신뢰와 적극적인 소통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한쪽에 큼지막한 글씨로 '세계를 무대로, 세계제일의'란 표어가 담긴 흑백의 포스터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최 대표가 재미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이 글씨, 저희 아버지가 쓰신 거래요. 1989년에 한강 고수부지에서 회사 창립 30주년 연합체육대회가 있었는데, 당시 과장이었던 아버지랑 동료분이 붓과 페인트로 쓰셨다고 해요."
포스터에 실린 당시 체육대회 사진을 보면 플래카드 양옆으로 그 글씨가 적힌 기둥이 세워져 있다. 젊었던 아버지가 쓴 글씨는 세대를 넘어 멋진 포스터로 만들어지고, 이제 청년이 된 아들의 공간에 전시됐다. 세대를 이어온 피스코리아의 시간이 느껴졌다.
1954년 창업한 피스코리아는 1974년 인천으로 이전했고, 문구에서 공업용까지 최고의 기술을 주도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1973년 '평화 33호 침'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1977년에는 한국 최초로 데스크 타입의 '평화 NO.35 스테플러'를 개발했다.
손에 착 감기는 감촉과 적은 힘으로 가볍게 찍히는 부드러운 사용감은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좋은 재료, 우수한 기술, 인체에 맞춘 디자인 결과다. 스테이플러는 금속재 팔과 용수철을 비롯한 20개가 넘는 부속품으로 만든다. 피스코리아는 국내 공장에서 우리의 기술로 국산 재료를 이용해 완성했다.
'60년을 넘어 100년'을 바라보는 인천의 로컬브랜드 피스코리아는 몇 년 전 최고의 품질과 기술에 아름다움을 더한 '컬러 스테플러'를 개발했다. 오랫동안 어느 공간에나 어울리도록 무채색 위주로 제품을 만들었는데, 신진 아티스트들과 협업해 선명하고 상큼한 노랑, 주황, 초록, 파랑, 보라 등의 색을 조합한 한정판 패키지 제품을 선보였다. 평화문방구 팝업스토어 한쪽 벽면에 수십 가지의 화려한 '컬러 스테플러'가 복합문화공간 개항백화의 독특한 공간에 조화롭게 전시돼 있다.
100가지 이야기를 담고 싶은 곳
개항로 경사지에 서 있는 작은 건물 뒤쪽 입구로 들어가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개항백화는 원래 가정집이었다. 'ㄷ'자형으로 생긴 좁은 대지에 1층은 상가, 2~3층은 건축주가 살 집을 짓다 보니 독특한 구성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솜씨 좋은 장인들이 좋은 자재로 정성껏 마감한 실내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공간에 완전히 반했죠. 원래 있던 구조와 인테리어를 최대한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떼어낸 문짝이나 창문, 벽·천정 마감재는 따로 잘 보관해 두었다가 가구나 간판을 만들 때 사용했어요."
최주영 대표는 누구나 편하게 머물면서 재밌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간을 만들었다. 미로처럼 연결된 2~3층 공간 곳곳에 작지만 독특한 가게들이 입점했고, 가장 넓고 아름답게 꾸며진 로비는 누구나 쉬었다 갈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운영된다.
"'개항백화'는 개항로의 백화점이란 뜻인데, 백 가지 이야기를 담고 싶어서 지은 이름입니다. 자기만의 브랜드를 개발하는 친구들이 맘껏 꿈을 펼치며 함께 공간을 꾸미고 운영하려고 합니다."
지난해 봄, 문을 연 '개항백화'에서 니치 향수 쇼룸 '발로', 내추럴 와인 그로서리 '포트포인트', 수제 스피커 청음 공간 '팰소닉', 뜨개 애호가들의 성지 '땡쓰', 일상에 컬러를 입히는 액세서리숍 '오키', 색 감각이 돋보이는 카페 '코튼글라세' 등이 함께하고 있다. 방송국 PD로 일했던 최 대표는 공간 기획·운영을 총괄하면서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는 '개항로 스튜디오'를 운영한다.
18세기 프랑스에서 발명돼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끊임없이 진화해온 스테이플러의 주기능은 '연결'과 '엮음'이다. 그리고 '속을 다시 채워 계속 쓰는' 도구다. 고집스럽게 전통을 이으며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를 모색하는 피스코리아와 여럿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옛것과 새것을 엮어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 내는 개항백화는 스테이플러와 참 많이 닮아 있다.
■ 개항백화×피스코리아 '평화문방구' 팝업스토어
- 기간 : 2023년 1월 13일(금)~1월 29일(일) 14시~20시
- 장소 : 개항백화 3층 (인천 중구 개항로 104)
- instagram : @gaehangdpt
글· 사진 박수희 I-View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