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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부러워 하지 않지만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는 '어른의 종이접기'.[기자말]
나는 <제2회 피아노와 루돌프의 밤>에 초대되었다. 

이 공연은 작년 연말, 서울의 한쪽 구석에서 작게 열렸는데 무려 12명이나 모여서 주최 측의 놀라움을 샀다. 공연은 1부의 피아노 연주와 2부의 종이 접기로 구성된다. 피아노 연주실을 대관해서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연주가 진행되고, 뒤이어 아무 연관성도 없이 종이접기를 하는 놀라운 공연이다. 심지어 2부는 관객이 직접 종이를 접어 공연에 참여한다. 

1부가 끝나고 10분의 인터미션. 나는 2부를 준비했다. 그렇다. 내가 바로 종이접기 연사(!)이자 주최 측의 일부이다. 종이접기 연사가 된 것은 내가 피아노로 참여하기를 극구 거부했기 때문이다.

쇼팽이나 슈베르트를 연주하는 연주회에서 '나비야'나 '반짝반짝 작은 별'을 연주할 수는 없었다. 주최자들은 좋은 친구들이지만 이성적인 언어가 통하지 않는 지점이 있어 하는 수 없이 종이접기는 어떠냐며, 그즈음에 접고 있던 카멜레온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보통 사람들이었더라면 카멜레온 종이접기를 신기하게 구경한 것으로 끝났을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전 처음보는 종이접기를 진심으로 기뻐하며 2부에 이름을 올렸다(그리고 아직도 그들은 종이 접기가 메인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리하여 <제2회 피아노와 루돌프의 밤>에 초대된 관객 12명은 인생 처음으로 사슴(루돌프)을 접는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겪은 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당연히 이전과 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난 지금은 비시즌이다. 엄동설한에도 연주는 연주대로, 종이접기는 접기대로 각각 맹렬하게 연습하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이런 세상에 누가 종이접기를 하지? 
 
 공룡과 거북이
공룡과 거북이 ⓒ 최새롬

종이접기로 공연을 하게 된 사연은 재작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 크리스마스인 듯한 거리를 지나며 서점에 들렀다. 그렇게 두어 시간 돌다가 계산대 근처에서 매우 화려한 종이접기용 종이를 발견했다. 분류로 말하자면 해외 문구류가 될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의문투성이었다. '왜 여기에 이런 게 있지?'가 첫 번째 드는 생각.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데 바로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누가 종이접기를 하지?', '이런 세상에?' 종이접기용 종이의 용도는 누구보다 분명했지만, 이 서점의 어떤 물건보다 많은 질문을 받을 것이었다. 종이접기용 종이의 수요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다만 몇 덩이만이 그곳에 있는 것도 마음에 쓰였는데, 그것은 이 모든 질문에 묵묵부답이었다.  

어렸을 적 종이접기용 종이는 대개 '학종이'라고 불렸다. 처음 한두 장은 색색으로 예뻤지만 그러데이션의 농도와 퍼짐의 가짓수는 뒤로갈 수록 좀 빤한 것들이었다. 같은 것을 수 백개 만들어 마음의 크기를 보여주는 일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유년을 지날 때까지 어려운 접기가 유행하거나 시도되는 일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고, 이렇게 화려한 종이접기용 종이를 볼 일도 없었다. 
 
 종이접기 페이퍼 500매
종이접기 페이퍼 500매 ⓒ 최새롬
 
그날 나는 서점에서 그날 가장 미스터리 한 물건, 종이접기용 종이를 한 뭉치 사게 된다. 500매의 방대한 묶음. '세상에 누가 종이접기를 하지?'라는 물음을 직접 풀어보기로 한 것이다. 내가 접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학 아니면 거북이 밖에 없었지만. 이제 이 종이를 사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는 일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차근히 살펴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 것이다.

열두 장의 각기 다른 무늬와 색으로 이뤄진 종이가 아득하게 반복되었다. 한 면은 단풍이나 학, 금칠, 매화 등이 이어진 화려한 무늬였고 한 면은 단색이었다. 단색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채도가 아니었다. 나는 이 만만치 않은 종이에 합당한 접기를 하고 싶어졌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유튜브에 '종이접기'를 검색해 보았다. 

2차원의 종이가 3차원의 되는 변화
 
 'Origami with Jo Nakashima' 유튜브 캡쳐화면
'Origami with Jo Nakashima' 유튜브 캡쳐화면 ⓒ Origami with Jo Nakashima

그러자 몰랐던 세상이 펼쳐졌다. 그들은 한 장의 종이로 거의 생태계를 접고 있었다. 뱀과 풍뎅이 거미부터 기린, 코끼리, 사슴, 초식 공룡, 육식 공룡까지... 영상은 알려준다기보다 자신이 접는 걸 그냥 보여주는 것에 가까웠는데 그야말로 새로운 차원의 교수법이었다. 

2차원의 종이가 3차원의 되는 변화를 책에서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나. 열 번을 되돌려 보아도 같은 것을 보여주는 친절함,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20분이 표기된 카멜레온 접기 영상은 20분 후 내 손에 카멜레온을 보여줄 터였다. 

그래서 '다 큰 어른이 종이접기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라는 물음에 한두 줄로 끝나는 적당한 대답을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어쩌다 종이접기. 화려한 종이뭉치를 서점에서 마주하고 생긴 몇 가지 의문을 풀어보려던 일이, 종이접기 공연을 기약하게 되었다, 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알지만 인생에서 너무 빨리 사라지는 놀이, 생산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데다가 자랑하기도 뭐 한 취미, 종이접기. "17살에 끝난 놀이를 20년 뒤 만나 가슴 뜨거워지는 일을 경험해 봤나요?"

요즘 열풍인 <슬램덩크> 같은 건가? 

그것과 유사하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종이접기#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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