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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밀키트를 즐긴다. 어쩌다보니 사랑까지 하게 되었다. 내가 밀키트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소심하게 고백해본다.

냉장실을 열어 젖힌다, 버섯, 콩나물, 어묵. 이것저것 헤집어 보다 닫는다. 냉동실도 뒤져 본다. 돈가스, 장어구이, 건어물, 고등어, 칼국수 면 아래위 놓인 것들을 들었다 놨다 끄집어냈다 다시 밀어 넣는다. 복싱 선수가 잽을 날리듯 괜히 감자와 양파가 든 망도 툭 쳐본다.

음, 오늘은 또 뭘 준비하지? 저녁 시간이 가까워올수록 주방장의 메뉴 고민이 이마에 패인 주름마냥 깊어진다. 그러나 갈등은 있지만 고민은 없다. 내겐 언제나 간택되기만을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주말에 국이나 찌개 두세 가지와 밑반찬을 준비했다. 토, 일요일 중 하루는 꼬박 일주일 먹거리 준비에 바쳤다. 하루 종일 부엌에서 투닥거리다 보면 진이 빠진다. 하지만 평일에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려면 할 수 없다. 저질 체력이라 특별한 날이 아니면 퇴근해서 주방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싶었다.

이렇게 만들어 둔 찬으로 날마다 조금씩 다르게 적절히 분배한다. 일종의 돌려막기 수법이다. 그래도 딱히 모자람은 없다. 다양한 메뉴의 점심 급식과 가끔 있는 저녁 식사 모임으로 별식을 공급해 주니 나와 남편의 위장이 반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전업주부가 되니 위기가 닥쳐 왔다. 하필 그 시기가 코로나가 발병한 때와 맞물렸다. 가끔 하던 외식도 힘들어졌다. 열심히 끼니를 챙기다 보니 '이러려고 내가 직장을 관뒀나' 싶어 가끔 심통이 났다. 그나마 다행히 남편은 2식씨다. 만약 삼식이였더라면 어쩔 뻔했나 싶다.      

늦은 아침은 치즈와 계란을 곁들인 빵과 샐러드, 과일, 견과류, 요구르트로 비교적 저염식에 건강식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가짓수를 세어 보니 16가지 정도 된다. 준비하는 시간은 꽤 걸리지만 그래도 메뉴 고민은 없으니 좋다.

문제는 저녁식사다. 세 끼 식사를 준비하시는 분들은 고작 한 끼 갖고 그러냐고 눈을 흘기시겠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다. 남편은 저녁 한 끼 잘 먹는 게 낙이라는 사람이다. 아! 오해는 마시라. 내 남편이 식충이나 먹보는 아니다. 그저 맛있는 식사에 반주 한 잔을 곁들이는 정도의 극히 평범한 남정네다.     

우리 동네는 로켓도 총알도 날아오지 않는다. 새벽 배송 대신 동네 닭이 새벽을 알려 주긴 한다. 배달앱을 누르면 "배달 가능한 지역이 아닙니다"가 뜨길래 아예 앱을 지워 버렸다. 가장 가까운 마트는 20분을 가야 한다. 그러니 매일 장을 보러 갈 수도 없다.
 
 밀키트 냉동실에 잠자는 밀키트
밀키트냉동실에 잠자는 밀키트 ⓒ 도희선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른손 둘째 손가락이 정말 요긴하게 쓰인다. 나는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번득이는 눈으로 입맛에 맞는 먹잇감을 낚아챈다. 한식, 양식, 중식, 분식, 찌개에 각종 밑반찬까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없는 게 없다. 오, 사랑스러운 밀키트여! 축복받을지어다.

일단 먹잇감이 눈에 들어오면 찬찬히 조리법과 상품평을 읽어 보고  '이거다' 싶은 놈은 재빨리 장바구니에 가두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나는 마트에서 직접 장을 봐서는 하기 어려운 다양한 요리를 저녁상에 올릴 수 있다. 아주 간혹 사냥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가차 없이 응징한다. 두 번 다시 안 사는 걸로.     

주부가 너무 게으른 것 아니냐고 나무라지는 말라. 날이면 날마다 먹는 밀키트도 아니고 나도 가끔 외식 기분을 내고 싶다.

밀키트에 쓰여진 조리법을 응용해본다. 대부분의 밀키트 소스는 매우 짜다. 찌개나 국 종류는 조리법에 나와 있는 양의 물에 소스를 다 넣었다간 십중 팔구 소금국이 된다. 국이나 찌개 같은 경우 다시마와 황태채로 기본 육수에 감칠 맛을 더해 준다.

냉동실에는 항상 목욕재계하고 단장을 끝낸 오징어 조개 새우 각종 육류가 '날 잡아 잡수' 하고 기다린다. 냉장실엔 두부, 계란, 감자, 버섯들이 나의 선택을 받기 위해 서로 기싸움을 벌인다.

내가 손맛을 더하기 전에는 그것은 하나의 밀키트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새우와 버섯과 대파를 넣어주었을 때 그것은 나에게로 와서 폼나는 요리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 뭘 먹냐고? 이제 그만 뜸 들이자. 짜잔! 오늘의 메뉴는 쭈꾸미 볶음이다. 아까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콩나물이 시간이 촉박하다며 윙크했기 때문이다.      
주꾸미 볶음 재료 주꾸미 볶음 재료 준비
주꾸미 볶음 재료주꾸미 볶음 재료 준비 ⓒ 도희선
 
쭈꾸미는 맛과 가성비가 좋아 벌써 여러 차례 불려 온 놈이다. 제법 실한 놈이 들어 있어 별다른 재료를 첨가하지 않아도 된다. 쭈꾸미 전문점에서 몇 번 먹어본 가락은 있어 비슷하게 흉내내 본다. 쭈꾸미 한 팩에 버섯, 양파, 대파, 호박 등 냉장고에 잠자는 놈들을 사정없이 깨워 쭈꾸미의 품에 안긴다.

1타 쌍피. 양도 불리고 맛도 풍부해진다. 매운맛에 얼얼해진 혀를 달래 줄 계란찜과 콩나물, 김, 마요네즈 소스까지 준비하면 끝. 웬만한 전문점 부럽지 않다. 소소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오늘 저녁도 맛있게 먹었다.

스테이크도 마라탕도 짜장면과 탕수육도 즐길 수 있다. 배달도 외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곳에서 다양한 요리가 가능한 것은 밀키트 덕분이다. 밀키트가 없었다면 저녁 끼니 때마다 부담이 되어 얼굴에 짜증이 묻어 났을 것 같다. 퉁퉁 부은 얼굴로 식탁에 반찬통을 패대기치듯 내려놓으며 힘들다고 툴툴대면 밥알이 곤두서 도망갈 것이다.
 
주꾸마 볶음  밀키트 주꾸미 볶음으로 차린 한상
주꾸마 볶음 밀키트 주꾸미 볶음으로 차린 한상 ⓒ 도희선
 
흡족한 저녁 식사후엔  서비스로 커피가 나오고, 남편의 당번날 외에 아~주 가끔 설거지 보너스도 따라 온다. 밀키트가 있어 나의 평화로운 식사 시간을 마련케 하니 내 어찌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brunch.co.kr/@dhs9802 에도 게재됩니다


#저녁메뉴#요리#주꾸미 볶음#전원주택살이#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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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생활을 하며 은퇴 후 소소한 글쓰기를 합니다. 남자 1, 반려견 1, 길 고양이 3과 함께 하는 소박한 삶을 글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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