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퇴근길, 이지현(가명)씨는 오피스텔 문에 붙은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권아무개와 전세계약을 맺어서 피해를 입으신 분을 찾습니다.'
권아무개씨는 이지현씨가 전세로 살고 있는 오피스텔의 집주인(임대인)이었다. 2020년 8월 이씨는 전세보증금 2억 원을 내고 전세계약을 체결했으니, 계약 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이씨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쪽지에 나와 있는 '오픈 카카오톡 대화방'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권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무갭 투자자' 권씨는 이곳 오피스텔 23채, 전국적으로 1000채가 넘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금 수십억 원을 체납해 세무서에서 권씨 소유 집을 압류하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서둘러 등기부등본을 확인해보니, '안산세무서의 압류'가 기재돼있었다. 이씨는 권씨에게 전세계약을 연장할 의사가 없으니 전세계약이 끝나면 전세보증금을 돌려달라고 연락했다. 권씨는 즉답을 피한 채 현재의 전세보증금보다 2000만~3000만 원 올려 부동산에 내놓으라는 말만 했다.
이씨는 권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하기로 했다. 다른 피해자들과 연락하는 과정에서 권씨와 똑같은 휴대전화번호(010-****-2400)를 쓰는 집주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A오피스텔은 모두 140세대인데, LH가 임대주택 용도로 매입한 45채를 제외한 95채 가운데, 58채를 권아무개씨, 박아무개씨, 김아무개씨 3명이 소유하고 있었다.
'2400조직'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권씨·박씨·김씨와 그 배후에 있는 최씨 등 4명으로 구성된 2400조직이 소유한 빌라·오피스텔은 전국에 걸쳐 3493채에 달한다. 이들이 빌라 왕이나 황제도 아닌 '빌라의 신'으로 불리는 이유다.
A오피스텔에서 벌어진 전세사기의 전말
이들은 어떻게 이토록 큰 규모로 전세사기를 벌일 수 있었을까. 이들(최씨·권씨·박씨는 사기 혐의로 구속·재판 진행 중, 김씨 수사 진행 중)은 경기도 구리 A오피스텔과 수원·군포의 빌라 전세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에 대한 공소장, 재판에서 나온 증거와 증언, 피해자들이 수집한 자료를 통해 그 전말을 파악할 수 있다.
전세사기의 무대는 A오피스텔이다. 주연은 무갭 투자자 2400조직과 분양대행사 홍씨·조씨(사기 혐의로 구속·재판 진행 중), 조연은 건축주와 공인중개사다.
부동산업을 하는 B산업은 2020년 2월 A오피스텔 분양에 나섰다. 건축주인 B산업 국아무개 대표는 홍씨의 분양대행사를 끌어들였다. 국 대표는 2400조직 재판 증인으로 나와 "3년 전 인천에서 오피스텔을 분양할 때 인근 부동산 소개로 홍씨를 처음 만났다"면서 "(홍씨가) 78세대 모두 '완판'을 해, 믿을 만한 사람이고 다음에도 (분양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국 대표는 홍씨와 '부동산 분양 대행 용역 계약서'를 체결했다. A오피스텔 분양과 전·월세 계약 체결을 홍씨에게 위임하고, 수수료는 분양가의 9%라는 내용이었다. A오피스텔 분양가가 1억 원 대 중반~2억 원 대 후반인 것을 감안하면, 홍씨는 한 채당 1000만~2000만 원가량의 수수료를 챙겼다.
전세사기 수법은 이른바 '동시진행'이다. 분양(매매)과 전세계약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을 거의 동일하게 책정했다. '깡통주택'을 만든 것이다. '깡통주택'은 집주인이 받는 전세보증금이나 대출금이 집값의 80%를 넘으면 향후 경매 시 세입자 입장에서 전세보증금을 떼일 수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제 집주인(임대인)과 세입자가 필요하다. 임대인으로 2400조직이 나섰다. 앞서 언급한 피해자 이씨는 "홍씨 회사 조아무개 분양실장에게 집주인 권씨가 누구인지 물어보니, 과거 분양 건 때부터 알던 사이라고 했다"면서 "전세계약 당시를 돌이켜보면, 분양실장과 권씨가 무척 친해보였다"라고 말했다.
홍씨 쪽은 세입자를 구하기 위해 인근 공인중개사들을 동원했다. '세입자를 구해주면 R 3개를 주겠다'는 연락을 돌렸다. 'R 3개'는 '리베이트 300만 원'을 뜻한다. 피해자 이씨는 "공인중개사가 '여기 진짜 괜찮다', '잘 나왔다'며 적극 추천했다"면서 "공인중개사도 전문가라고 생각하고 믿고 맡긴 건데, 뒤로도 돈 받은 것을 알고 배신감 때문에 화가 많이 났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판이 깔렸다. 분양대행사 쪽은 거짓으로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가입을 약속하며 세입자들을 안심시켰다. 당시 전세대란 분위기 속에서 동시진행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2400조직이 탄원서에 담은 황당한 논리
2400조직이 전국의 수많은 집을 매입하던 때, 집값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세 시세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계약을 갱신하거나 새 세입자를 받으면서 올려받은 보증금으로 보증금 반환을 돌려막기 해왔는데 이게 어려워졌다.
자연히 부동산에 부과되는 세금도 체납했다. 세입자들의 전세보증금 반환 요청을 거절하며 이들이 내세운 논리는 '전 정부(문재인 정부)의 세금 폭탄'이었다. 자기들도 피해자라는 것. 2400조직이 한 피해자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내용이다.
"내가 그동안 낸 세금이 100억이 넘어요. 누가 알아줍니까? 사기꾼 취급하기 바쁘지. 없던 세금이 전 정부에서 만들어졌어요."
2400조직은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앞두고 피해자들에게 탄원서 양식을 보내 사인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여기에도 전 정부 정책 탓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사건의 시작이 어떻게 되었는지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위 피고인은 당시의 부동산 정책을 활용해 무분별하게 부동산을 사들인 것 같습니다. 본인은 잘 알지는 못하였지만, 언론보도를 통해 제도적인 문제도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기를 칠 당시에는 관계가 좋아 보였던 건축주와 분양대행사, 공인중개사도 책임이 있다는 게 지금의 2400 조직의 논리다.
2400조직 재판에 증인으로 나선 건축주 국아무개 대표와 공인중개사 이아무개씨는 "(전세사기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2400조직의 변호인은 A오피스텔 건축주 국아무개 대표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깡통전세란 걸 알고 있었던 거 아니냐는 것이다.
"(분양대행사 홍씨가) 전세보증금과 분양가를 동일하게 책정한 것을 묵시적으로 용인 한 거잖아요. 매수인한테 책임을 전적으로 전가하고 있는데, 그런 계약 형태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2400조직은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논리까지 폈다.
피해자 : "당신은 남들 돈으로 도박하려다가 실패한 거고, 전 이제 막 취업해서 부모님 빚 갚아가며 사는 사람입니다. 저 같은 사람들 돈으로 도박한 거라고요."
2400조직 : "비싼 전세 들어온 본인은 책임 회피하시고요?"
피해자 : "대체 제 책임이 뭘까요. 공인중개사는 뒷돈을 받은 건지 이 집 정보는 1도 안 알려주고."
자신들에게 이미 피해를 본 이들을 을러대기까지 했다. 피해자 이씨는 "탄원서에는 '피고인이 구속된다면 그나마 부동산을 정리하고 있는 일들이 중단되어 해결할 길이 없어집니다'라고 쓰여있다"라면서 "자신들이 구속되면 피해회복이 어렵다는 협박성 내용이 담겼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