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 마흔이면 갖고 싶던 순자산의 액수였다. 스물 여덟 살, 남편과 나는 변변치 않은 돈으로 아기를 키우며, 백만장자를 꿈꿨다. 백만장자는 100만 달러를 가진 사람이라지? 우리 돈으로 얼마를 가진 사람인지 계산하기 위해 1달러를 1000원으로 퉁치며, 100만 달러에 1000원을 곱했다. 달러 당 200원이나 깎아 먹는 몹시 어설픈 계산법으로 백만장자를 우리 돈으로 10억 원 가진 사람인 셈 쳐버렸다.
백만장자의 삶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막연한 상상일지라도 백만장자 씩이나 되면 미래가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백만장자가 되어보자는 다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백만장자가 되려고 노력하면 오십만장자 쯤은 되지 않을까? 백만장자의 꿈! 이건 손해는커녕 무조건 남는 장사다. 우리는 제법 진지하게 재테크 공부를 시작했다.
백만장자의 습관
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으나 수많은 책 사이에서도 유독 한 장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부자가 될 수밖에 없는, 부자들의 사소한 습관에 대한 얘기였다.
책의 저자는 백만장자와 같이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대기실에는 햇볕이 투명하게 잘 들었고, 고요했다. 부자와 저자만 앉아 있었다. 부자가 저자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대기실 불을 꺼도 될까요?"
환한 대낮이라 전등은 켜나마나. 진료를 기다리는데 불편하지 않았다. 저자와 부자는 기분 좋게 병원 대기실 전등을 껐고, 저자는 통찰을 얻었다. 부자는 자신의 돈뿐만 아니라 타인의 돈도 아껴준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 계좌의 득실을 떠나, 어떤 형태의 낭비도 눈 뜨고 못 본다는 진정한 부자의 세계! 인색한 줄로만 알았던 절약의 세계가, 사실은 이토록 친절한 세계라니. 낭비를 줄이는건 너도 나도 좋은 일이었다. 병원 전기요금을 절약한 병원장님도, 전기 사용량을 줄여 깨끗한 지구에서 살게된 인류에게도, 호혜롭구나! 절약의 세계가 우리 가족에서 타인, 더 나아가 지구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절약을 통해 내 돈을 아끼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의 돈과 지구의 자원까지 아낌으로써, 환경도 지킬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절약에 윤리적 당위성을 얻었다.
이후로 백만장자의 꿈은 비록 허황될 지언정, 백만장자가 되기 위한 노력만큼은 아름답게 느껴졌다. 절약은 나에게도 좋지만, 남모르게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작은 힘이다. 너도 나도 절약해서 부자된다면 이건 이기적인 일이 아니라 이타적인 일이다.
부자처럼 보이는 삶과 부자의 삶은 달랐다. 진짜 부자들은 천원 한 장, 만원 한 장 우습게 보지 않고, 한푼 두푼 모으기 위해 갖가지 일들을 한다. 이웃집 백만장자들은 사실 우리 곁에서 구멍난 양말을 기우고, 유행이 지난 옷을 입으며, 오래된 차를 끌면서, 안 쓰는 방 불을 성실히 끄고 있었다. 버는 돈을 늘려 백만장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가진 돈을 아껴 대부호가 될 수도 있던 것이다.
백만장자 자아의 질문
나는 생리대 값을 아껴보기로 했다. 면생리대를 쓰기로 한거다. 일회용 생리대는 한 장에 300원 남짓, 밤에 잘 때 입는 생리대는 한 장에 1000원 남짓. 생리 한 번 할 때마다 만 원은 기본으로 드는 셈이다.
하지만 면생리대는 다르다. 초기비용은 들지만 한 번 사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대부호가 되려면 300원도 소중히 여겨야 하는 법. 안 하던 짓은 처음이 어렵지, 자꾸 하면 몰랐던 지평이 열린다. 백만장자의 자아가 나에게 묻는다.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면생리대를 써도 될까요?"
4년째 면생리대를 쓰고 있다. 쓰기 전까지 고민했다. 한 달에 한 번, 생리를 하면 몸이 무겁고 처지는데, 면생리대까지 세탁하면 힘들지 않을까? 외출했을 때 번거롭지는 않을까? 착용감이 불편하면 어떡하지?
기우였다. 착용감은 면 속옷을 입을 때만큼이나 보드라웠다. 손세탁은 귀찮았지만 어렵지는 않았다. 물로 헹구어 약간의 비누칠과 헹굼 후, 대야에 온수를 받아 생리대를 담갔다. 온수 속 생리대 위로 과탄산소다를 살짝 뿌려두면, 얼룩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햇볕의 양과 바람의 양을 가늠하며 축축한 생리대가 솜털처럼 마르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좋았다.
매달 지출하던 일회용 생리대 비용도 꽤 절약할 수 있고, 조금 더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일회용 생리대를 찾아 인터넷을 뒤지던 수고로움도 없다. 심지어 면생리대는 4년이 지나도 여전히 튼튼하다. 실밥 하나 튀어나오지 않았다. 마르고 닳도록 더 오래 쓸 수 있어 안심이다.
백만장자의 떡잎 같은 마음으로, 한 장에 300원을 아끼기 위해 낯선 면생리대의 세계에 발을 담갔다. 쓰고 버리면 그만인 일회용 생리대에 비해, 매 사용 세탁해서 뽀송하게 말려야 하는 면생리대. 고단한 자기희생의 시간이 될까 두려웠으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편하기로 따지면 역시 돈 만한 게 없을텐데. 가끔 일회용 생리대를 쓰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이런 순간, 그럼에도 면생리대 생활을 지속하게 한 힘은 돈이 아니었다. 우리의 서식지,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슬픔과 미래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플라스틱 위에 선 코끼리, 넝마를 뜯어 먹는 소, 비닐을 삼키는 거북이와 아기새 입 속으로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먹여주는 어미새와 아비새를 보고 나면, 가엽고 슬퍼서 한동안 허공을 쳐다본다. 몸을 움직이면 정신사나워 도무지 생각을 할 수 없다. 전 세계 바다 곳곳에 둥둥 떠 있는 쓰레기 섬들, 2050년 바닷속에는 물고기보다 플라스틱이 더 많을 거라는 참담한 예언까지. 마주한 현실에 슬프다.
환경과 내 은행 계좌
일회용 생리대 한 장에는 비닐 봉지 네 장에 해당하는 플라스틱이 들어 있다(참고 도서 <별일 아닌데 뿌듯 합니다>, 이은재, 클랩 북스). 일회용 생리대 한 장에 비닐 봉지 네 장? 일회용 생리대의 파괴력에 한 번 놀라고, 면생리대의 대단함에 두 번 놀랐다. 면생리대를 쓰는게 이 정도로 기특한 일일 줄이야. 일회용 생리대의 편리함에 홀라당 빠지기에는, 면생리대를 쓰기만 해도 구할 수 있는 쓰레기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일회용 생리대 1장 = 비닐 봉지 4장.
하루에 생리대 7장 = 7X4 = 비닐 봉지 28장.
한 달에 닷새 생리 = 28X5 = 비닐 봉지 140장.
40개월 면생리대 사용 중 = 140X40 = 비닐 봉지 5600장!
면생리대는 세탁에 들이는 수고로움에 비해, 아낄 수 있는 비닐 봉지(플라스틱)의 양은, 한 달에 무려 140장이다. 면생리대 사용은 노력 대비 성과가 높은 가성비 갑 제로 웨이스트다. 면생리대를 쓸 때마다 2050년 바다에 여전히 물고기가 헤엄치고 산호가 살아 숨쉬는 미래를 희망했다.
이 기분좋은 희망이 귀찮아도 생리대를 빨게 하는 진짜 힘이었다. 일회용 생리대를 쓰고 버리며 죄책감이 들던 때보다 꽤 괜찮은 미래에 작은 힘을 보탰다는 뿌듯함이 드는 요즘, 마음이 건강하다.
구멍 난 양말을 기우는 마음으로 한 달에 한 번 면생리대를 꺼내 든다. 내 계좌의 건강은 지구의 건강과 연결되어 있다는 진실을 한 달에 한 번 마주하는 셈이다. 지구에 대한 마음은 작은 절약까지 지속하게 해준다.
만약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께서, 밝은 낮에 켜진 불을 끄기 위해 스위치에 손을 대는 분이시라면, 언젠가 마음 속 백만장자의 자아가 말을 걸어올 것이다.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내 돈, 네 돈, 지구의 자원 가리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어떤 행동) 해도 괜찮을까요?"
기분 좋게 백만장자의 자아와 함께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