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하지만 반전인생을 살고 있는 혹은 반전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편집자말] |
찬바람이 부는 나른한 오후, 창문이 큰 베이커리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카톡 알람이 울렸다.
-(쟤를 대신해서 드리는 쪽지) 우리들의 정지혜, 쟤, 페미쟤씨가 12월 9일, 오늘 새벽 하늘로 떠났습니다. ...
첫 구절을 읽고 잠시 심호홉을 했지만, 곧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2022년까지는 살고 싶다는 쟤의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통증때문에 잠에서 깨서 힘겨운 여러 일상에 투덜거리고 있던 그 무렵에, 쟤의 생명은 사그라들었다. 갑작스러운 슬픔에 야속하고 미안한 마음이 뒤섞였다.
너와의 만남
쟤와는 2020년 봄, 시민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배우로 처음 만났다.
검정 배기 팬츠에 베레모를 쓴 쟤는, 서늘한 바람이 불던 날에 얼굴에 홍조를 띤 채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한눈에 나는 쟤가 자궁이나 난소, 아니면 유방에 질병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 무렵 나는 자궁과 난소 수술 후 2년 정도 지속했던 호르몬 주사와 약을 중단한 상태였고, 얼마 전까지 호르몬 약 때문에 수시로 열이 오르던 내 모습과 그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얼마 후, 쟤가 유방암 4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 암을 진단받았을 때 그는 이미 폐와 뼈에 암이 전이된 상태였다. 한쪽 유방과 두 개의 난소를 모두 제거했고, 살아있는 동안 계속 항암 치료를 받아야했다.
하지만, '삼십대 초반, 여성 4기 암환자' 쟤는 아프지 않기 위해서 애쓰기보다, 어떻게 잘 아플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지길 원했다.
예술 기획 일을 하던 쟤는 항암을 시작하면서 온라인 삭발식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삭발식 영상 속에서 그는 지인들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광대가 위로 올라간 채 연신 얼굴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삭발 후 스님 같다는 이야기를 듣자, 스튜디오에 가서 스님 콘셉트로 친구들과 코믹한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함께 했던 연극에서 쟤는 '아픈 몸의 노동권'에 대해서 역설했다.
작년 봄, 쟤, 함께 연극했던 친구, 나. 이렇게 셋이 오랜만에 만났다. 쟤는 부쩍 야위어 있었다. 가방을 맨 어깨는 앙상했고, 골목길을 걸으며 숨이 차서 자주 쉬어갔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지만, 서른 여섯살 쟤의 몸은 분명 빠른 속도로 삶의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통증과 빈혈때문에 힘들다면서도, <아픈 몸과 함께하는 온라인 글쓰기> 모임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생기가 넘쳤다. 우리 셋은 합정의 작은 카페에서 늦게까지 함께 있었다.
그러던 중에 여행 가고 싶다는 얘기가 나왔고, 즉석에서 날짜를 잡고 여행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작년 7월, 삼척에서의 3박 4일이 쟤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너와의 헤어짐
쟤의 빈소에는 환하게 웃는 영정 사진과 하얀 국화, 그리고 우리가 함께 쓴 책 <아픈 몸, 무대에 서다>가 놓여 있었다.
장례식은 쟤가 생전에 세세하게 적어놓은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가장 작은 빈소를 고를 것, 환경을 생각해서 종이 관으로 할 것, 부의금은 자신이 후원하던 단체에 기부할 것 등. 자신을 줄곧 가난한 예술인 비혼 여성이라고 소개 했지만, 통장 속 그가 후원하던 단체는 17곳이나 되었다.
12월 10일 4시, 쟤의 장례식장에 여러 사람들이 모였다. 생전에 그는 자신의 조촐한 추모식을 기획했고, 직접 몇몇 지인들에게 직접 추모사를 부탁해 두었다. 입관 전, 쟤에 대한 짧은 추억을 나눈 후, 병원에서 코에 산소줄을 꽂고 육성으로 남긴 쟤의 마지막 영상이 흘러나왔다.
"11월 초 의사가 시한부 선언을 했어요.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고 매일 기적을 살아내고 있다고요. 그동안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을 부지런히 타파하며 살았습니다. 제 삶은 결국 암을 통해 많은 의미를 갖게 되었네요.
아픈 몸으로 계속 활동하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았어요. 죽음을 준비하고 있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 그 와중에도 자신을 놓지 않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쟤는 병실에서도 네 개의 프로젝트를 지속했다. 산소줄을 코에 꽂고 줌과 구글미트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브런치에도 틈틈이 글을 써서 올렸다. 아픈 몸으로 일할 권리를 이야기 했고, 한 사람에게 돌봄이 가중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예술과 노동, 인권에 대해서도 끝까지 관심을 놓지 않았다. 쟤의 어머니는, 쟤가 주문했던 책이 세상을 떠난 후 도착했다고, 물기어린 눈으로 말했다.
나는 장례식에서 돌아와 피곤한 몸으로 침대에 누웠다. 머리 맡에는, 지난 봄, 쟤가 수업에서 만들었다며 건네 준 세이지 인센스가 놓여있다. 이제 향이 거의 사라진 인센스의 잔향을 깊은 숨으로 들이마시며, 지난 여름 우리의 여행 사진을 찾아보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초여름의 삼척의 풍경, 원피스에 하얀 셔츠를 걸치고 모래사장을 걷는 쟤, 그리고 숙소 작은 테이블에 놓인 샴페인과 케이크.
무거운 것을 들기 힘들어 최소한의 짐만 가져왔던 쟤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묵직한 무알콜 샴페인 한 병을 꺼냈다. 우리는 조각 케이크를 사서 초를 세 개 꽂고 여행을 자축하며 샴페인을 마셨다. 사진 속 무알콜 샴페인을 보는데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다.
그 무알콜 샴페인이 꼭 쟤 같아서. 지켜야 하는 것들을 지키면서도 그 안에서 즐거움을 잃지 않았던 사람. 혼자보다 함께 즐기고자 했던, 취하지 않지만 축배를 즐길 수 있었던 사람.
결국은 소멸되고 말 것을 위해 애써야 하는 삶에, 허탈감이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그때, 무알콜 샴페인을 사서 여행 가방에 넣는 쟤의 마음을 더듬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축배를 들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전해진다. 죽음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역설이 그 안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