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을 하시겠습니까?"
누군가 이렇게 물어본다면, 그 대답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시간여행에 대한 저의 공상은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87년에 나온 꽤 오래된 영화인데 대략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미국에 사는 청소년 마티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발명가 브라운 박사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젊은 부모님과 박사를 만나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영화는 꽤 인기가 있어 후속으로 3편까지 제작될 정도였습니다.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제 나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쯤이었던 것 같은데,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한다는 설정이 꽤 충격적이면서도 흥미로웠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시간여행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시절 타임머신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기는 친구들과 하는 일종의 놀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시간여행에 대한 주제로 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제는 타임머신을 넘어서 타임슬립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지요. 타임슬립은 알 수 없는 계기로 시간여행을 하게 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거스르는 타임머신과는 다르다고 하는데요. 최근에는 타임슬립을 다룬 대만드라마 <상견니>가 사람들에게 꽤 열성적인 인기를 얻어 영화로 제작되기 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웬 타임슬립?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제가 산책을 하다가 문득 작가들이 '시간여행'을 생각하게 된 계기랄까 순간이랄까 하는 것들을 포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설명이 길어졌네요.
그러니까 며칠 전이었습니다. 여느 날처럼 산책을 하다가 조금 더 걷고 싶은 마음에 옆동네로 진출하여 걷고 있는 중이었어요. 대형마트와 각종 브랜드의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큰 대로변에 한 표지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우저서원'
표지판을 보고 저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요. 서원? 조선시대 지방 사립 교육기관이던 바로 그 서원을 말하는 걸까? 이런 큰 대로변 가까이에 옛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다니. 저는 조심스럽게 표지판이 가리키는 골목어귀로 들어섰습니다.
오리전문식당을 지나니, 70년대 지어진 듯한 낮은 건물들이 골목 구석구석에 위치한 오래된 주택가가 펼쳐졌습니다. 이런 곳에 정말 서원이 있을까, 의문을 품고 걸어가다가 정말로, 역사책에서만 보던 그 서원을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정성이 느껴지는 단정한 정원과 고풍스러운 한옥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와…!'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묘한 느낌이 들었어요. 벽돌이나 시멘트로 지어진 건물 사이에 오래된 한옥이라니. 시공간이 묘하게 얽혀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덕수궁이나 경복궁도 고층빌딩이 늘어선 서울 도심 가운데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이 서원을 보고 유독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아마 전자는 관광지라는 인식이 강해 먼 옛날의 일로만 생각된 반면, 이 서원은 동네 근처인 데다가 사람들의 생활공간 가까이에 있어 그런 듯 싶었어요. 이곳에서 청년들이 공부를 하며 지냈겠구나, 하는 실제(實際)감이 조금 더 들었달까요.
그런데 우저서원은 누구를 모시는 서원일까, 궁금증에 안내판을 보니 중봉 조헌이라는 위인을 기리며 그의 생가에 지어진 것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습니다. 조헌? 그의 이름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라는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 임진왜란 때는 왜군과 맞서 싸운 인물이구나, 싶어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서원으로 들어섭니다. 입구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학 공간이던 강당이 중앙에 위치해 있고, 양 옆으로 학생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동재와 서재가 있습니다.
강당을 뒤로 돌아 올라가면 내삼문이 나오고 위패를 모신 사당이 보입니다. 서원은 경사진 언덕에 지어져 강당에서 사당으로 이어진 오르막길인데, 이것이 사당을 절로 우러러보게 하는 건축적 장치로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사당에서 올라온 길을 뒤돌아 보니 서원 앞으로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고 저 멀리 고층 아파트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조헌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위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이이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서 학문적 역량도 뛰어난 선비였다고 합니다. 조선후기 실학자로 유명한 박제가가 그의 책 '북학의'의 서문에서 조헌 선생의 마부가 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존경을 표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1544년 생으로 조선 중기의 인물이지만 문벌을 타파한 인재등용을 주장할 정도로 깨어있는 학자였습니다. 스승의 서신을 가져온 노비와 겸상을 했다거나 노비 출신 학자인 서기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기록에서 시대의 관습과 계급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면모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10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밭농사와 땔감을 떼는 등의 집안일을 도우며 어렵게 생활하였는데, 이런 경험들이 그에게 기존의 양반들과는 다르게 세상을 보는 시선을 갖게 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의 스승이었던 이이는 '도에 의해 나아가고 물러서는 도학지사(道學之士)를 진짜 유학자, 즉 진유(眞儒)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조헌이 의병을 이끄는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조헌의 제자가 그를 수천 년 동안 없었던 진유라고 말한 것을 보아 의병들이 그를 얼마나 믿고 따랐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옥천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맞서 싸웠습니다. 같은 해 6월 청주성을 수복하고 8월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맞기 위해 금산으로 가던 도중에 그의 전쟁 공로를 시기한 관군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1700여 명 가까이 되던 의병은 관군에 의해 와해되어 700명으로 줄었으나 조헌 선생은 굴하지 않고 금산전투를 치르다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게 됩니다.
그는 바른말도 잘하고 불같은 성정 때문에 주변에 적도 많았습니다. 그가 금산전투에서 사망한 이후에도 '이름을 얻기 위해 죽었다(銘名而死)'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조 대에 이르러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여 우저서원이 지어지고, 영조 대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가 있던 시절, 현대로 타임슬립이 되었다면 그는 어떤 인물이 되었을까요? 현대에 와서도 그는 민초들을 모아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는 영웅적인 리더가 되었을까요? 타임슬립을 소재로 이야기를 써 내려간 작가들도 저와 같은 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겠지요?
영웅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롭기만 합니다. 한편으론 영웅이 필요한 세상이란 그리 살기 좋은 세상은 아니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많은 사회라는 의미일 테니 말입니다. 일반 시민이 서로 의논하며 화합하는 시대가 살기 좋은 시대겠지요. 그 안에서 권력은 또 생겨나겠지만 그 권력을 견제할 수 있고, 억제할 수 있는 시대라면 말입니다.
그가 현대로 타임슬립하는 것은 그에게 몹쓸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조헌 선생, 그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서 할 도리를 다하고 생을 마쳤으니, 더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저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시기를.
저는 사당 앞에 서서 서원의 풍경을 한 번 더 눈에 담고, 그의 추모비 앞에서 목례를 하고 나옵니다. 추모비 뒤로 200년이 된 나무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굳건하고 듬직한 느낌이라 안심이 됩니다.
이제는 누군가의 인생을 잠시 들여다본 시간을 마칠 시간입니다. 다시 현실로 타임슬립을 해볼까요?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던 신기한 산책을 마무리하며. 오늘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내일도 당신과 함께하는 산책을 기대해 봅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 한국문화원연합회 홈페이지, 김포시청 문화관광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