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으로 비관하지만 의지로 낙관하기 위해 저만의 책방으로 매달 작가들을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널브러진 생각을 그러모아 매달 초 '이달의 책방'을 엽니다. [편집자말] |
제목에 낚여서 누구나 한 번쯤 들춰봤을 책이 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다. 지금은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싶으면, 연애를 잘하고 싶으면 유튜브에 "연애 잘하는 법",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ENFP 연애" 등을 검색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구전과 책으로 사랑을 공부했다. 사랑은 그냥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많은 이들이 예전부터 사랑을 어려워하고 공부해 왔다.
많은 대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제목에 낚여 한 번쯤은 대출해 봤다는 <사랑의 기술>, 10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그때와는 또 다른 감상으로 다가온다. 그 사이 내 삶에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들이 들어와 있음을 새삼 느끼며 나의 사랑을 돌아본다.
1. 사랑은 동사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흔히 사랑에 '빠졌다'라고 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감정 상태, 즉 형용사로 사랑을 생각하지만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활동' 즉, 동사다. 만약 사랑을 금방 생겼다 사라져 버리는 감정 상태로 본다면 우리는 사랑을 관계로 발전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전제에서는 연인 사이 또는 결혼이 성립되기 어렵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설렘과 두근거림을 느껴왔나. 그러나 설레는 감정을 느꼈다고 다 사랑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사랑이 동사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괜히 눈앞에 더 나타나려 하고 그 사람을 챙겨주게 된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사랑은 보일 수밖에 없음을 경험을 통해 안다. 그 관점으로 하루를 돌아보면 많은 사랑의 행동이 보인다.
부모님이 차려주시는 밥상, 동료가 힘내라며 건네는 커피, 바쁜 와중에도 안부 전화를 해오는 친구, 좋은 하루를 보냈는지 물어봐주는 연인. 생각해 보면 많은 동사들이 내 삶에 일어나고 있다. 그 사랑의 형태와 깊이는 다르지만 우리는 많은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발견한다.
사랑은 마음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에 나 역시도 별 거 아닌 말과 행동일지라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나의 부모에게, 나의 형제에게, 나의 동료와 연인에게 내가 사랑받고 있음에 감사한 것처럼, 그들도 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행동하려 한다. 사랑은 노력을 동반하는 활동이고 사랑하기에 기꺼이 노력하게 된다. 사랑하려면 체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단순히 유머는 아니다.
2. 사랑은 존중이다
"만약 사랑에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중의 어원 respicere은 바라보다, 즉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중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보는 관심이다."
평소 '존중한다'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존대어를 쓰고 예의를 갖추면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고 그 사람답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존중이라면, 이제까지 뱉어왔던 "당신을 존중한다"는 나의 행동이 틀렸음을 이제는 안다.
먼저 연애의 측면에서 존중을 생각해 본다. 연애를 하면 자존감이 올라간다고들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기 때문이다. 정말 사랑하면 그 사람의 어떤 모습도 받아들이게 되고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본인을 경험하며 사랑받음을 느낀다.
그러다 우리의 연애가 힘들어지는 시점은 바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온다. 이전에는 거슬리지 않았던 상대방의 모습이 갑자기 눈에 거슬린다. 상대를 바꾸려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온다. '밥 먹는 게 꼴 보기 싫어지면 정말 싫어진 거다'라는 평소라면 웃고 넘길 말이 현실이 되면 슬픈 이별이 된다. 그때 우리는 '사랑이 식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건 상대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비단 연인 간의 사랑에만 존중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며 내가 나를 존중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중이다. 성인이 되어 부모로부터 정서적, 물리적 독립을 하면 세상에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희소한 것임을 알게 된다.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하는 과정에서 내가 나를 존중하는 게 쉽지 않다.
사랑받기 위해 세상의 기준과 타인의 기준으로 계속 나를 바꾸려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될까', '나는 왜 이럴까' 자책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마다 다시 나를 사랑하려 노력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그건 '내가 최고야!'라는 태도가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이다'를 받아들이고 그래서 내가 잘 되기를 바라니까 이런 노력을 해야겠다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이러한 존중의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3. 사랑은 태도다
"사랑은 특정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이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형을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나에게만 다정한 사람을 찾는다. 나한테만 친절하고 나만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러나 프롬에 따르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쁜 꽃을 사랑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진 것이고, 연약한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며 고난과 역경이 함께하는 이 삶마저도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랑은 어떤 대상에 한해서 생기는 감정의 수준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어떤 한 대상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찾기 어려운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짝을 찾을 때 이 사람이 종업원에게 친절한지, 노약자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지, 사소한 것에 감사함을 느끼는지를 확인하려 한다. 사랑의 태도가 몸에 배어있는 사람인지, 그래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모성애가 가진 어린아이의 생명의 긍정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는 생명 유지와 성장에 필요한 보호와 책임이며 또 하나는 어린아이에게 삶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주고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고 소년 또는 소녀인 것은 좋은 일이며 지상에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는 감정을 갖게 하는 태도이다."
<사랑의 기술>에서 이전에는 와닿지 않았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보니 인상 깊은 부분은 바로 삶에 대한 긍정이다. '산다는 건 좋은 일이다'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으로 느껴질 수 있음을 이해한다. 살아가는 건 쉽지 않고 고난과 역경이 우리 삶을 가만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말할 수 있다. '살아갈만하다'라는 삶에 대한 긍정을. 그리고 그럴 수 있는 힘은 사랑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안다. 내가 삶을 사랑할 수 있는 건 무조건적인 부모의 사랑과 성장하고 살아가는 데 사랑을 보태준 많은 이들 덕분인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수없이 스스로를 미워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이 스스로에 대한 사랑인 것도 안다.
'이 세상은 살만하고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는 문장이 시간이 흘러 이제야 마음에 닿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동안 부모를 더 이해하게 되었고, 그간 받았던 당연하지 않은 사랑들에 감사할 수 있게 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생 때 접했던 <사랑의 기술>을 다시 읽어 보니 10년 사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의 종류와 형태, 그 깊이가 다양해졌다. 물론 사랑은 글로 배우는 게 아니라는 말처럼 상대방을 소유하려 하지 말고 사랑받기보다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에리히 프롬의 말은 현실에서 실천하기엔 너무 이상주의적이며 너무 이성적이다.
그럼에도 <사랑의 기술>은 시장에서 교환되는 남의 사랑에 익숙해진 세상에서, 나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