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 여성들이 혼자 살면서 알게 되는, 새롭게 깨닫고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들에 대해 씁니다.[편집자말] |
2021년 겨울. 밤 9시. 씩씩거리며 구형 SM520을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영화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3시간의 러닝타임 중에 절반이 자동차 안에서 나누는 남녀의 대화 뿐이다. 높낮이도, 우여곡절도 없다.
참다 못해 꾸벅 졸았다. 영화관 좌석이 귀성길 고속도로 조수석처럼 느껴졌다. 이게 무슨 명작이냐? 다시는 찾아볼 일 없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것은 '사보 900 클래식'이라는 수동 변속기 차량을 기막히게 모는 20대 여성 운전기사 미사키의 시니컬한 표정 뿐.
2023년 겨울. 오전 10시. 정신 차려보니 난 한국의 미사키가 되어 있었다. 평생 운전할 일 없다 생각한 스틱 차량의 클러치를 밟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미사키는 승용차였다면 난 대형 버스라는 것.
그녀는 프로답게 시종일관 무표정이었지만, 난 온갖 호들갑을 다 떨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는 것. 그렇다. 올해 나의 첫 도전은 1종 대형 버스 몰기다. 몇 년 전 2종 자동을 따러 온 운전연수학원을 재방문했다. 어쩌다 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됐을까?
오기로 등록한 대형 면허 따기
며칠 전, 회사 트럭을 급히 몰아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러나 난 2종 자동이기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보다 못한 다른 직원이 나서서 시동을 켠다. 멋지게 클러치를 밟고 회사를 빠져나간다. 우울해졌다.
오르막길에서 중립 기어를 넣고 있는 기분이다. 가만히 있어도 뒤로 간다. 갑자기 오기가 생긴다. 나라고 못할 것 있나? 나도 언젠간 나만의 트럭을 몰 거다. 기왕 따는 거라면, 1종 보통보다 대형을 따자.
첫 장내 교육 날. 혼자 쭈뼛거리며 서 있다. 내가 몰 버스가 저 멀리서 온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여자라고 무시하면 어쩌지?', '다리 짧아서 페달 못 밟는 것 아냐?', '스틱 운전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그러는 사이 노란 버스 한 대가 선다.
눈 앞에 있으니 세 배는 크다. '내가 이걸 몬다고?' 떡두꺼비처럼 생긴 강사님이 올라오라고 손짓한다. 계단을 밟고 자연스레 승객석으로 향한다. "에헤이. 어디 가. 운전석에 앉아야지." 아, 이제야 실감 난다. 내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운전석에 앉으니 헛웃음이 난다. 핸들이 무슨 훌라후프만 하냐? 기어도 꼭 대형 면봉 같다. 시야는 어릴 적 아빠가 업어주던 그 높이다. 승용차에서 못 보던 것들이 훤히 보인다. 조금은 무섭다. 1시간 동안 기어 바꾸는 연습만 한다. 1월인데 땀이 뻘뻘 난다. 어깨뼈가 나갈 것 같다.
"자, 이제 주행해 볼 건데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요. 운전해 봤다고 자만하지 말고. 자기 버릇대로 하면 연석 밟는 거야. 저기 가드레일에 묻은 노란색 페인트 보이죠? 저번주에 수강생이 박은 거야."
강사의 말에 울상을 지으며 핸들을 꽉 잡았다. 그는 내가 경직되어 보였는지 이어서, "여자라고 못 하는 거 아니예요. 저번 주에도 화물 회사 다니는 아가씨 2명 1종 대형 합격했어. 연봉 더 올려준다고." 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사람은 배짱이 있어야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미사키가 어디 표정 한번 흔들리던? 후진은 없다. 앞으로만 나아가야 한다.
"왼쪽 사이드 브레이크 내리고. 그래요. 조이스틱처럼 생긴 거. 자, 브레이크 떼고. 클러치로 천천히. 자, 가자."
버스가 거대한 굉음을 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따로 노는 팔다리를 상하좌우로 어색하게 움직인다. 장내에서 함께 돌고 있는 2종 승용차들을 내려다본다. 장난감같다. 나도 5년 전엔 저 차를 타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제일 큰 차를 몰고 있다. 세상은 모를 일이다.
오르막, 굴절, S자, T자, 평행주차, 가속까지 마치고 나니 확실히 자신감이 붙는다. 큰 차가 주는 파워가 있다. 슬슬 재밌어지기 시작한다. 함께 동행한 강사님도 초반보다 훨씬 누그러워진다.
수업이 반복되자, 갑자기 승객석에 앉아 있던 강사님이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다. 이 학원에서 자기가 직원들을 관리하는데, 이맘때만 되면 계약직과 정규직의 갈등이 심해진단다. 여간 피곤한 게 아니란다. 또 저번 주에 합격한 수강생 중엔 은행장이 계셨단다. 은행이 정년퇴직이 빨라서 제2의 인생을 찾기 위해 1종 대형을 따셨단다. 아, 그렇군요. 난 핸들을 돌리는 데 열중하며 대충 맞장구를 친다.
이런 광경 왠지 익숙하다. 학교 다닐 때 마을버스에서 본 장면이다. 항상 기사 뒤 승객석에 앉아 자기 얘기를 늘어놓으시던 할아버지. 귀찮은 내색 없이 맞장구를 쳐주시는 기사님. 할아버지는 정류장이 다가오면 후련한 얼굴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기사님도 흔쾌히 손을 흔들어 준다. 버스는 승객이 남긴 잡념을 싣고 떠난다. 이동하는 상담소.
모두가 혀를 내두른 내 점수
손바닥이 다 까지고, 물집이 터질 때쯤 10시간의 교육이 끝났다. 대망의 시험날이다. 햇빛이 눈부시다. 오늘의 시험 응시자는 총 9명. 그 중 여자는 나 뿐이다. 내 이름이 첫 순서로 호명된다.
"정누리씨. 버스 앞으로 오세요." 계단을 밟고 올라가 운전석에 앉는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미사키처럼, 요동치는 마음의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부드럽게 컨트롤한다.
"100점입니다." 운전석에 달린 채점 기계가 말한다. 합격이다. 굴절, S자, T자, 평행주차, 가속도 완벽하게 해냈다. 적토마를 길들인 관우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사무실 직원 분이 박수를 쳐준다. 다른 남성 응시자들이 내 합격 여부를 물어봤단다.100점이다. 다들 혀를 내둘렀다.
운전면허증 구석에 '1종대형'이라는 4글자가 추가됐다. 고작 4글자다. 그 외에 바뀐 것은 딱히 없다. 단지 돌아오는 길, 8차선 도로가 색다르게 느껴졌을 뿐. 외국에서 화물업을 하는 20대 여성도, 대형 버스 안에 초밥가게를 차린 사장님도, 1분 1초를 아끼며 달리는 소방차 속 소방 대원의 이야기도 내 이야기처럼 들리기 시작했을 뿐. 탁 트인 도로가 유난히 드넓게 느껴졌을 뿐.
집에 돌아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원작 소설을 읽었다. 다시 마주칠 리 없다 생각한 작품으로 1년 만에 돌아왔다. 과거에 흘려 들었던 가후쿠의 대사가 갑자기 마음 속에 콕 박힌다. "싫더라도 원래로 되돌아와. 하지만 돌아왔을 때는 그전과 조금 위치가 달라져 있지. 그게 룰이야. 그전과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어."
매 순간 같은 지점에서 덜컹거리지만, 돌아올 때마다 나의 운전 실력은 늘어난다.작은 차로 빠져나갈 수 없는 구덩이라면, 더 큰 차로 바꿔 타면 그만이다. 어차피 후진은 금물이니. 다음은 특수 면허에 도전해볼까? 더 넓은 시야로 도로를 달려보자. 드라이브 마이 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