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15일 오전 11시 32분]
지난 9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418호 법정.
고요하던 법정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고 이예람 중사 어머니 박순정씨가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중사를 성추행한 피고인 장아무개(당시 중사)씨의 2차가해 범죄(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장(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 정진아 부장판사)이 판결 내용을 전하던 중이었다.
"피해자(이 중사)가 감내하기 어려운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꼈을 것으로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가해자인 피고인(장씨)이 진지하게 자숙하는 태도로 임하기만 했더라도 (이 중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와 같은 결과를 낳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재판장은 이 중사가 겪었을 고통을 언급하며 2차가해 범죄의 심각성을 지적했고 박씨는 긴 탄식을 내뱉었다. 입술을 꽉 깨물며 애써 화를 억누르던 박씨였지만 결국 스스로 머리를 내리치며 가쁜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현장에 함께 자리한 다른 군 사망사건 유족들이 황급히 박씨 손을 붙잡으며 안정을 유도하는 한편, 박씨를 대신해 판결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피고인 주장 중 단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아
"피고인에 대해 모두 유죄를 선고한다. 주문. 피고인 징역 1년."
재판부는 앞서 징역 7년이 확정된 성추행 범죄(군인등강제추행치상)와 이날 선고한 2차가해 범죄(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를 경합범으로 인정하는 등 감형 사유가 있음에도 비교적 엄한 처벌을 택했다. 아직 1심 판결이긴 하지만 장씨의 형량은 징역 8년(7년+1년)으로 늘었다.
"그 불법성이 매우 크다." "죄질이 매우 좋지 않다."
재판부는 장씨의 2차가해 범죄를 강하게 지탄했다. 특히 아래와 같은 설명을 부연했다.
"피해자의 성정이나 행동을 왜곡해 퍼뜨리는 행위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공격해 피해자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으로 치명적이고 직접적인 2차가해이다."
"피고인의 말은 군대 조직의 특수성, 남성 중심의 인적 구성과 계급문화, 공동생활에 근거한 밀착성·폐쇄성과 결합해 빠른 속도로 전파됐고 피해자는 중대한 피해를 당했어도 거대한 조직 안에 홀로 고립되고 말았다."
그동안 공판에서 장씨 측은 자신의 말이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특검이 기소한 장씨의 2차가해 발언은 그가 이 중사의 성추행 피해 신고 후 한 발언이다. 장씨는 군인 동료들에게 "일상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신고를 당했다" "선배님들도 여군 조심하시라"(이상 A·B를 상대로 한 말), "받아주니까 했다"(C를 상대로 한 말)고 말했다.
장씨 측은 '변명 또는 의견에 불과하고 피해자를 특정하지 않았다' '공연성도 없고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제3자에게 전파하지도 않았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장씨의 주장 중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피고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재판부는 이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이 인정되려면 해당 발언이 ▲사실 관계에 관한 진술(의견 표명과 대치하는 개념)이어야 하고 ▲그 진술이 거짓이어야 하며 ▲공연성(불특정 또는 다수가 인식할 수 있는 상태)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선 장씨의 말이 사실 관계에 관한 진술인지, 그 진술이 거짓인지에 대해 재판부는 아래와 같이 판단했다.
<장씨가 A·B를 상대로 한 말>
"신체접촉 정도와 그 후 피해자(이 중사)의 태도 내지 행위에 대한 허위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단순한 의견 표명으로 볼 수 없다. (중략) 이런 말(흔히 있는 일을 피해자가 굳이 신고해 애를 먹고 있다는 뉘앙스)을 들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거나 적어도 실체보다 과장된 주장을 하는 것으로 믿게끔 해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켰다.
(중략) '여군을 조심하라'는 내용은 단순한 의견 표명 내지 훈계적 발언으로도 볼 수 있으나, 이 사건에서 해당 표현이 이뤄진 맥락을 보면 '여군은 일상적인 일을 부풀려 타인을 의도적으로 곤경에 빠뜨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뉘앙스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이는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발언으로 볼 수 있다."
<장씨가 C를 상대로 한 말>
피해자가 피고인의 행위를 용인했다는 내용으로 의견 표명이라고 할 수 없다. 피고인은 추행 실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고 군인등강제추행치상 범행으로 처벌받았으며 재판 과정에서 사실 관계와 범죄성립 여부에 대해 다투지 않았다. 피고인은 사건 발생 직후 차에서 내린 피해자를 쫓아가 미안하단 취지로 말했고 (중략) 즉 피해자가 피고인의 행위를 용인한 사실이 없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결국 그 내용 자체가 실체에 부합하는 사실이라고 볼 수 없고 피고인 스스로 그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음에도 (중략) 피해자가 부당한 신고를 했다는 뉘앙스를 보여주고자 허위사실을 적시했다.
친밀한 동료들이 되레 유죄 이끌었다
공연성이 있다는 재판부의 판단엔 A·B가 장씨를 위해 쓴 탄원서나 A·B·C가 수사 과정에서 한 진술이 주요한 근거로 작용했다. 장씨가 자신을 위해 한 행동이나 장씨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이들이 오히려 그를 유죄로 이끈 셈이다.
"A·B·C가 (피고인의 말을)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하지 않을 정도로 피해자와 특별한 인적관계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피고인과 친밀한 관계이기에 편향된 여론을 조성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설령 A·B·C가 발언을 전파한 사실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발언을 공개할 수 없는 객관적 사정이 없었던 이상 (중략) 그것만으로 전파 가능성이 없었다고 볼 수 없다.
더욱이 피고인은 A·B에게 탄원서를 써줄 것을 부탁해 교부받았고 (중략)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통해 다른 군인들의 탄원서까지 구하고자 한 의도가 보인다. (중략) 피고인이 A·B에게만 전달할 의도로 그 발언을 한 것이 아니라 탄원서를 받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알릴 의도로 사건 내용을 왜곡해 전파한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적어도 피고인이 발언의 전파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 위험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가 있었다고 보인다.
C는 피고인과 비교적 친밀한 사이인데다 사건 당일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한 방역지침을 위반해 회식을 주도한 사람으로서 사건을 은폐·축소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C는 합의나 기타 방법을 통해 사건을 무마하려고 했다. 이러한 사정이 비추면 공연성 내지 전파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고 피고인에게도 공연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이날 판결로 이 중사 사망 사건에 대한 군 검찰 수사의 부실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군 검찰(국방부 검찰단)은 이날 재판에서 다뤄진 장씨의 2차가해 발언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재판에 넘기지 않았다. 앞서 국방부 검찰단 수사 결과, 장씨는 성추행(군인등강제추행치상)에 대한 죗값만 치렀다.
유족과 시민단체는 장씨뿐만 아니라 윗선의 2차가해 및 은폐·무마·회유 시도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정치권이 이에 호응해 특검법을 통과시켰다. 이날 판결은 특검 수사의 결과물이다. 장씨 외에도 6명이 재판을 받고 있다.
군 법무관 출신 강석민 변호사(이 중사 유족 측 변호인)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군 검찰이 2차가해 범죄에 대해선 들여다보지 않은 것"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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