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무렵, 외출 준비로 분주하다. 새로 시작한 일로 많이 들떠 있다. 앞머리를 돌돌 말고 거울 보며 변장 중이다. 큰딸 방에서는 기타 선율이 문 너머로 들려온다. 몇 달 전 새로 산 악기에 흠뻑 빠져 날 새는 줄 모른다. 독학으로 깨우쳐 가는 중이다. 딸은 손톱 아래가 아프다며 방에서 나온다.
딸 "(화장하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엄마, 오늘 어디 가?"
나 "응, 저번에 말한 약속에 가야 해서."
딸 "나도 엄마처럼 화장하고 싶어."
나 "그렇구나. 왜?"
딸 "엄마처럼 화장하면 왠지 어른이 된 것처럼 기분 좋아질 것 같아서."
엄마 "그래. 엄마도 네 나이 때는 그랬단다. 화장대 위에 놓여있던 화장품이 얼마나 바르고 싶었는지 몰라. 그 맘 이해해. 요새는 못난 얼굴 가리느라 화장을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할 때가 있기도 해. 화장 말고 변장."
큰딸은 유난히 스스로 하는 것을 좋아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것도 다른 사람이 누르면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게 울었다. 버스정류장 버튼도, 운동화를 벗을 때도 누가 벗겨주면 그렇게 서럽게 울었었다. 아이의 성향을 이해하며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몰라 울면서 육아를 글로 배웠다. 그럴 때마다 육아 책과 EBS에 물어보았다.
말랑말랑 올록볼록 귀여운 뱃살과 엉덩이, 볼살을 자랑하던 파마머리 아이는 쑥쑥 자랐다. 얼마 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키는 어느덧 엄마만큼 자라 아빠와 걷는 뒷모습을 보면 새로운 여자친구냐며 놀려대는 짓궂은 엄마가 되었다. 이젠 엄마의 화장을 넘본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나
어릴 적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사는 줄 알았다. 막상 어른이 되고 나니 해야 할 일이 더 많다. 훌쩍 커 버린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면 아이가 불쑥 머리를 내밀곤 한다.
내면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평생 자라지 않는 마음속 어린아이다. 호수 안 잠긴 돌처럼 마음 속 깊이 넣어두고 사느라 과거 상처나 아픈 기억을 잊고 산다. 살다 보면 가끔 스멀스멀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경험을 하곤 한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와 내면 아이를 간직한 어른은 비슷한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른들 안에는 아이가 산대>는 그림책이다 보니 삽화가 많다.
- 땡땡이 스타킹을 좋아하는 발레리나
- 야구모자가 잘 어울리고 미소가 멋진 아이
- 근육질의 운동선수
- 엄마처럼 뾰족구두를 신은 모습
각자 갈 길 가느라 바쁜 어른들이다. 서로 앞만 보고 간다. 그들은 어른이 되어도 어릴 적 꿈을 안고 살아간다. 가슴 속 한켠에 묻고 가끔 꺼내 볼 것이다. 이런 적도 있었구나, 하며 추억을 더듬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모습을 타인에게 들킬까 봐 종종 두려울 때가 있다. 그 중 우산을 쓴 모습에 오래 눈길을 끈다. 억압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방어기제(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 의식이나 행위)라고 한다.
어른들의 내면에 꽁꽁 숨겨진 어린아이
어른들은 과거를 잊은 채 잰걸음으로 갈 길을 재촉한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숨바꼭질하듯 꼭꼭 숨겨 놓는다. 우산은 내면을 숨기고 싶은 자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아이들이 새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어른들도 갖고 싶은 것이 많다.
다만 잘 참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회사에 가면 상대방을 얕잡아 보거나 무시하는 못된 내면 아이가 있기도 하다. 분노에 가득 차 손가락질하기도 한다. 고슴도치 가시처럼 뾰족한 말로 상대방 어깨가 움츠러들기도 한다.
이 책을 통해 즐겁고 재미났던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부모가 되어 이 책을 아이와 함께 읽다보니 자식들 키우느라 애쓴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어른이 된 내가 어린시절의 나를 만나 안부를 묻는 시간이었다. 책 속 삽화를 보며 내 안에 있는 내면 아이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약속해 줄래? 네 안의 아이를 언제나 아껴주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겠다고. 왜냐하면, 그 아이는 네가 어른이 되는 것을…. 훨씬 재미있게 만들어 줄 거거든!"(본문 중에서)
책은 따스한 그림과 짧은 글로 구성된 그림책이다. 원서는 <Inner child>이다. 저자 헨리 블랙쇼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디자인 관련 직업)로,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 거주한다. 영국 런던에서 공부를 마친 후, 자신만의 작품을 그리면서 어린이 책을 출간하고 있다. 옮긴이 서남희는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시리즈를 쓰고 <아기 물고기 하양이>시리즈, <동그라미>, <내 모자 어디 갔을까?>, <슬픔이 와도 괜찮아>등 수많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멋진 어른을 꿈꾸는 아이와 퇴근 후 지친 부모가 잠자리에 도란도란 책 읽으며 아이와 멋진 어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화순매일신문에 실립니다. 네이버블로그(mjmisskorea, 북민지) "애정이넘치는민지씨"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