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담양의 용추골에서 발원한 극락강과 장성에서 발원한 황룡강이 합류하여 남도의 젖줄 영산강의 본류가 시작되는 곳. 광주광역시 광산구(光山區)는 5개 자치구 중 하나로 광주 전체 면적의 절반에 가까운 땅을 차지하고 있다. 약 43만여 명의 내국인과 외국인들이 서로 어울려 정겹게 살아가는 다양성의 고장이다.
동으로는 서구와 북구, 서쪽으로는 전남 함평군과 접하고 남으로는 남구와 전남 나주시와 경계를 이룬다. 북쪽은 전남 장성군과 이웃하고 있다. 도시와 농촌의 모습이 공존하는 전형적인 도농 복합 지역이다. 광주 공항과 KTX 송정역 있어 광주와 전국을 이어 주는 중심 허브 역할을 하는 광역 교통의 요지다.
역사적으로 광산구는 끊임없이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진 지역이다. 1895년까지 광주군(光州郡)으로 내려오다 1935년에 광주읍이 광주부(光州府)로 승격됨에 따라 전라남도 광산군으로 개편되면서 광주부와 분리되었다.
1963년부터 송정읍을 포함하여 아홉 개 면을 관할하던 광산군은 1986년 송정읍이 송정시로 승격되면서 전라남도 송정시와 광산군으로 나뉘었다. 1988년 송정시와 광산군은 광주직할시에 편입되어 '광산구(光山區)'가 되었고, 광주직할시는 1994년 광역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시대에 따라 부침을 겪어온 광산구에는 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많다. 흔히들 광주를 예향·의향·미향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광산구와 연관이 깊다.
조선시대 호남 시단의 종장이며 평생 불의에 맞서며 광주정신의 뿌리가 된 눌재 박상과 호남 성리학을 재정립한 고봉 기대승, '쑥대머리'로 유명한 국창 임방울, 우리나라 순수시의 개척자 용아 박용철 시인은 이곳 광산구에서 배출한 인물들이다.
구 한말 광산의 의병들은 의로운 산, 용진산과 어등산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일제와 항전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끝까지 항거하며 민주주의를 지켜낸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 열사 또한 이곳 광산에서 나고 자랐다. 이들의 흔적은 오롯이 남아 광주의 문화유산이 되었다.
일제의 '신사'와 민족혼이 공존하는 '송정공원'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14년 대전에서 목포를 잇는 호남선이 전면 개통 되면서 광주군 송정면 송정리에 기차역이 탄생하게 되었고 '송정리'는 명실상부 광산의 중심이 되었다. 지금도 광산구 하면 바로 송정리가 떠오를 정도로 한 몸으로 묶여 있다.
광산구 송정리에는 광산의 지역문화를 한눈에 이해하고 상징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옛 공원이 있다. 송정공원이다. 광주·송정간 경계를 이루는 극락교 다리 밑으로 영산강이 휘돌아 나가고 강이 만들어낸 너른 들판 사이에 아담하게 솟아오른 산이 있다. 예부터 신령스러운 땅으로 여겼던 금봉산 자락에 송정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3·1절을 며칠 앞둔 2월 22일 송정공원을 찾았다. 때 이른 봄바람에 목련은 보송보송 솜털 가득한 꽃망울을 한껏 부풀리며 금방이라도 터질 기세였다. 까맣게 죽어 있는 듯한 나무들도 세차게 물을 뿜어 올리며 봄의 생기를 더하고 있다. 여느 도심공원처럼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기를 두거나 여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송정공원은 광주공원처럼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근대 도시공원이다. 금봉산 전망대로 이어진 산책 코스와 도서관이 있어 주민들이 휴식공간과 문화 충전소로 널리 애용하고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잔재와 그에 저항한 민족혼이 서린 항일유적들이 공존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공원에는 '금선사'라는 사찰이 있다. 금봉산 정상 팔각정으로 올라가는 높은 곳 송정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명당자리에 있는 이 절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세운 '신사(神社)'였다.
신사란 일본인들이 자기 왕실의 조상이나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이다. 한국인을 일왕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만든다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참배를 강요했다. 송정공원에 있는 신사는 1922년 신명신사로 건립되었다가 1941년 송정신사로 승격되었다.
이 신사는 현재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목조신사로 알려졌다. 신전과 제단 음식을 장만하는 신찬소는 헐리고 신도들이 참배하는 배전 건물과 사무소만 남아있다. 해방이 되고 1948년 학교법인 정광학원이 인수하여 대한조계종 산하 금선사 대웅전과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양쪽에 서있는 석등릉 역시 신사의 부속 시설물이다. 계단 좌측 돌기둥에 선명하게 새겨진 '대정 13년(大正十三年)'이라는 연호는 1924년에 지어졌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여느 건물과 비슷하여 일본 신사였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옆으로 살짝 돌아보면 일본식 건축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옆에서 보면 맞배지붕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앞쪽이 길고 완만하게 내려오는 반면 뒤쪽은 짧다. 이런 형태는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 양식이다.
광주광역시에서는 지난 2020년 옛 신사건물인 이곳에 '단죄문'를 세웠다. 단죄문(斷罪文)이란 친일 인사의 친일 행적과 범죄 사실을 적시하고, 일제 잔재 시설물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과 함께 친일 잔재물로 분류한 이유 등을 적어놓은 글이다. 불행한 역사를 후손들에게 알리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금선사와 송정 도서관 사이에도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기 위해 세워진 일본식 충헌탑이 서 있다. 지금은 '나무아미타불탑'으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황국신민서사탑'이었다. 탑의 중앙에 '황국신민서사'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1951년에 지워지고 '나무아미타불'로 바뀌었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란 1930년대 후반 일제가 국민정신을 함양시킨다는 명목으로 조선인들에게 암송하도록 강요하는 일종의 맹세다. 정사각형의 탑신이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좁아지며 모서리가 삼각형 형태를 취하는 전형적 일본식 충헌탑의 모습이라고 한다. 탑을 받치는 기단석 역시 일본의 성 모습을 연상케 한다. 탑 뒷면에는 무언가 지워진 흔적이 있다.
송정공원에는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인 일제의 잔재뿐만 아니라 그들에 항거했던 순국선열들의 항일 정신이 빛나는 유적들도 있다. 황국신민서사탑 바로 옆에는 구 한말 용진산과 어등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나주, 광산 의병들의 투혼을 기리는 의혼비와 의병대장 금제 이기손 의적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기손 장군은 광산구 본량동 출신으로 나주 광산을 대표하는 의병장이다. 용진산 전투를 비롯하여 호남 곳곳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민족의 한을 '판소리와 시'로 달래주던 국창 임방울과 용아 박용철
송정공원에는 광산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들을 기리는 공간도 조성되어 있다. 공원입구에서 금산사로 가는 길 중간에 판소리의 트레이드 마크인 '북과 부채'를 형상화한 모던한 스타일의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고장 출신 국창 임방울을 기리는 기적비다.
일제치하 우리 민족의 울분을 판소리로 달래주던 임방울(1905~1961)은 이곳 송정리 수성부락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박재현에게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웠고 스물여섯 살 때 서울에서 열린 전국 명창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하며 국악무대에 나섰다.
동일창극단과 함께 무대에서 피를 토하며 57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평생을 국악진흥에 힘썼다. 일본에서 취입한 춘향가의 '쑥대머리' 음반은 한국을 비롯한 일본과 만주에서 100만 장 이상 팔렸다. 식민지 백성들은 그의 판소리를 들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편곡과 작곡에도 재주가 많아 '호남가'와 '사발가'를 작곡했다.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리는 도로인 '임방울대로'가 있다.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에 은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국창 임방울 선생이 판소리로 망국의 한을 달래주었다면 식민지 설움을 순수한 모국어로 달래준 시인도 있다. 임방울 명창과 같은 시기 송정리에서 태어난 용아 박용철(1904~1938) 시인이다. 그의 시비 또한 이곳에 있다.
임방울 기적비를 지나 언덕배기에 이르면 하얀 배모양의 화강암에 동판으로 부조된 시인의 초상이 걸려있는 아름다운 시비릍 만나게 된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가 새겨져 있다.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 시는 식민지 시절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춘들의 설움을 묘사했다.
100여 년 전 암울했던 시기 용아는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 문학을 완성시킨 민족문예운동가였다. 이데올로기를 지양하고 김영랑, 정지용, 변영로 등과 함께 시문학파를 결성해 순수시를 추구하며 민족 정서를 고양시켰다.
1938년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요절했다. 생전에 자신의 작품집을 내지 못했다. 사망 1년 후 <박용철 전집>이 시문학사에서 간행됐다.
이렇듯 광주 송정공원에는 역사상 가장 아픈 시기였던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애환이 고스란히 숨 쉬고 있다. 이번 3·1 절에는 역사의 현장인 송정공원을 돌아보며 그날의 의미를 돼 새겨 보는 건 어떨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역사를 잊는다면 미래 또한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