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과 북촌 마을을 지나 율곡로로 따라가 보면 또 다른 조선시대의 궁궐이 보인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자 조선 궁궐의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한 창덕궁이다. 태종을 비롯한 조선 왕들은 돌과 건물들로 가득한 경복궁보다는 자연과 조화로운 창덕궁을 선호했는데, 창덕궁의 빼어난 후원이 이를 잘 말해준다.
창덕궁 바로 옆에는 성종이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창건한 창경궁이 있다. 영조와 정조가 주로 지낸 곳인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장소도 바로 여기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대다수 전각들을 부수고 일본식 건물, 벚꽃과 동물의 유원지로 전락한 안타까운 역사를 겪다가 최근 다시 본모습으로 서서히 돌아오는 중이다.
요즘에는 담장으로 서로 구분된 궁궐이지만, 한때는 동궐(東闕)로 붙어있던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가 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 창덕궁
창덕궁은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가깝다. 역에서 3번 출구로 나와 율곡로를 쭉 따라가면 왼편에 돈화문이 보인다. 서울 아래 전국 각지에서 차량으로 오는 경우 한남대교를 건너 남산1호터널을 지나 삼일대로를 따라가면 안국역이 보인다. 그리고 역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좌편에 보인다.
돈화문에 들어가니 이곳이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았다는 기념 비석이 보인다. 조선 궁궐에서는 유일한데, 경복궁과 달리 정전이 출입문에서 정면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정전인 인정전으로 가려면 오른편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을 거친 다음 다시 왼쪽으로 꺾어 인정문을 지나야 볼 수 있다.
인정전 외관을 경복궁 근정전과 비교하면 몇 가지 다른 점이 보인다. 용마루에 꽃무늬들이 보이고, 문들이 황금색으로 이뤄진 게 눈에 띈다. 꽃무늬는 바로 대한제국의 황실문장인 자두꽃이다. 하긴 조선 왕실 전주 이 씨의 이(李)가 옛 자두의 이름인 오얏을 의미하니까. 그리고 순종 때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겨서 황제의 색을 정전에 입힌 것이다.
인정전 내부도 황금색으로 가득하다. 그뿐만 아니라 창덕궁이 세월에 따라 변화했음을 알 수 있는 것도 몇 가지 보이는데, 서양식의 들어서 내는 창, 황금 커튼과 수많은 전등이다. 오늘날 인정전은 순조 3년(1803)에 화재로 이듬해 다시 지은 것이 이어진 200년 남짓의 역사지만, 왜란 이후 버려진 경복궁 대신 정궁 정전으로 쓰였기에 조선 후기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장소다.
오른편에는 왕의 집무실이자 조선 궁궐의 유일한 청기와 건물로 남은 선정전, 다시 오른쪽에는 또 다른 왕의 편전과 왕비의 침전인 희정당과 대조전이 있다. 남북으로 연결된 경복궁과 달리 정전 동편에 자유분방하게 놓인 구조다. 그 이유는 창덕궁이 북악산 응봉 아래 위치한 언덕배기 지형이라 이를 존중하여 조화롭게 건물을 배치해서 그렇다.
희정당 입구를 자세히 보니 전통 전각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다. 아, 희정당과 대조전은 1917년에 불타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을 헐고, 이곳으로 이전해서 1920년에 재건했다는 내용이 기억난다. 특히 입구에 아치형으로 깔린 돌 블록과 입구에 돌출된 지붕이 눈에 띄는데, 자동차에서 내려서 건물로 바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누군가는 조선 시대의 본모습으로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하지만, 순종과 순종효황후가 머문 흔적도 있어서 그대로 놔두자고 말하는 이도 있다.
희정당 뒤 대조전을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공사 중이었다. 대신 인정전 왼편에 빽빽한 건물들을 보러 가기로 했다. 건물들 현판을 보니, 규장각(奎章閣), 옥당(玉堂), 약방(藥房), 예문관(藝文館) 등의 현판이 눈에 띄는데, 궁궐 내 있던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다. 건물이 바란 흔적이 없는데, 일제에게 헐린 후 1991년 복원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개방되어서 그렇다.
옥당은 문서 보관과 자문 및 학술 기관이었던 홍문관을 말하고, 약방은 말 그대로 궁궐 내의원을 의미한다. 예문관은 조선 왕의 말과 명령을 담은 문서를 작성한 곳이다. 규장각은 정조가 세운 조선 왕실 도서관인데 실제로 주변에 책고(冊庫) 건물이 몇 있다.
규장각의 도서는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일부는 왕실로, 나머지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다. 이후 왕실의 도서는 오늘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으로, 경성제국대학은 미군정 때 국립서울대학교로 흡수되면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이어진다.
낙선재와 후원
희정당 옆 세자의 공간인 성정각과 관물헌을 지나면 왼편으로 후원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하지만 후원 관람을 시작하려면 20분쯤 기다려야 했기에 아래에 보이는 고택으로 들어갔다. 이름은 낙선재. 원래는 세자의 공간이었지만, 헌종이 사랑했던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지었다. 후사를 기대했지만, 헌종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면서 낙선재가 비게 된다.
그러다가 이승만이 4.19로 하야한 후, 순종효황후, 덕혜옹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귀국하면서 거처했다.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가 마지막으로 1989년에 세상을 떠난 후, 조선시대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며 오늘에 이른다.
이제 시간이 되어 후원으로 갔다. 걸어가 보니 궁궐 뒤가 언덕배기라는 게 실감이 된다. 조금 올라가다 보니 겨울철 물안개로 가득한 연못 부용지와 그 뒤로 커다란 2층 누각인 주합루(宙合樓)가 보인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기득권을 견제하고 문예를 부흥하기 위해 지었는데, 1층은 규장각, 2층은 열람실로 이뤄졌다.
그런데 규장각이 창덕궁에 왜 두 군데나 있을까? 사실 주합루가 정조 규장각의 첫 공간이다. 그러다가 책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자, 인정전 서편으로 이전한 것이다. 이곳에는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활동했었는데, 워낙 주합루 경관이 빼어나서 빽빽하고 숨 막히는 궐내각사로 규장각을 이전하는 것을 아쉬워한 문관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주합루를 지나면 한반도처럼 생긴 연못이 있는데, 승재정과 관람정이 마주 보고 있다. 그 위로 육면으로 된 정자인 존덕정이 있는데, 인조 22년(1644)에 창건되어 오늘날까지 손상 없이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안에는 현판이 하나 보이는데, 정조가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다. 사람 각자의 모습과 기량에 맞게 대하는 것이 군주의 태도라는 내용인데, 문인들을 소중히 여긴 정조의 삶을 축약해 주는 글이기도 하다.
존덕정에서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면 또 다른 고택 하나가 보인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아버지와 어머니 순원왕후를 위한 잔치를 베풀고자 지은 연경당이다. 이후에도 특별한 날 신하들이 임금께 술과 음식을 올리고 예를 표하는 진작례를 거행했다. 효명세자가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요절한 후, 그의 아들인 헌종이 어진을 모시다가 철종 때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된다.
창경궁
후원을 거닌 후 다시 후원 입구로 가면 오른편으로 빠지는 길이 보이는데, 창경궁으로 가는 길이다. 지금은 담장으로 공간이 나뉘어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창덕궁과 연결되어 있어서 두 궁을 동궐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모신 수강궁이 있었던 곳을 성종이 세 대비를 모시면서 별궁으로 지은 것이 창경궁이다.
언덕을 내려가자마자 통명전과 양화당이라는 두 전각이 보인다. 통명전은 세 칸의 마루를 중앙으로 동서로 온돌방이 있는 형태인데,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게 특징인데, 경내에서 가장 으뜸가는 침전이다. 옆에 있는 양화당은 삼전도의 굴욕 이후 인조가 거처하여 신하들과 청나라 사신들을 접견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양화당 동쪽에는 두 건물이 모여 있는데, 왼쪽은 집복헌, 오른쪽은 영춘헌이다. 집복헌은 원래 후궁들의 처소였는데,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자는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 후자는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소생이다.
영춘헌은 정조가 창경궁에 있을 때 집무실과 서재로 이용했던 주 무대였다. 편전보다는 좀 더 격이 낮은 건물에서 주로 지냈다는 게 흥미로운데, 후대 왕들도 정조를 본받고자 여기서 정사를 보고 책을 읽었다. 하지만 스트레스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종기가 악화하여 49세의 생애를 이곳에서 마감했다.
북동쪽 성종의 태실과 한국 최초의 대온실을 관람하고, 다시 왔던 길로 돌아오니, 또 다른 전각들과 누정이 보인다. 성종의 생모 인수대비와 인현왕후의 무대이자 혜경궁 홍씨가 정조를 낳고 한중록을 썼던 경춘전과 의녀 대장금이 중종을 치료하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훈련했던 환경전이다. 누정은 임금이 과거 합격자들을 만나고, 신하들과 경전을 논했던 함인정인데, 영조와 정조 때 활발히 사용했다.
함인정 왼편 빈양문으로 들어가면 드디어 궁의 정전과 편전 영역이 나온다. 왕의 집무 공간이었던 편전은 공식장소인 문정전과 일상 장소인 숭문당으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가면 편전보다는 국상이 있을 때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많이 활용되었다. 숭문당도 원래는 신하들과 경연을 하는 공간이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상례가 진행될 때 곡하는 곳이었다.
영조 때에는 문정전 앞마당에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비극이 발생한 곳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도 수난이 이어졌는데, 유원지 창경원으로 바꾸면서 1930년대에 헐린 아픔이 있었다. 그러다가 198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문정전 동북으로 가면 드디어 정전인 명정전을 마주할 수 있다. 그런데 정전의 경우 보통 남향인데, 이곳은 동향인 것이 특징이다. 태종이 창건할 때도 광해군이 재건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남향으로 하면 경복궁, 창덕궁, 종묘를 보호하는 지맥을 잘라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 그랬다.
또한 1층 전각이라 상당히 단출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둥과 목재를 보면 상당히 색이 바래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창덕궁 선정전과 함께 임진왜란 직후 건축 형태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건축물을 연구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국보 제226호이기도 하다. 주위로 행각이 둘러 있는데, 일제가 창경원으로 만들면서 철거당했던 아픔을 겪다가 1986년에 복원했다.
조선 태종이 한양으로 다시 돌아오며 지은 창덕궁. 자신의 경복궁에서 일으킨 왕자의 난 때문에 그런지 그는 경복궁에 가지 않고 새로 궁궐에 거처했다. 물론 아들인 세종은 다시 태조가 지은 궁궐로 돌아갔지만, 대다수 후대 왕들은 질서 정연한 경복궁보다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풍경이 좋은 창덕궁을 선호했다. 그래서인가 임진왜란 이후 가장 먼저 재건되어 조선 후기 왕조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창경궁도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같이 했다. 특히 영조와 정조와 사연이 많은 곳이기도 한데, 혜경궁 홍씨는 경춘전에서 사도세자의 비극을 한중록에 기록했다. 아들 정조도 영춘헌에서 정사와 독서에 힘썼던 곳이고. 일제가 이곳을 동물원으로 만들고 벚꽃 장소로 전락시킨 아픔도 있었지만, 다시금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질서 정연한 경복궁을 이전에 봤다면, 이번에는 좀 더 자유로운 모습의 동궐을 감상하는 것은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 동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