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동은 1949년 6월 12일 보성중학을 제39회로 졸업했다. 남쪽에 이승만 정부, 북쪽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는, 양단된 상태에서 김구·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정계를 떠났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대통령, 이시형이 부통령에 취임하였다.
백범이 별세하기 꼭 두 주일 전 아들 자동이의 보성중학교(6년제)의 졸업식이 있었다. 백범이 기꺼이 그 졸업식에 참석하여 축사까지 맡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자동이를 가리켜 "내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학생"이라고 해서 졸업식장에 있던 성엄이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 적이 있었다. (주석 6)
보성중학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서원출 교장이 나를 불렀다. 졸업식 때 백범을 모시고 싶으니 날더러 힘(?)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일개 중학교 졸업식에 백범을 모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서 교장은 아버지와도 인사를 나눈 사이여서 우리 집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통해 부탁을 드렸더니 백범이 흔쾌히 허락했다.
졸업식날 백범이 식장에 오셔서 축사를 해주셨다. 백범은 축사 중에 "졸업생 중에 내 친자식과 같은 학생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이날 귀빈 중에는 백범 외에도 보성중학 졸업생인 윤기섭, 김붕준, 엄항섭 선생 등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내가 백범을 본 것은 이날이 마지막이었다. (주석 7)
이승만은 독립운동 공적으로 치면 백범 김구나 우사 김규식 그리고 몽양 여운형에 비해 한참 뒤진 편이다. 백범과 우사가 분단정권에 참여를 거부하고, 몽양이 1947년 7월 10일 암살당하면서 정권은 그의 차지가 되었다. 집권 후에도 생존 두 지도자의 존재는 그를 불안케 만들었을 것이다. 독립운동의 콤플렉스였을 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충성분자들은 주군의 심기를 꿰찬다.
1949년 6월 6일 국립경찰을 장악한 친일파 출신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특위 위원들을 연행·감금하고 자료를 탈취했다. 이에 앞서 5월 20일에는 반민법 제정과 통일정부 수립론에 앞장선 진보성향 국회의원들을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엮어 구속했다.
미 국무성이 5월 28일 주한미군을 6월말까지 철수한다고 성명을 하는 등 국가안보가 위급한 상태에도 이승만 정권은 정적제거에만 혈안이 되었다. 6월 26일 항일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 김구가 이승만 대통령 충성분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1949년 6월 26일, 악몽의 그날, 나는 돈암동 전차 종점에 있었다. 하필 배탈이 나서 화장실이 급해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만난 보성중학 박 모 영어 선생이 내게 말했다.
"백범이 괴한이 쏜 총을 맞고 돌아가셨다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얼른 집으로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경교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한독당 당사에 나가고 집에 없었다.
서대문 경교장에 도착해보니 주변은 이미 인산인해였다. 경교장 문 앞에 이르기도 전에 길거리에서부터 경찰이 접근을 막았다. 인파를 비집고 겨우 문앞에 도착하자 백범 경호원 윤경빈씨가 우리를 알아보고 들여보내주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백범이 얼굴을 붕대로 감은 채 마치 잠을 자듯이 누워 있었다. 일생을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우리 민족의 지도자요, 내가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던 백범 김구 선생. 그 백범이 일본인도 아닌, 해방된 조국에서 동족의 총을 맞고 쓰러져 그렇게 누워 계셨다. 엄연한 현실 앞에서도 백범의 죽음을 쉬 인정하기 어려웠다.
나는 한동안 선생의 시신 앞에 꿇어 엎드려 한없이 눈물을 쏟았다. (주석 8)
주석
6> 정정화, 앞의 책, 295쪽.
7> <회고록>, 222~223쪽.
8> 앞의 책, 22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