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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가 올록볼록했다. 돌기들이 만져졌다. 점자였다. <거기 눈을 심어라>고 쓰여 있었다. 장애에 관한 책은 물론이고 장애인 당사자의 글을 보는 일은 부끄러움을 동반한다. 엄연한 사회의 구성원이지만, 이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무지가 면목 없어서다. 시각 장애인 M. 리오나 고댕이 쓴 이 책도 그랬다.
 
 거기 눈을 심어라 - 눈멂의 역사에 관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탐구, M. 리오나 고댕(지은이)
거기 눈을 심어라 - 눈멂의 역사에 관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탐구, M. 리오나 고댕(지은이) ⓒ 반비
 
M. 리오나 고댕은 시각 장애인이다. 대부분의 장애가 그렇듯 그도 선천적 장애는 아니었다. 열 살 무렵 갑자기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해 차츰 사라졌다. 지금은 약간의 빛을 느끼는 정도다. 시력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좌절이 찾아왔지만, 당사자로서 시각장애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도 그 산물 중 하나다. 그가 오랜 시간 탐구한 '눈멂'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좇아가보자.

비장애인이 연기하는 '장애인다움'

얼마 전 상영한 영화 <올빼미>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침술사가 '맹인'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그의 눈앞으로 갑자기 침이 겨눠진다. 그의 눈동자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완전한 '맹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은 '맹인' 진위를 확인하는 절차로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에 차용된다. 저자는 바로 이런 장면들을 비장애인이 장애에 대해 얼마나 몰이해한 지경인지를 증명하는 클리셰로 진단한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맹인'이라고 눈앞으로 뭔가가 들이닥치는 감각을 못 느낄까. '맹인'이어도 당연히 뭔가가 눈 쪽으로 엄습해 온다면, 눈동자를 깜박이거나 움직임이 느껴지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비장애인은 '맹인'의 눈동자가 요지부동일 때 '맹인답다'고 여긴다.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선 참 어이없는 무지라 한다.

만일 이 장면을 시각장애인이 직접 연기했다면 어땠을까. 흔들리는 동공을 보인 그의 연기는 '맹인'답지 않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시각장애인 배우가 시각장애인 답지 않다고 여겨져 배우로 캐스팅되지 않는 웃픈 현실은(저자도 시각장애인 역할 오디션에 수없이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무엇을 반영하고 있을까. 콘텐츠 속 장애인 다움은 철저히 비장애인이 주조한 장애인 상이라는 의미다.

이런 면에서 지난해 방영해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등장한 다운증후군 김은혜 배우가 성취한 '배우됨'은 함의하는 바가 크다. 그는 장애인이 얼마든지 배우로서의 자질이 있음은 물론, 장애인 당사자가 펼치는 연기를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장애인의 삶에 직접 다가가는 경험을 주었다. 장애인 배우가 더 많이 더 자주 콘텐츠에 등장할 때, 우리는 장애 또한 삶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헬렌 켈러에 대해 '겨우' 아는 것

시각 장애인에 대해 가지는 고정관념을 가장 많이 고착화당한 사람은 단연 헬렌 켈러일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열병으로 청각과 시각을 모두 잃고도 지성인이 된 영웅이 아닌가. 하지만 그가 영웅으로 존재했던 시간을 생각해 보면 어딘지 이상하다.

그의 영웅화는 딱 그 시점, 장애가 생긴 후 언어를 깨치고, 구어를 획득하고, 시각장애인 처음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시기, 이른바 장애 극복 시나리오가 완성되는 시기까지다. 그 이후의 헬렌 켈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영감 포르노(장애인들을 '불쌍한 존재'나 '감동을 주는 존재' 정도로 생각하게 만든다는 의미)'에 도취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헬렌 켈러의 삶은 오히려 시나리오 이후가 더 열정적이고 영웅적이지만 알려진 게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가 여성 참정권 운동과 노동자 권리 옹호에 나섰으며, 사회당 당원이자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 창립 회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는 장애인에 대해 비장애인 알고 싶어 하는 관심사가 딱 거기까지임을 시사한다.

시각장애인인 저자가 헬렌 켈러의 영웅담 이후의 삶, 곧 성인 장애인으로서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고 꾸려나간 삶에 더 집중한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헬렌 켈러의 장애 극복이 무의미해서가 아니라, 장애인도 먹고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헬렌 켈러는 장애 극복을 미화하는 강연 등에 끊임없이 불려나갔지만, 정작 그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것이 보드빌 공연(지금의 버라이어티쇼와 유사하다)에 선 이유였지만, 사람들은 그가 천박한 무대에 섰다고 경멸했다.

영웅도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를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영웅이 영웅답지 않다고 판단될 때, 사람들은 가차 없는 백래시로 영웅의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장애에 대해 너무 모른다, 우리는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한 장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한 장면. ⓒ 싸이더스
 
영화로도 만들어진 책 <눈먼 자들의 도시>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을 다룬다. 재앙은 다름 아닌 전 인류가 시각 장애를 가지게 된 것. 재앙을 입은 사람들은 절망으로 이성을 잃고 대혼란에 빠지고, 비장애인으로서는 하지 않았던 비행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이 영화의 가장 불쾌했던 전제는 시각 장애인이 된 후 인류가 비윤리적으로 변한다는 데 있다. 당연히 갑작스런 재앙은 혼돈과 좌절을 가져오겠지만, 그렇다고 모두 광인이 된다는 전제에 동의할 수 있을까. 저자의 문제 의식은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비장애인에게 '눈멂'이 재앙으로 설정되었다는 건, '눈멂'을 살아가지 못할 삶의 조건이라고 믿는다는 의미다. 자신들의 삶이 살아갈 수 없는 무엇으로 간주된다는 것에 시각장애 당사자들이 느끼는 감정은 불쾌함 이상이다.

'눈멂'이 참혹하기 이를 데 없고, 극단적 비극이고, 자살을 불러오고, 인간성을 망실할 정도로 반사회적인 존재의 형식이라고 전제된다면, 이들은 스스로를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무엇으로 느끼도록 압박당하지 않겠는가. 이들에게 시각 장애는 단지 다른 육체의 조건일 뿐인데 말이다.

물론 <눈먼 자들의 도시>의 '눈먼'은 탐욕적이고 부정의하고 몰지성적인 인간 군상을 빗댄 은유다. 그러나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이런 은유는 그들의 삶이 번번이 왜곡되는 경험으로 작용한다. '눈멂'은 성서나 고전(<일리아드> <오디세이아> 등)부터 지금까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너무 많이 불려 다니며 의미를 부여받았다.

눈이 안 보일 뿐인데, "남달리 순수하거나 초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이상화되거나, 아니면 서두르거나 부주의한 사람으로 측은하게 여겨진다." 누가 자신의 삶이 타인에 의해 함부로 규정되기를 허락하겠는가.

비장애인이 제시하는 '눈멂'이 원형이 되면, 시각장애인들이 겪는 매일이나 사건은 쉽게 부정당하고 매우 시시한 서사가 되고 만다. 이들이 "시각장애인에게 장애보다 훨씬 위협이 되는 것은 눈멂에 대한 인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시각 장애인에 대한 불편한 은유뿐 아니라 이들의 삶의 현장도 심각히 왜곡되어 있다. 시각 장애가 생기면 모두 죽고 싶거나 미치거나 그만큼 불행하다는 믿음 말이다. <우리의 사이와 차이>를 쓴 지체 장애인 얀 그루에가 "그들은(비장애인들) 내가 아직도 살아있음에 놀란다"고 썼을 만큼, 비장애인의 섬뜩한 시선은 이들을 곤경에 빠뜨린다.

장애는 물론 고통이다. 하지만 힘든 시간을 통과하며 차츰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면서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이들을 '영웅' 신화에 가두어 두는 것도, 동정받아 마땅한 '맹인'이라고 여기는 것도, 모두 거두어 수정해야 할 비장애인이 그린 일그러진 초상이다.

나는 장애에 대한 나의 무지와 몰이해를 저자가 쓴 이 구절에서 정신 번쩍 나게 깨우쳤다. "'맹목(盲目)적'이라는 단어를 맹목적으로 생각 없이 사용하지 마세요!" 내가 사용한 이 언어가 그들의 자긍심을 떨어뜨렸다. 반성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거기 눈을 심어라 - 눈멂의 역사에 관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탐구

M. 리오나 고댕 (지은이), 오숙은 (옮긴이), 반비(2022)


#<거기 눈을 심어라>#장애 극복 서사#시각장애#장애#눈 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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