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시민기자들이 쓰는 달콤살벌한 순도 99.9%의 현실 직장인 이야기.[편집자말] |
학창 시절, 4교시 수업을 마치고 맞이하는 점심시간은 꿀맛이었다. 머리도 식히고 친구들과 대화도 하고 게다가 맛있는 급식이라도 나오는 날이면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공부로 점철된 고단한 학생의 삶에서 맛있는 급식과 점심시간의 수다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즐거움이었다.
직장인이 되었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탄수화물의 마법인지, 업무로부터의 빠져나옴 덕분인지 몰라도 점심시간의 기분전환은 하루를 지탱하는 활력이자 직장생활을 지속하게 해주는 충전기와 같다.
회사에서 누리는 온전한 당신의 한 시간
대다수 직장인이 회사에 출근해서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 1위는 퇴근시간, 2위는 점심시간이 아닐까? 점심시간은 단순히 밥만 먹는 시간이 아니다. 업무에서 잠시 벗어나 동료들과 즐거운 수다를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개인이 하고 싶은 활동을 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기도 하다.
점심시간이 소중한 이유는 또 있다. 객관적으로 거저먹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은 원칙적으로 근로시간이 아니다. 너무 당연한 말을 새삼스럽게 한다고? 하지만 보통 점심시간이 근로시간이 아니란 사실이 곧 유급시간이 아니란 말임을 인지하며 직장 생활을 하진 않는다.
그래서 오전 집중근무 후 찾아온 점심시간이 마냥 반가울 뿐이다. "오 벌써 점심시간이야?" 계속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가 겨우 허리를 펴며 일어난다. 하지만 돈을 받지 않는 시간, 즉 회사에 귀속된 시간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시간임을 인지한다면 그 한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지고 잘 쓰고 싶을 것이다.
「근로기준법」 제54조 ① 사용자는 근로시간이 4시간인 경우에는 30분 이상, 8시간인 경우에는 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을 근로시간 도중에 주어야 한다. ② 휴게시간은 근로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근로기준법 제54조는 근로자의 휴게시간을 의무화하고 있다. 4시간 동안 일했으면 인간적으로(?) 30분은 쉬게 해줘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의 많은 직장들이 9 to 6 또는 10 to 7처럼 하루 8시간 근무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업무를 하다 배고플 즈음, 점심시간 1시간을 휴게시간으로 제공한다(회사에 따라 복지 차원에서 1시간 30분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근로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사업장에서 별도 정한 규정이 없는 경우 휴게시간은 무급이다. 즉, 9시간을 회사에 있지만 8시간만 유급인 근로시간의 개념이고 점심시간 1시간은 무급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월급을 받는 이유는 회사가 이윤을 내는 활동에 우리의 시간을 투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간을 회사에 파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점심시간은 회사에 내 시간을 파는 개념이 아닌 온전히 내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다.
점심시간이 무급이라니, 원래도 소중했던 1시간이 더 소중하고 가치 있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점심시간에 마음껏 자유롭고 마음껏 행복하고 마음껏 쉬고 있는 걸까?
회사 내 나만의 아지트를 찾아서
많은 기업들이 휴게시간을 점심식사 시간으로 쓰지만, 정해진 게 없는 나만의 휴게시간이기에 꼭 점심을 먹을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 직장 문화를 보면 대개는 '팀점'(팀원들과의 점심식사) 또는 동료들과 점심 먹는 문화가 일반적이었지만,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점심시간을 다양한 형태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책을 읽는 사람도 있고, 운동하는 사람도 있고, 강의를 듣거나 산책을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이 어떤 활동이든지 그들에게는 쉼의 개념인 것이다. 점심시간이 근로시간이 아니기에 내가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직장인들이 자신을 위해 온전히 휴게시간을 즐기고 있을까?
이전에는 "점심이나 회식도 직장생활의 연장"이라는 합리화가 만연해 점심시간 개인활동이 자제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회사들이 점심시간 중 업무 하는 것을 지양하고, 조직 생활에 사용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나 역시 바쁜 시즌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샐러드를 먹으며 업무를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밥을 먹으며 동료들과 수다를 떨거나 혼자 책을 읽는 시간으로 활용한다. 점심시간에 대한 전적인 소유권이 보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휴게시간이 보장되었다면 온전히 쉰 것일까? 시간은 결국 공간에서 소비하는 것인데 쉴 수 있는 공간이 보장되지 않으면 사실상 온전히 쉬는 시간을 보내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과연 얼마나 많은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을지 의문이 든다.
좀 지난 2014년 조사이지만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708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아지트' 여부를 물은 결과, 61.1%만이 회사 내에 자신만의 아지트가 따로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많은 수(25.7%)가 화장실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답했다. 그 외에도 건물 밖(14.3%), 직원휴게실(10.2%), 옥상(8.5%) 등의 장소가 나왔지만 화장실이 1위라니 좀 슬픈 현실이다.
물론 조사로부터 9년이 지난 시점이니 그동안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이 올라간 만큼 회사 내 휴게 공간 및 시설에 대한 기대 수준 및 법적 기준이 높아졌고 좋은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회사가 법적으로 강제하는 수준 이상으로 휴게 시설을 제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도 회사에 나만의 아지트를 세 곳이나 갖고 있고, 그중 1위는 사내 도서관이다. 업무에 몰입하다 휴식이 필요할 때 도서관 선반의 책들을 둘러보거나 점심시간에 조용한 도서관에서 눈을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동료 및 주변 지인들에게 물어본 결과,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부분은 휴게 공간은 있지만 근로자 모두가 충분한 휴식을 누리기엔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회사에 완벽한 휴게 공간을 기대하기 어려운 건 알지만 많은 직장인들은 부족한 휴게 시설이 아쉽다.
그래서인지 팬데믹 기간 재택근무를 하면서 점심시간을 휴게시간으로 인지하며 충분히 쉴 수 있었다. 나만의 공간이 보장되어, 남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장소를 찾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1시간을 온전히 쉴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녀가 집에 있어 나만의 시간이 확보되지 않은 직장인이거나 집 환경이 충분히 쉼의 공간을 보장하지 못하는 경우는 다르겠지만.
쉼은 일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아마존 베스트셀러인 <REST>의 저자 알렉스 방은 휴식과 생산성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결과를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과 1만 2500시간의 휴식, 그리고 3만 시간의 잠이 필요하다." 업무 성과를 높이고 창의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양질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1만 시간의 성공 법칙이 놓쳤던 휴식의 가치를 재조명한 것이다.
너무 바쁜 업무와 뒤쳐질까 봐 두려운 경쟁 환경 속에서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못 쉬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의도적인 쉼표를 찍어보자. 나 역시 하루 8시간 근무 중 화장실 한두 번 가는 것 빼고는 모니터 앞을 떠나지 않은 적이 많다.
머리를 싸맨다고 창의적인 기획안이 나오는 것도 아니요, 업무 생산성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지만 막연하게 휴식을 일과 반대되는 것으로 인지해 의식적으로 기피하고 있었다. 이제는 시간의 양으로 승부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
일을 잘한다는 말이 더 이상 일을 더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결과물 또는 그 이상을 만들어내면서 '덜 일하고 더 쉰다'는 의미가 되었다. 실제로 바쁘게 일한다고 성과가 높아지는 게 아니란 생각이 많은 조직들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쉼, 그것은 단순히 일의 부재가 아니다. 개인적 측면에서는 번아웃을 예방하는 장치가 되고 기업 입장에서는 몰입과 업무 능률 제고를 위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제대로 된 휴식이 보장된다면 말이다.
업무 도중 잠깐의 쉼 그리고 법적으로 보장된 휴게시간이자 점심시간, 이것을 잘 활용한다면 회사와 직원 모두의 생산성과 만족도가 높아질 것이다. 이것이 회사 내에 나만의 아지트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이유다. 아직 없다면 적극적으로 쉼의 공간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