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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LP음반이 처음 제작된 때는 1958년 7월이었다. 그 전에도 시중에서 LP음반이 유통되고는 있었지만, 모두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 들여온 수입품이었다. 국산 LP음반 생산에 처음 나선 곳은 뜻밖에도 민간 음반회사가 아닌 정부기관이었는데, 공보실 방송관리국 산하 레코드제작소에서 실무를 담당했다. 민간 제작 LP음반은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볼 때 한 해 늦은 1959년 여름쯤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레코드제작소에서 만든 LP음반에는 'KBS레코드'라는 상표(?)가 붙여졌는데, 당시엔 KBS도 국영방송으로 공보실 관리 아래 있었기에 그런 이름이 쓰였다. 정부에서 만든 음반이라 그런지 초기 KBS레코드에는 <애국가> 같은 국가의례 음악이나 민요, 가곡 등만 수록되었고 저속하다 여겨졌던 대중가요는 배제되었다. 또 수록 내용 관련 표기가 영문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는데, 해외 홍보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예컨대 KBS레코드 첫 음반인 'SERIES No.1'을 보면, 재킷 뒷면 음반 해설이 모두 영문으로 쓰였다. 그리고 김동진과 김성태의 가곡, <도라지타령> 같은 민요가 합창으로 편곡되어 실렸고, 다양한 동요도 서울방송어린이노래회의 합창으로 수록되었다.

그런데 음반 뒷면에 실린 열세 곡 동요 목록을 보면 여타 노래들과는 뭔가 좀 느낌이 다른 제목이 하나 눈에 띈다. 두 번째 곡으로 등장하는 노래의 제목은 <Our President>, 바로 <우리 대통령>이다. 1958년에 제작된 음반에 등장하는 대통령이라면 당연히 이승만이고, <우리 대통령>은 동요 형식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이승만 찬가였다.

당시 이승만에 대한 우상화는 '국부(國父)'라는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일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북에 있는 장군이 '어버이 수령님'이라 불렸던 것처럼 남에 있는 박사도 그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이승만 우상화 작업은 해마다 그의 생일인 3월 26일에 절정을 이루었고, 80회 생일을 맞았던 1955년 이후 점점 더 심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대통령도 사람이니 생일 축하는 당연히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이 사적인 영역을 넘어 공적 행사로까지 확대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956년부터는 이승만 생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었고, 1959년에는 국기 다는 날이 정해지면서 '대통령 탄신날'도 포함되었다. 많은 군중을 동원한 경축 행사는 당연한 일이었고, 1957년부터는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이승만 생일을 기념하는 특식으로 빵 한 봉지가 지급되기도 했다.
 
 이승만 84회 생일 경축식에서 찬가를 연주하는 군악대와 학생합창단
이승만 84회 생일 경축식에서 찬가를 연주하는 군악대와 학생합창단 ⓒ 국가기록원
 
이승만이 여든네 살이 된 1959년에도 그러한 공적 행사는 어김없이 진행되어, 3월 26일 서울운동장에서 대규모 경축식이 열렸다. 그때 군악대와 학생합창단이 이승만 앞에서 연주한 노래가 또 <우리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에게 바쳐진 노래는 행사장에서 불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음반으로까지 제작되었다.

문제의 음반은 KBS레코드 'SERIES No.7'로, 재킷 뒷면에 '제84회 탄신 기념'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1959년 2월이나 3월쯤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음반 앞면에는 <애국가>, <삼일절 노래>, <광복절 노래>, <개천절 노래> 등이 실렸지만, 뒷면은 전부 노골적인 이승만 찬가들로 채워졌다.

<대통령 찬가>(황인호 작사, 김대현 작곡), <만수무강하시리>(김광섭 작사, 김성태 작곡>, <우남 행진곡>(임원식 작곡. 우남은 이승만의 호), <우리 대통령>(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 <여든네 돌맞이>(윤석중 작사, 김순애 작곡)가 그러한 곡들이다. 음반으로만 보자면 이승만 생일이 국경일과 동급이었던 셈이다.
 
 이승만 84회 생일을 위해 기획된 LP음반
이승만 84회 생일을 위해 기획된 LP음반 ⓒ 이준희
 
이승만 찬가들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1955년 생일 또는 그 직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 곡 <여든네 돌맞이>(노래 듣기)는 당연히 1959년 생일을 눈앞에 두고 만들어졌을 것이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하필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일곱 번째 LP음반이 이승만을 위해 기획되었던 것도 예사롭지는 않다. 각하의 무궁한 행운을 기원한다는 뜻이었을까.

하지만 이승만이 생일을 기분 좋게 보낸 것은 1959년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생일은 부정선거 논란으로 세상이 뒤숭숭한 가운데 보냈고, 1961년부터는 대통령이 아닌 망명객으로 타국 땅 하와이에서 쓸쓸하게 생일을 맞았다. 그렇게 다섯 번 생일을 보낸 뒤, 한때 민족의 영도자라 불렸던 독재자는 1965년 7월에 눈을 감았다.

KBS레코드 7번 LP음반이 이승만에게 생일 선물로 전달되었는지, 그가 음반을 직접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문제의 음반 기획이 어떻게 추진되었던 것인지, 그 경위도 지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점들이 분명치 않다 해도 권력자를 우상화하고 그것이 대중의 일상을 조금씩 오염시켜 갔던 것은 틀림이 없다.

수십 년 전 상황이니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 안심할 일은 아니다. 권력 앞에 줄서기 위해 바쳐진 '형광등 100개를 켜 놓은 듯한 아우라( 지난 2011년 12월 1일 TV조선은 개국 첫날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 인터뷰를 진행하며 '형광등 100개를 켜 놓은 듯한 아우라'라는 자막을 내보냈다 - 편집자말)'가 불과 10여 년 전 일이다.

#KBS레코드#이승만#우리 대통령#LP음반#형광등 10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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