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기자말] |
한미리스쿨 '언론인 양성과정' 1기생을 교육하느라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한 달을 보낸 것 같다. 지난 1월 29일 개강해 2월 27일 강연은 끝났지만 취재/기사쓰기 피드백은 계속되고 있다. 한 달 동안 휴일 없이 진행한 초집중 과정이어서 우리 부부는 물론 학생들도 매우 힘들었다.
학생들은 키아오라리조트 카페에서 하루 4~6시간 인문사회 교양강연을 듣는 것 말고도 글쓰기와 취재·기사쓰기 첨삭지도를 받고 사흘에 한번씩 독후감을 제출했다. 마누라는 '1박2일'도 아닌 '29박30일' 삼시세끼 식단을 신경 써야 했다. 학생들 스스로 설거지를 맡겠다고 해 그나마 일손을 덜고 '식사공동체'의 의미를 살렸다.
'차등 원칙'을 적용하는 학교
1기생은 둘을 빼고는 모두 지방대학 출신이었는데, 과정 개설 취지문에 공지한 대로 학력·나이 제한이 없을뿐더러 지방대학과 저소득층 출신, 장애인에게 수학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가점을 준 때문이다. 평등 원칙과 기회 균등 원칙 말고도 존 롤스가 강조한 '차등 원칙'을 적용한 거였다. 롤스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약자에게 이익이 돌아갈 때만 적용할 수 있다'고 했다.
실은 강연을 무료로 해도 나에게 남는 게 있다. 시의성과 수강생 수준에 맞춰 파워포인트(PPT)를 만들다 보면 스스로 연찬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로 만든 ['이야기의 보고' 제주, 뭘 취재할 것인가]는 '탐라학개론'에 해당한다. 30권쯤 읽은 제주학 관련 책의 내용을 정리할 기회이기도 했는데 그동안 실제 보고 듣고 느낀 것으로 해석을 덧붙였다.
제주를 잘못 알고 있는 육지 사람들
제주는 육지 사람들에게 잘못 인식돼온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70년대 중반 국사를 공부할 때 제주 빌레못동굴은 한국의 대표적 구석기 유적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에서 슬그머니 사라졌으니 그 이유가 뭘까? 막상 제주에 와서 제주학을 공부해보니 그 구석기 유적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꽤 있었다.
제주 관련 책을 많이 쓴 이영권은 <새로 쓰는 제주사>에서 1973년 발굴됐다는 구석기 유물 84점이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 재질이라 도구로서 유용성을 의심했다. 주변 하천 바닥에 단단한 강돌이 널려 있는데 굳이 다공질 현무암으로 도구를 만들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그는 유물이란 것들이 동굴 입구에서 900m쯤 안으로 들어간 곳에서 발견된 점도 석연치 않게 생각한다. 구석기인이 칠흑같이 깜깜한 곳에서 생활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제주에 와서 박물관도 두루 둘러보았지만, 구석기 유물은 고고학자들도 자연석인지 인간이 돌을 떼서 만든 도구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데, 내가 한쪽 편을 드는 건 주제넘은 일이다. 다만 '상식'이라는 확증편향에 '의문부호'를 달 때 느끼는 지적 성취감은 있다.
판판이 깨진 '역사의 상식'
신석기 시대에는 인류가 농경생활에 들어갔다는 게 역사의 상식이지만 척박한 제주의 화산재 토양에서는 여전히 수렵채취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고두기 엉덕'은 신석기 말기 유적지로 추정되는데, 곡물 대신 탄화 야생초 열매가 발견됐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유적이라는 게 상식인데 제주도의 고인돌은 철기문화가 널리 퍼진 뒤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잉여 농산물이 생겨야 그것을 차지한 권력자가 거대 건축물을 만들어 자기 권력을 과시하는데 제주에는 그런 권력이 늦게 탄생했다는 게 이영권 등의 설명이다.
탐라인은 왜 '말 키우는 오랑캐' 편을 들었을까
국사 교육에서 '삼별초의 난'은 몽고의 침략에 3년간 저항한 '삼별초 항쟁'으로 승격됐다. 그러나 탐라인에게는 몽고군도 삼별초도 그들을 제압하러 온 고려군도 같은 '외세'라는 인식이 컸다. '탐라'는 원래 '섬나라'를 뜻하는 나라 이름이었는데 '제주'(濟州)는 '물 건너 고을'을 뜻하는, 육지의 지배자 관점 명칭이다. 고려 고종 무렵부터 쓰인 '제주' 대신 명칭만이라도 '탐라'를 회복한 때는 몽고 직할지가 된 1273년이다.
원나라가 망한 뒤 명나라가 말 2천 필을 요구하자 '말 키우는 오랑캐' 곧 '목호'(牧胡)들이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한때 고려 정부군을 패퇴시킬 만큼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최영 장군이 이끄는 2만 5천 정예군이 와서야 제압됐는데, 현지인의 비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목호들은 탐라인과 혼인해 그 자손이 길게는 대여섯 대를 이어간 상황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최영은 잔인하게 난을 진압해 '간과 뇌가 땅을 가렸다'는 목격담이 역사서에 전해온다. 탐라인에게 최영은 '학살자'였고 그런 피해의식은 4.3항쟁을 거치면서 '육지것'에 대한 경계의식으로 굳어진 듯하다. 민족 개념이 희박했던 시대에 어떤 세력이 더 많이 수탈해가거나 비교적 잘 대해줬는지에 따라 탐라인의 호불호가 갈린 것은 당연한 생존 논리였다. 역사는 그 시대, 그 지역민의 눈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섬에 갇힌 제주 학생들의 마음
언론인 양성 과정을 진행하면서 안타까운 점은 제주 출신 학생들 생각이 제주에 갇혀 있다는 거였다. 제주대 언론홍보학과 출신 2명이 입소했는데 그들은 둘 다 언론인 지망생이 혼자뿐이라고 생각했단다. 육지에서는 그 흔한 스터디그룹을 꾸릴 생각조차 못하고 독학을 해왔다. 같은 과 재학생들도 중앙 언론사에서 뽑아줄 가능성이 희박해 모두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는 얘기였다.
'사람은 누구도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라고 한 영국 시인 존 던을 인용하며 "우리는 누구도 홀로 설 수 없고, 서로가 필요하기에 서로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지만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는 모르겠다.
제주는 섬이면서도 섬이 아니다. 섬발전촉진법에도 제주 본도는 포함되지 않는다. 항공요금이 비쌀 뿐 아니라 여객선도 다른 섬에서는 운임 지원을 받지만 제주는 예외다. 택배사들은 제주를 도서지역으로 규정해 추가요금을 받는다. 용산 조명기구상가에서 키아오라리조트 쓰레기 재활용장에 달려고 '분리수거, 당신 오늘 참 예뻐요'라는 문구를 지어 LED 조명등을 주문했다가 화병이 날 뻔했다. 제작에 착수하면 입금하겠다고 했는데 한 달이 넘도록 소식이 없어 재촉하니까 터무니없는 추가요금을 요구했다.
제주는 실제로 1만여 년 전만 해도 섬이 아니었다.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120m쯤 낮았으니 지금 평균 수심 55m인 서해는 육지였고, 제주는 한반도는 물론 중국·일본과 육지로 연결됐다. 빌레못 동굴 등지에서 추운 지방에 서식하던 갈색곰과 큰사슴의 화석이 발견된 것도 제주가 대륙의 일부였음을 말해준다.
제주의 수난은 자연재해를 빼고는 모두가 육지에서 비롯된 거였다. 빌레못동굴 속에도 4.3사건 당시 슬픈 역사가 서려 있다. 토벌대는 굴속에 숨어있던 주민 29명을 굴 입구로 끌어내 학살했다. 토벌대는 귀여운 남자 아이의 발목을 잡고 바위 위에 패대기쳐 죽였고, 엄마와 젖먹이 여동생은 동굴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갔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한 달 과정 끝났는데도 남겠다는 학생들
내가 서울 MBC저널리즘스쿨 강연을 위해 며칠간 스쿨을 비울 때는 PD 출신인 장해랑 전 EBS 사장과 교수 출신인 김동민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 KBS제주의 양호근 영상제작감독과 문준영 기자가 강연과 실습을 맡아주었다. 서울에서 온 앞 두 분은 '교양·교육공동체'라는 스쿨 설립 취지에 공감해 강사진으로 참여했는데, 부부가 함께 와서 키아오라리조트에 사나흘씩 묵은 것 말고는 보상해준 게 없어 미안했다.
학생들은 과정이 끝나 다들 귀가했지만, 몇몇은 다음 주에 다시 와서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길어지면 반년쯤 개인지도를 받고 싶다고 간청했다. 절반도 안 되는 숙박비만 받고 식사도 자주 함께할 작정인데, 제주 학생들에게는 학교 수업이 없는 날 특강을 할 테니 그냥 와서 들으라고 했다.
초집중 과정이 끝날 무렵에는 다들 힘들었으면서도 '해냈다'는 성취감에 만족하는 듯했다. 무엇보다 우울증이 있다고 자기소개서에 고백해 가점을 받고 입학한 학생, 같은 증세가 있다고 상담한 학생 둘이 밝은 모습으로 섬을 나가게 돼 다행스러웠다. 학생들이 떠난 텅 빈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벌써 그들이 그립다. 북적이던 장소는 기억의 잔상 때문에 더 쓸쓸해 보이는 법이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터넷 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