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1년을 넘기면서 새삼 깨닫게 된다.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노엄 촘스키의 발언이다.
"지배자가 전쟁을 일으키면 피지배자들이 전투에 나간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대통령이 일으킨 이 전쟁으로 애먼 양국의 피지배층 군인들이 20만 명 이상(2023년 2월 말 현재) 사상하였다. 민간인들의 희생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
70여 년 전 6.25한국전쟁도 다르지 않았다.
남과 북은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국치와 식민지 생활을 함께 겪고 독립운동을 더불어 하였다. 해방을 맞아 함께 감격하고 외세가 가른 분단을 더불어 비통해 하였다. 싸울 이유가 없는데 싸우는 것은 투견(鬪犬)이다. 서로 만난 적도 없는 개들은 투견사들의 돈벌이용으로 서로 물고 뜯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구경꾼들은 이를 즐기고 개평을 얻는 사람도 있다. 미·소는 한국을 분단시키고 투견사 노릇까지 하였다.
김구와 김규식 등은 남북에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면 필연적으로 동족상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해서 남북협상을 통해 분단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끝내 무위로 돌아가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38선은 쉽게 무너지고 북한군은 물밀듯이 남하하여 26일 낮 12시경에는 야크기 2대가 서울 상공에 날아와 김포공항을 포격했다. 이승만 정부의 방비나 대처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이승만은 25일 오전 10시 30분경에야 남침 보고를 받았다. 이날 이승만은 9시 30분부터 경회루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6.25전쟁은 몇가지 국내외적 요인이 겹쳐 발생하게 되었다. 국외적 요인으로는 ➀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되고, ➁ 1949년 8월 주한미군이 500명의 고문단을 남긴 채 철수, ➂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시켰고, ➃ 1949년 12월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의 무력침공계획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받았다. 국내적인 요인은 ➀ 김구·여운형 등 민족지도자의 정치적 암살, ➁ 농지개혁의 미진으로 농민의 불만 고조, ➂ 반민특위 해체로 국민의 분노, ➃ 남로당의 붕괴로 남한내부의 '인민혁명'가능성 희박, ➄ 5.30총선(제2대 국회)의 결과 반이승만계열 국회 다수석 차지로 정부에 대한 국민 불신, ⑥ 민족해방투쟁의 경쟁 상대로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대립, ⑦ 북한군에 대한 국군의 병력 열세 등이 지적된다.
여기에 정치적 위기에 몰린 이승만이 적절한 규모의 국지전을 바라고, 남침 정보를 방치했다는 주장과 스탈린의 적극적인 사주론도 제기된다.
이승만 정부가 피난에 급급할 때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한국시간)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9대 0으로 결의했다. 소련 대표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는다. 소련이 북한을 전쟁에 내세워 중국과 미국이 군사적인 적대관계를 갖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스탈린의 책략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었으나 초기 전황은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한을 석권하였다. 4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 만에 대구·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했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을 계기로 서울 탈환 ⟶ 38선 넘어 진격 ⟶ 평양 점령 ⟶ 국군 일부 병력이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군이 오산까지 후퇴했다가 얼마 후 38도선을 넘어 철원·금화까지 진격하고, 국제전으로 비화하면서 소련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이면서 1953년 7월 27일 유엔군(미군)과 북한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전쟁 중 이승만 정부의 군경은 제주 4·3사건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고 국민방위군사건으로 1천여 명의 장정이 굶어 죽거나 부상당하는 권력형 비리가 자행되었다. 3년 동안 전개된 6.25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쌍방 360만 명의 부상자,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고, 남북에 이승만과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강화되었으며, 민족분단체제가 더욱 굳어졌다. 이후 한반도는 동서냉전의 분계선이 되었다.
6.25한국전쟁의 상처는 김자동과 가족에게도 비껴가지 않았다.
고국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했던 그는 학업을 중단한 채 의용군에 끌려가야 했고, 아버지는 납북되었으며, 어머니는 엉뚱한 죄명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이들 가족은 누구 못지 않게 극심한 전쟁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