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를 지나 세종대로를 거쳐 새문안로를 가다 보면 오른편에 옛 궁터와 마을이 하나 보인다. 궁터는 조선시대 서궐로 불렸던 경희궁, 궁 앞마을은 최근 도시 재생사업으로 눈길을 끌고 있는 돈의문박물관 마을이다. 지금은 사라진 돈의문, 즉 서대문 일대의 세월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 수 있다.
박물관 마을 건너편 문화공간으로 가득한 정동길과 돌담길을 지나면 왼편에 대한문이 보인다. 조선의 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황제였던 고종의 거처였던 덕수궁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다른 궁궐과 달리 서양식으로 지은 석조전과 정관헌이 눈에 띄는데, 구한말 건축의 흐름이 바뀌어감을 말해주는 궁궐이기도 하다.
경희궁부터 정동길을 지나 대한제국의 무대였던 덕수궁까지 가 보자.
경희궁과 돈의문박물관 마을
경희궁과 돈의문박물관 마을은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새문안로를 따라 광화문 방향으로 따라오면 왼편에 보인다. 경기, 충청 서해안 지역에서 차량으로 올 경우 서부간선도로를 따라오다 성산대로를 거쳐 내부순환로 홍제나들목을 내려와서 통일로를 따라가다가 새문안로로 가면 왼편에 보인다. 그 외 지역에서는 한남대교와 남산1호터널을 거쳐 쭉 가서 종로에서 좌회전한 후 오른편에 경희궁이 보일 때까지 가면 된다.
경희궁 흥화문을 들어서니, 다른 궁궐과 달리 공터가 많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창건되었는데,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한때는 서궐로 불리며, 철종 때까지
별궁으로 쓰였다.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때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불타 두 궁궐이 재건되기 전까지 임시 정궁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동궐이 재건된 후에도 경덕궁은 별궁의 역할을 유지했는데, 이는 숙종이 경덕궁 융복전에서 태어났고, 임종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아들 영조도 서궐과 동궐을 왔다갔다하며 정사를 봤는데, 오늘날의 이름인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꾼 임금이기도 하다. 원종(정원군, 인조의 부친)의 시호에 '경덕'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경희궁을 돌아보니 남은 건물은 정전인 숭정전과 그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 왕의 집무실인 자정전 그리고 임금의 어진을 봉안했던 태령전만이 남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경복궁 영건일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 전각을 철거한 후 자재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중건을 위해 조선의 재정과 노동력을 과하게 소모한 줄만 알았는데, 경희궁의 대다수 전각도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충격이었다.
이후 경희궁에 남은 전각은 숭정전, 흥화문을 포함하여 5개소에 불과했다. 그 남은 전각도 일제가 이곳에 경성중학교를 세우고 매각 절차를 밟았다. 또한 숙종과 사연이 있던 융복전 자리에 방공호를 만들었다.
흥화문은 일본 사찰 박문사에서 매입하여 사찰문으로 활용하다가 해방 후 서울신라호텔의 정문이 되었다. 숭정전의 원래 건물은 일본 사찰 대화정 조계사(오늘날 종로 조계사와는 다르다)가 매입한 후 법당으로 세웠다. 이후 조계종이 그 자리에 동국대를 세우면서 법당 정각원이 되었다.
경희궁의 복원은 경성중학교 건물을 그대로 쓴 서울고등학교가 1980년 서초구로 이전하면서 이뤄졌다. 가장 먼저 흥화문이 1988년 지금의 자리로 돌아왔다. 숭정전의 경우 정각원 법당이 되면서 심하게 변형이 이뤄져, 1991년에 아예 새로 지어 복원했다. 자정전과 태령전은 2001년에 복원했다.
궁궐의 중심은 간신히 복원되었지만, 주변부는 서울시교육청,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이 버티고 있다. 이곳이 사적으로 지정된 건 1980년인데, 주변 건물들은 그 이후에 지어진 것이라 궁터가 상당히 훼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궁궐은 복원사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지만, 경희궁은 그렇지 못한 이유다.
경희궁에서 남서로 가면 60~70년대 마을처럼 보이는 곳이 있다. 이름은 돈의문박물관 마을. 새문안마을로도 불렀는데, 돈의문 뉴타운 사업이 진행되며 교남동 일대가 아파트로 변해갔다.
동네 이름인 '새문안'은 돈의문 안쪽이라는 의미인데, 원래는 경희궁 왼편 서쪽 언덕이 서전문이 있었지만, 세종 4년(1422)에 헐고 다시 세웠기 때문이다. 박물관마을은 원래 공원으로 조성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옛 골목과 집들을 보존해서 관광명소로 만들어 놓았다.
박물관 마을의 사연을 알려면 옛 이태리 레스토랑 아지오에서 탈바꿈한 돈의문 역사관을 꼭 가보자. 조선 돈의문과 경희궁 이야기부터 시작해, 개화기 서대문에 살았던 서양인들의 이야기를 거쳐 해방 후 과외가 성행했던 새문안동네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마을 주변을 보면 서대문여관, 사진관과 같은 옛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건물들도 볼 수 있는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돈의문구락부'다. 구락부는 클럽을 일본식으로 적은 것인데, 말 그대로 서양인들의 사교장소처럼 만들어 놓았다. 실제 돈화문 아래 있는 정동은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들의 무대였는데, 이를 잘 표현한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홀로 남은 고종이 거처했던 덕수궁
돈의문박물관 마을에서 새문안로를 건너가면 정동길이 보인다. 구한말 개화의 공간 그대로 남아서 그런지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들로 가득하다. 이화여고를 지나면 오른편으로는 구한말 건립된 감리교인 정동제일교회가 왼편으로는 국립정동극장이 보이는데, 극장 왼편에 난 길로 들어서면 옛 서양건물이 하나 보인다.
이름은 덕수궁 중명전. 원래는 황실도서관으로 지은 건물이었다가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 고종의 임시거처로 쓰였다. 하지만 이듬해 고종은 여기서 비극의 순간을 맞게 되었는데, 대한제국을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이 이 벽돌 건물에서 강제로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명전 내부는 을사늑약 당시 상황과 고종의 헤이그 특사 사건에 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당시 일제가 협박을 했고 대한제국의 재정이 악화된 건 사실이지만, 왜 관료들이 저항하지 않고 굴복했는지 기가 막힌다. 불의에는 물러서지 않고 정당히 맞서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 곳이었다.
다시 정동길을 나오면 운치 있는 돌담길이 보인다. 한때 경희궁을 연결했던 운교터를 지나 세종대로를 나와 바로 왼편으로 보면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이 있다. 건너편에 있는 서울광장과 옛 서울시청사를 마주 보고 있어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느낌이다.
대한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보면 또 다른 문이 나오는데, 광명문이다. 문과 행각을 지나면 건물이 둘 보이는데, 왼편은 고종의 편전, 즉 집무실이었던 덕홍전, 오른편은 침전이었던 함녕전이다. 을미사변 이후 암살을 두려워해 고종이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음을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한데, 아관파천 이후 궁 주변에 외국대사관들이 많아서 일본이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열강의 이권침탈은 계속되었다.
덕홍전 왼편을 보면 단청을 칠하지 않은 이층 목조건물이 보인다. 이름은 석어당. 선조가 임진왜란 이후 임시로 거처했던 곳이다. 원래 이곳은 세조의 장손이자 성종의 친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이후 선조가 거처하면서 정릉동 행궁이라고 부르다가 광해군 때 경운궁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모습은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재건된 것인데, 조선 궁궐에서 누각을 제외하고 2층에 유일하게 올라갈 수 있는 이채로운 건물이다.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준명당과 행각으로 붙어 있는 즉조당 앞에는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이 있다. 대한제국 황제가 거처한 곳이기 때문에 창덕궁 인정전과 마찬가지로 문이 황금색으로 되어 있다. 20세기에 와서 지은 유일한 황궁 정전인데, 인정전처럼 화려한 2층 전각이었다가 1904년 대화재 이후 규모가 줄어 1층으로 재건되었다. 대한제국 말기 재정이 심각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덕수궁 석조전
덕수궁 내부는 대한제국의 역사를 담았기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과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한 것으로 유명한 정관헌이 있는 게 특징이다. 이 중 준명당 왼편에 있는 석조전은 영국인 건축기사 존 레지날드 하딩(J.R. Harding)이 설계했는데, 완벽한 좌우대칭으로 이뤄진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착공 전 석조에 낯선 조선인들을 위해 1/10로 된 목조모형을 보여줬다고. 이후 독립문을 건축했던 심의석이 기초공사를 하고 일본 건설사의 손을 거쳐서 1910년 12월 1일 완공했다.
그런데 완공날짜가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다. 즉 황궁으로 쓰이지 않았다. 실제 고종은 석조전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기존 침전인 함녕전에 머물러 생의 마지막까지 있었다. 이곳에 자주 머물렀던 이는 영친왕인데, 일본에 볼모로 있다가 조선을 방문할 때 여기서 머물고 갔다.
이후 일제가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어 일본 근대 미술품만 전시한 이왕가미술관로 된 아픔을 겪었고, 해방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여기서 개최되고, UN 한국임시위원회 사무실로 활용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국립현대미술관, 문화재청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이어져 오다 2009년부터 복원공사를 진행해 오늘날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이어졌다. 참고로 석조전 내부를 관람하려면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내부를 보니 어떤 방은 가구가 있고, 어떤 방은 왕실 사진자료와 대한제국 그리고 석조전 역사에 대한 전시자료로 이뤄져 있다. 침실, 접견실, 대식당의 경우 준공 직후 모습 그대로 복원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사진자료를 근거로 했다. 사진자료가 없는 곳은 대한제국 전시자료실로 되어 있는데, 복원이 철저한 고증에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서쪽에 세운 궁궐인 경희궁. 철종 때까지는 동궐과 함께 위상을 유지했지만,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건을 위해 대다수 전각이 해체되어 사실상 빈 궁터로 남았다. 일제강점기 때는 경성중학교가 숭정전 단 위에 건립했다가 이후 후신인 서울고를 이전하며 중앙부만 간신히 복원되었는데, 정전 옆에는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섰고, 궁궐 옆 새문안마을도 마을 일부만 남은 채 전부 아파트로 변해서 서대문 일대는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덕수궁에도 석조전과 정관헌이 대한제국 이후 바뀌는 건물 형태의 예시로 남아 있다. 경희궁의 오늘날 모습과 덕수궁 석조건물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옛 전통 목조의 시대가 가고, 석조와 콘크리트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오늘날 보면 석조 건물이 목조보다 화재를 대응하기 쉽고 편의성이 크기에 흐름을 따라갔다고 하지만, 전통건물을 과거 추억으로 보내야 했던 아쉬운 마음도 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 동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