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 류옥하다 시민기자는 전공의로 일하고 있습니다. [편집자말] |
'주69시간제'라 불리는 근로시간 개편이 지난주 모든 직장인의 점심 주제였다. 현재 대부분의 노동자가 적용받는 '주52시간제'는 주당 40시간 근무를 기본으로 하되, 연장 근무는 12시간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해왔다. 그러나 개편안은 주당 최대 69시간 근무를 허용하되, 이후의 근로 시간을 줄이거나 휴가를 주는 방식으로 '탄력성'을 부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대통령실은 3월 15일 브리핑에서 '근로 시간 유연화 정책은 종래 주 단위로 묶인 것을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자유롭게 노사가 협의할 수 있도록 하되, 최대 근로 시간은 약자의 청취 후 세밀하게 방향을 잡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개편안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면서 '여론 수렴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라'는 대통령의 재검토 지시가 이어졌다. 세부 사항이야 어찌 됐든 적어도 현 정부에서 노동 시간을 늘리고 유연화하고자 하는 방향성은 명확해 보인다.
주69시간 '근무→야근→기절→병원' 이게 내 미래야?
<한겨레>는 '주 69시간 근무→야근→기절→병원, 이게 내 미래야?'라는 기사에서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내몰릴 것', '노동자의 삶을 흔드는 정책임에도 제도가 복잡한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헬스조선>에서는 '짧게라도 장시간 근무가 이어지면 각종 신체 질환이 유발된다', '60시간 이상 일하면 극단적 선택에 대한 생각이 커진다'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주69시간제'를 열렬히 환영했다. 이미 1주일에 69시간을 초과해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선원, 조종사, 항공 승무원 등 불가피한 사정이 있기도 하지만, 대학원생 연구생처럼 애매한 신분으로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아 근로 시간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름 아닌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료진이 있다. 대학병원 등 상급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은 3교대가 일상으로 이뤄지며, 일선 진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인 '전공의'(인턴, 레지던트)들의 경우 심지어 '주88시간제'(!)를 적용받는다.
<한겨레>의 기사처럼 누군가가 69시간제로 근무→야근→기절→병원의 과정을 겪게 된다면 어떨지 상상해보자(물론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기절 이후 119 신고를 통해 구급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에 도착한다. 응급실에서 환자가 처음 진료받는 의사는 대부분 '전공의'일 것이다. 간단한 처치라도 받게되거나, 동의서를 쓰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전공의'의 손을 거칠 것이다. 그리고 병동에 입원하게 되면 환자의 상태를 매일 살피고, 회진을 돌고, 드레싱(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깨끗한 거즈나 붕대로 싸매는 것)을 해주는 이 또한 '전공의'일 것이다.
'주104시간 근무제' '36시간 연속근무' 현실에 놓인 전공의들
이 '전공의'들은 법의 회색지대에 존재한다.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이 2016년 제정돼 사정이 조금 나아졌지만, 이전에는 1주일에 120시간을 넘게 일하는 경우도 흔했다고 전해진다.
법 시행 이후 주 88시간을 초과해 근무하지 못하게 하는 '주88시간제'가 정착되고 있지만, 대한전공의협의회에 따르면 전공의의 절반가량은 정해진 시간을 초과 근무한다(전공의법에 따르면, 전공의 수련 시간은 주 80시간으로 제한돼 있지만 교육적으로 필요한 경우에는 최대 88시간까지 추가 가능하다).
그리고 휴게시간, 식사 시간은 근무 시간에 포함되지 않지만, 입원·응급 환자를 담당한다는 이유로 밥을 먹다가도 환자의 상태에 따라 뛰어가야 하는 것이 이들의 현실이다. 이런 모든 상황으로 고려하면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사실상 전공의들이 '주104시간제'로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36시간 연속근무'로 불리는 당직 또한 이러한 가혹한 근로 환경에 일조한다. 전공의도 의사이기 이전에 밥과 잠이 필요한 한 인간이다. 환자의 건강과 안전, 생명을 책임지겠다는 사명감으로 버티지만 36시간 밤을 새우며 근무하다 보면 사소한 실수가 누적되고, 더러는 환자에게 심각한 위해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전공의들의 육체적·정신적 건강 또한 염려되지만, 무엇보다 환자들의 건강 또한 이러한 환경에서는 온전히 보장받기 힘들다.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주69시간제' 적극 찬성한 이유
그렇기에 '주69시간제'가 발표되었을 때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적극 찬성'하며 전공의를 대상으로 먼저 시행해줄 것을 주문했다. 선진국의 경우 전공의는 어떻게 근무하고 있을까. 미국은 전공의 최대 연속근무를 24시간으로 제한하며, 절반가량은 주당 60시간 이하로 일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유럽은 24시간 내 최소 11시간 휴식을 보장하고 있으며, 일본은 초과근무 시간을 연 960시간, 월 100시간 미만으로 제한하고 있다.
흉부외과, 외과,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 의료 대란 또한 이러한 수련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흉부외과(100%), 외과(82.0%) 등의 경우 대부분의 전공의가 정해진 수련 시간을 초과해 근무했다(대한전공의협의회의 2022년 전공의 실태조사 결과). 소아청소년과의 경우 최근 소아 진료 대란으로 시끄러웠던 모 병원에서 몇 년 전 한 전공의가 주당 110시간 이상을 근로하다 과로사로 사망하기도 했다.
의사를 늘려서 해결하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전공의의 가혹한 수련 환경은 그들의 숫자가 부족하기 때문이 결단코 아니다. 상급종합병원의 운영이 '값이 싼' 전공의들을 활용해 이윤을 남기는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다.
전국 어디에나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진 번쩍번쩍하고 웅장함을 보여주는 병원 건물들은 3교대의 간호사들, 밤을 새우는 의료진들, 36시간 연속 근무를 최저임금을 받으며 수행하는 전공의들의 피땀으로 세워졌다. 단순히 의사의 수를 늘리면, 병원에서는 값싼 전공의를 더 많이 활용하려고만 할 것이다. 전공의들의 처우는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다'는 이유로 더욱 관심에서 멀어질 것이다.
21세기에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서 버젓이 104시간 근무가 행해지고 있음에도, 이런 가혹한 환경은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의 건강, 생명에 직결된 문제임에도 병원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라는 이유로 알지 못하거나, 눈을 감는다. 전공의들은 노동자이기 이전에 의사라는 직함이 주는 편견으로, 기득권이라는 오해로 기본적인 관심과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전공의들은 노동자를 위하는 노조 또한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무심하다고 느낀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의사이고 정책 방향이 같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보건의료노조는 전공의 가입을 받지 않고 조합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공의 근로환경 개선에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명을 통해 ▲전공의 근무 시간(4주 평균)을 주당 64시간 수준으로 단축하기 위한 시범사업을 시행할 것 ▲국립중앙의료원·건강보험 일산병원·서울의료원 등 국공립병원에 선제적으로 도입할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세계 최장 노동시간의 대한민국'을 물려줄 것인가
104년 전인 1919년, 국제노동기구(ILO)는 국제노동기준을 확립하며 협약 1호(근로 시간(공업) 협약)에서 '최대 근로 시간은 '하루 8시간, 주 48시간'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다. 노동시간 기준 2022년 기준 OECD 38개국 중 5위로 1년에 1915시간을 일한다. OECD 평균은 1716시간이었고, 꼴찌 독일은 연간 1349시간을 일했다. OECD 회원국의 평균 근로 시간은 10년간 3.2% 감소했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감소 추세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주4일제를 실험하고 있다고 한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윤택한 시민의 삶을 보장하는 것은 세계적인 경향이다. 우리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있는가. 과연 연간 1915시간의 노동시간 아래에서 가족을 위한 삶은 가능할까.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가능한가. 최근의 저출생 쇼크에 너도나도 한마디를 보태지만, 세계 최장 근로 시간이 분명 적지 않은 기여를 했으리라 생각한다.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노동자의 삶과 시간, 건강이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 과로와 야근에 시달리며 스스로 멸종의 길로 걸어가는 그런 암울한 땅을 상상하면 숨이 막힌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에 살고 싶다. 우리 세대에서 불가능하다면, 우리 자녀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살게 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병원의 의료진들과 '전공의'들도 함께 누리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