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다!"
오는 4월 3일 제75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을 앞두고 지난 21일부터 제주 전역에 걸린 현수막 문구다. 우리공화당과 자유당, 자유민주당, 자유통일당, 자유논객연합 등 극우 성향의 정당 및 단체가 정당법을 적용해 게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론, 해당 현수막을 보는 순간 미안한 마음이 일어 종일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현수막에 적시된 내용 자체의 오류를 차치하더라도 4.3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문구가 엄지손가락 안쪽 깊이 박힌 가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난 3월 17일부터 19일까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특별자치도기자협회 주관으로 진행된 '제주4.3세계화 언론인 초청 팸투어'를 다녀왔다. 투어 내내 제주 전역에 깃든 4.3의 기억을 온몸으로 마주했다.
이 글을 제주4.3을 폄훼하는 이들이 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쓴 이유다.
제주4.3, 이제야 제대로 보았다
돌아보니 꽤 오랜 시간 역사에 천착해 살았다. 실제로 역사여행 관련 책을 네 권이나 썼다. 과정에서 제주4.3 관련 내용도 적잖이 살폈다 자부한다. 그런데 제주 4.3의 역사를 현장에서 마주하고 비로소 깨달았다. 착각이었다.
제주4.3평화공원에 누워있는, 4.3 75주년이 되도록 이름을 새기지 못한 백비(白碑)부터 강제동원된 제주도민의 아픈 역사가 온전히 남은 서귀포 알뜨르비행장, 북촌 너븐숭이에 조성된 아기들의 무덤까지. 제주가 곧 4.3이다.
극우정당은 제주 4.3을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해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라 주장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4.3사건법에 따르면,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뜻한다.
해당 법에는 "국가는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시행하고, 누구든지 공공연하게 희생자나 유족을 비방할 목적으로 제주4.3사건에 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희생자, 유족 또는 유족회 등 제주4.3사건 관련 단체의 명예를 훼손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강조됐다.
그런데도 제주4.3을 열흘 정도 앞둔 지난 21일 제주도에 진실이 왜곡된 현수막이 걸린 거다. 이유가 무엇일까?
지난 8일 국민의힘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북한 출신 태영호 의원의 발언이 불을 지폈다. 지난 2월 13일 제주 합동연설회에서 그는 "4.3사건은 명백히 김일성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다. 김씨 정권에 몸담다 귀순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희생자들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관련 내용이 알려지자 큰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태 의원은 다음날인 14일에도 "나는 북한 대학생 시절부터 4.3사건을 유발한 장본인은 김일성이라고 배워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해방 후 혼란기에 김일성은 유엔의 남북한 총선거 안을 반대하고 대한민국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며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당시 남로당에 전 국민 봉기를 지시했다"고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3.1절 발포사건이 제주4.3 시작점... 혼란 부추긴 '서청'"
제주국제공항에서 멀지 않은 관덕정과 제주북초등학교에 가면 바로 알 수 있다. 태 의원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고, 제주읍에서는 북국민학교의 3·1절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다.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제주 사회가 들끓기 시작했다. 제주4·3의 도화선이라 불리는 '3.1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제주4.3평화재단 게시내용 중 발췌)
1947년 3.1사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같은해 3월 10일 총파업으로 맞선다.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했고, 공무원들은 업무를 놓았다. 상인들도 문을 닫고 파업에 동참했다. 이들 모두 3.1사건에 대한 제주도민의 분노를 파업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38선 이남을 통치하던 미군정의 생각은 달랐다. 미군정은 제주도를 '빨갱이섬'으로 규정한 뒤 서북청년회를 보내 대대적인 검속에 들어갔다. 과정에서 박경훈 초대 제주도지사가 '도민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항의성 사직서를 제출하는 등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주도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발표한 '4.3이 머우꽈'에 따르면 서북청년회(서청)가 대혼란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박경훈 지사의 후임으로 유해진 지사가 부임할 때 함께 건너온 서청은 '빨갱이 사냥'이라는 명목으로 제주도민을 향한 무자비한 폭행과 약탈을 자행한다. 그리고 이들의 악행이 쌓이고 쌓여 1948년 4.3 발발의 중요한 요인이 됐다.
1948년 4월, 죽고 죽고 또 죽은 제주도민들
서청의 무자비한 악행에 제주도민들은 폭발했다. 무엇보다 당시는 남과 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세운다는 미명하에 분단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일제로부터 35년 간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다시 한번 나라가 두 쪽이 날 위기에 처하자 제주도민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반 된 민심과 5.10 남한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결합해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 및 단선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미군정은 이를 두고 '북한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4.3이 발발한지 한 달이 채 안 된 1948년 4월 28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제주 주둔군 9연대 연대장 김익렬은 치열한 논쟁 끝에 극적인 협상안을 도출한다. 하지만 평화협상은 불과 사흘 뒤인 5월 1일에 깨진다. 제주시 오라동 연미마을에 무장대를 가장한 괴청년이 몰려와 불을 지르고 난동을 피웠다. 5월 3일에는 평화협상을 믿고 산에서 내려오던 민간인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이에 대해 항의하던 김익렬은 쫓겨나고 만다. 김익렬 대신 온 이는 일본군 소위 출신의 초강경파 박진경이었다. 박진경은 취임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라고 말했다.
이에 무장대는 5.10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더 적극적인 행보를 취한다. 주민들을 산으로 보내 제주도 2개 선거구를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게 만들었다. 물론 이들의 반발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실현되지 못한 건 아니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를 세운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증파한다. 1948년 10월 17일 제주지역 토벌 사령관 송요찬은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대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한다. 제주의 핏빛 비극은 이렇게 진행됐다.
중산간마을은 초토화 됐고, 해안마을 주민들 역시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산으로 올라간 무장대 역시 무절제한 민간 약탈을 자행했다. 과정에서 3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거다. 당시 제주 인구는 30만 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비극은 그치지 않았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자와 제주 출신 전국 형무소 재소자들이 또다시 희생됐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48년 4.3을 거쳐 1954년 9월까지 제주도민들은 말 그대로 죽고 죽고 또 죽었다.
그 흔적이 제주4.3평화공원과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 너븐숭이 집단학살지와 애기무덤, 다랑쉬굴, 큰넓궤, 섯알오름 학살터, 정방폭포 등에 남아있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길 바라며"
제주4.3팸투어 내내 주최 측은 한 목소리로 "제주4.3은 세계인의 기록이자 역사"라면서 "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 등재가 이뤄질 수 있도록 마음을 보태달라"고 호소했다.
"70여 년간의 해결과정을 담은 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국가 폭력에 의한 과거사 해결의 선례를 기록하는 것으로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럴 것이 이들이 세계유산으로 남기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다. 군사재판에 회부돼 수형과 사형을 언도받은 2530명의 민간인들의 명단과 인적사항이 적힌 군법회의 수형인명부를 비롯해 형무소에서 보낸 희생자의 편지, 제주4.3사건 희생자 심의 및 결정 요청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위령비도 있다. 모든 것이 제주4.3을 이루는 근간이다.
제주도와 4.3평화재단은 지난 2월 27일에 문화재청에 4.3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대상 선정 신청을 했다. 배우 박해일도 최근 캠페인을 통해 "4.3의 평화적 가치를 국제적으로 공인받기 위해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가슴에는 제주4.3을 상징하는 동백꽃을 형상화한 배지가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