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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군사반란을 일으킨 박정희도 '법과 질서'를 강조했다. 그는 헌법이란 이름으로 비판세력과 반대세력은 잡아넣거나 심지어 죽였다.
5.16군사반란을 일으킨 박정희도 '법과 질서'를 강조했다. 그는 헌법이란 이름으로 비판세력과 반대세력은 잡아넣거나 심지어 죽였다. ⓒ 자료사진
 
서울 5월의 상공에 때 아닌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벼락을 동반한 '이상기후' 시대도 아닌 먹구름인데 이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군부 일각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정부에 첩보되었으나 별 일 아닌 것으로 묵살되었다. 

이즈음 김자동 가족은 돈암동 성신여대 밑에 있던 친구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결혼 후 두 딸이 태어나는 등 식구가 늘면서 청구동 최덕신(외무부장 역임) 집에 전세를 살고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그날 새벽에 자다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총소리를 들었다. 새벽이니까 조용한데다 청구동 언덕 위쪽이다 보니까 멀리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내 기억에는 꽤 여러차례 총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후 전화벨이 울렸다. <새나라신문> 취재부장으로 있을 때 밑에 차장으로 데리고 있던 이중(李中)이었다. 그도 낯선 총소리를 듣고 놀라서 전화를 한 것 같았다. 내가 먼저 그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총소리요?"
"김 부장이 걱정하던 게 일어난 거 아니오?"

그 무렵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을 들려준 바 있다. 그래도 그때는 설마 하고 한 얘기였는데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만 것이다. 나는 박정희(朴正熙)란 인물의 존재를 그때 처음 알았다. (주석 1)

한국 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리는 먹구름은 삽시간에 서울의 주요기관에 날벼락을 퍼붓고 그 실체를 드러냈다. 5.16군사쿠데타이다. 오랜 문민전통의 역사에서 고려 무신시대와 일제강점기 35년의 무단통치에 이은 군부통치시대가 시작되었다. 5.16쿠데타는 지배계급의 교체 일뿐 아니라 정신사적으로 큰 변화를 불러왔다. 그것은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 한다는, 가치관이 송두리째 전도된 퇴행이고 반이성적이었다.

<민족일보>는 경황 속에서도 신속히 취재하여 쿠데타의 주동자가 박정희임을 보도했다. 

군사혁명군을 실질적으로 지도한 박정희 소장은 당년 45세로서 육군 장성급 중에서 청렴강직하다는 평이 높은 2성 장군이다. 경북 성주 출신인 박 장군은 대구사범을 나와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일제 말에 일본육사를 졸업하여 전통적으로 군인 기질을 길러온 인물이다. 그는 해방 후 2기생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으며 6.25동란 때는 육군본부 G3(작전) 차장으로서 오랫동안 군사작전에 참여해왔다. 그러나 일선 전투부대를 지휘한 것은 휴전 이후 5사단장을 역임했을 때이다.

비교적 키가 작고 매서운 얼굴의 주인공인 박 장군은 청빈하고 정직을 '모토'로 하는 군인으로 정평이 있어서 때로는 불우한 처지에도 놓여 있었다. 그는 4.19 직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에 기용되었으나 당시 육군참모총장 최경록 중장에 의하여 후방으로 전임되어 있었다. 박 장군은 슬하에 세 자녀를 거느렸다. (주석 2)

반란군은 5월 20일 장도영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을 구성하고, 이주일 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최영규 준장을 소장으로 하는 혁명재판소와 박창암 대령을 부장으로 하는 혁명검찰부를 설치하여, 자유당·민주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5·16쿠데타 전후의 이른바 반혁명사건을 처리하게 했다.

군정은 3·15부정선거와 관련 최인규, 발포책임자 곽영주, 정치깡패 이정재 등을 사형하고,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를 반국가죄로 처형한 반면에 국민의 지탄을 받아온 독점재벌 등 부정축재자들을 경제건설에 적극 활용한다는 명분으로 거의 사면조처했다. 

쿠데타 세력 사이에는 정권 장악이 확실해지면서 내부의 권력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5·16쿠데타를 방관 동조자였던 장도영을 몰아내고 실권자인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박정희 세력은 7월 3일 장도영과 쿠데타의 주동자였던 육사 5기 출신의 박치옥·문재준 등이 반혁명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체포하고, 김종필 계열의 육사8기 출신들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다. 군정기간에 적발된 이른바 반혁명사건이 13건에 달했고, 최고회의에 참여하였던 최고위원 장성들의 상당수가 여러 가지 혐의로 제거되어 63년 2월 최고회의에는 발족 당시 32명의 위원 가운데 6명만 남을 정도의 치열한 숙청이 단행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정치정화법을 제정하여 민간정치인들 일부는 거세하고 일부는 포섭하는 등 '분열시켜 통치'하는 전략을 펴면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화폐개혁과 통화증발 등의 경제조치를 단행했다. 

5·16은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는 반헌법의 악폐를 한국현대사에 남기게 되었으며, 그 선례는 이후 군부 야심가들에게 권력욕의 충동을 뿌리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쿠데타를 주동한 박정희는 1917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공업보통학교 훈도(교사)로 재임 중 39년 일왕에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를 쓰고 일제의 괴뢰 만주국의 장교로 들어갔다. 우수자로 뽑혀 42년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되고 44년 일본육사 57기로 졸업했다. 졸업 후 견습사관으로 일본 관동군에 배속되고 이어 만주국군 제8단의 소대장으로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 공격 작전에 참가하는 등 일본군 장교로 활약했다. 팔로군은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참여하여 항일전을 벌인 중국 부대다.

일제 패망으로 무장해제 당한 박정희는 46년 5월 미국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이해 조선경비사관학교 3개월 단기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되고, 재학당시 형 박상희가 대구 10·1사건으로 경찰에 살해당하면서 남로당의 군 내부 책임자가 되었다.

47년 조선국방경비대 제8연대 소대장을 지내고, 48년 제주 4·3사건이 발발하면서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발탁되어 근무 중 남로당 군 내부 프락치 혐의로 체포되었다. 

만군·일군 출신들의 구명운동으로 사형을 면한 박정희는 군법회의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49년 형집행정지와 함께 군에서 파면되었으나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 중 6·25전쟁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과장으로 현역에 복귀했다. 49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제5사단장과 제6관구사령관을 거쳐 60년 1월부터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임하고, 장면 정부에서 제1관구사령관, 육군본부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2월 제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친일인명사전> 요약)

민주국가에서 군사쿠데타는 국헌을 유린한 반란행위다. 더욱이 일본군 장교 출신들의 쿠데타는 헌정사 이전에 민족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반역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8년 5개월 10일 동안의 집권기간에 군정 940일, 계엄령 3회, 위수령 4회, 대학휴교령 5차례, 국가비상사태 1회, 긴급조치 9회 등 폭압통치로 일관했다.  


주석
1> <회고록>, 382쪽.
2> <민족일보>, 1961년 5월 17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자동#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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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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