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는 추억을 쌓고, 늙은이는 추억을 먹고 살아간다"라는 오래된 격언이 하나 있다. 나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지만 요즘들어 부쩍 추억을 곱씹는 일들이 잦아졌다. 나이가 들면 추억에 기대어 산다는 데 나도 나이가 들어 가고 있다는 징표인가. 나이가 들면서 힘든 일이 더 많아져서일까.
얼마전, 경북 친정에 갔다가 두 아이들과 함께 우연히 초등학교 시절 추억의 문구점에 들르게 되었다. 항상 가보고 싶었지만 주말이라 늘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그곳. 그날은 왠지 모르게 그곳으로 눈길이 갔고, 희미한 전등이 가게 안을 밝히고 있는 것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시절 추억의 문구점
그곳은 바로내 초등학교 시절을 함께 한 추억의 '학동문구사', 빨간 간판의 노란 글씨가 여전히 내 마음을 쿵쿵 울렸다. 나는 홀린 듯이 가게 미닫이 문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서는 순간. 주머니 속 찰찰거리는 동전 소리와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던 초등학교 시절 한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는 살짝 뒷걸음질 칠 뻔했다. 30여년 전 그때의 아주머니가 너무도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동그란 얼굴에 쌍꺼풀이 짙은 눈, 짧은 파마 머리의 아주머니. 살아있는 화석이 있다면 아주머니를 두고 하는 말일지 모른다.
문구점 입구의 한 코너 포켓몬 카드에 정신이 팔린 첫째에게 "그거 신상이다, 어제 들어왔다"라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귓전을 톡톡 울렸다. 무뚝뚝하면서도 정겨운 그 목소리도 세월을 비껴가 있었다. 수년의 세월을 통과했음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들은 늘 내 마음에 안정감과 평화를 준다.
문구점에 일렬로 빼곡히 놓인 형형색색의 과자들, 사탕들을 보며 나는 일순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초등학교 시절, 하교 후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나는 학동문구사에 매일 출석 도장을 찍었다. 내 바지 주머니에는 늘 엄마가 아침에 챙겨준 백 원짜리 세 개가 찰찰거리며 사이좋게 맞부딪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동문구사는 문구사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각종 간식들을 팔았다. 컵떡볶이, 피카츄 돈가스, 찐만두, 오뎅 등. 그중 아이들에게 단연코 1등 메뉴는 아주머니께서 개발하신 그릇 모양 뻥튀기에 담겨진 컵떡볶이. 그것을 맛보려고 하교 후 가방을 메고 길게 줄을 선 아이들의 진기한 풍경이 아직도 내 뇌리에 선연하다.
하지만 내 마음 속 부동의 1위는 그곳의 찐만두였다. 겉보기엔 평범한 찐만두지만 그 만두에는 특별함이 있었다. 아주머니께서 하얗고 폭신한 만두 밑부분에 구멍을 내어 함께 얹어준, 그 달짝지근하면서도 새콤한 간장이 그 주인공이었다.
가격은 300원. 그 당시 내 호주머니의 백 원짜리를 다 털어서 사먹어야 했지만 사탕 2개와 쫀드기 한 개를 포기할 만큼 찐만두의 맛은 황홀 그 자체였다. 한 입 베는 순간 간장과 찐만두가 한데 어우러져 혀끝을 부드럽게 감싸면 그날 맞은 수학시험 70점도 한순간에 잊어버릴 수 있었다.
간식거리뿐 아니었다. 시골이라 변변찮은 놀이나 문화공간이 없었던 우리에게, 그곳엔 그 시절 유행에 맞춘 다양한 즐길거리가 있었다. DDR기계, 펌프, 달고나 만들기, 자동차 게임, 뽑기 등등 우리는 그 곳에서 나름대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유년 시절을 달게 보냈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따뜻하고 행복했던 초등학교 시절. 그 시절을 만든 팔할의 공은 바로 학동문구사다.
"그때가 좋았다, 애들도 바글바글하고"
그렇게 추억의 단꿈에 푹 빠져있을 때 "엄마, 포켓몬 카드 사주세요"라는 첫째의 말이 경종을 울려 나는 찐만두를 한 입 가득 베어 물며 행복해 하던 초등학생에서 일순 두 아이의 엄마로 돌아왔다.
포켓몬 카드 두 장을 양손에 쥔 일곱살 첫째, 꾀돌이 과자와 아폴로를 양손에 쥔 세살 둘째가 나란히 내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주머니께 천 원짜리 두 장을 건네며 계산을 부탁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저 이 초등학교 나왔어요. 학교 끝나고 매일 왔었는데..." 그 말에 아주머니는 반색을 하며 "몇 회 졸업생이고? 애들이 하도 많아가 기억이 안 난다" 나는 그말에 "몇 회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여기 찐만두 진짜 많이 사먹었던 기억이 나요. 찐만두에 올려진 간장 맛이 일품이어서 제 용돈 여기 다 털어넣었어요" 그 말에 껄껄 웃으시며 언제쯤인지 대충 알겠다고 하셨다. 아주머니도 나와 같은 추억에 젖은 아련한 눈빛이 되어 말씀 하신다.
"그때가 좋았다, 애들도 바글바글하고 장사할 맛 낫제. 애들이 입가에 떡볶이 국물 묻혀 가며 신나게 먹는 거 보면서 나도 덩달아 신났다. 근데 요즘은 애들이 많이 줄었다 아이가. 여기 학교도 올해 두 학급이 줄었다카드라. 그리고 주변에 큰 마트도 생겨가지고 매출이 많이 떨어졌다. 그만 할까 싶다가도 아들이 학교 끝나고 '할머니' 하고 신나게 뛰어들어오는 거 보믄 못 그만 두겠다."
아주머니의 주름진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잠시 지나가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쓴 웃음이 지어졌다. '저출산에 줄어든 학생 수가 이렇게 오래동안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킨 아주머니의 생계까지 위협하는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에 돌덩이를 얹은 듯했다. 그리고 이렇게 따뜻한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이곳이 진짜 추억 속에만 자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가슴 한 켠이 아렸다.
인생 가장 환하고 따뜻했던 시절을 만들어준 소중한 문구점. 힘들 때마다 꺼내 먹을 추억이 가득한 이곳이 없어진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고개가 저어진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두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길. 우리를 배웅하러 나온 아주머니를 본 한 무리의 초등학생 남자 아이들이 "할머니" 하며 달려온다. 그들에겐 할머니이자 내겐 아주머니는 눈은 그 쪽을 향하며 우리에게 말했다.
"또 온너라, 그땐 얼굴 기억해주꾸마, 애들 이쁘게 키워가지고 온네이."
그러곤 바로 그 아이들을 향해 "포켓몬 신상카드 나왔다. 얼른 구경해봐라" 하셨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아이들이 환호성을 내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추억은 지금 만들어야 하는 현재진행형
나와 학동문구사라는 추억의 연결고리를 가진 그들. 그들도 매일 이곳을 방문하며 쌓은 추억들을, 훗날 마음 깊숙한 곳에서 꺼내 먹으며 어느 힘든 날에 나처럼 따뜻한 위로를 받을지도 모른다. 마음 속 계좌에 차곡차곡 쌓인 추억들은 이 험한 세상을 꿋꿋이 버티며 나아갈 힘이 되기도 하니까. 그때까지 이곳 학동문구사가 건재하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라본다.
추억을 쌓으러 달려온 아이들을 보며 나도 과거의 추억만 꺼내먹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추억을 쌓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추억을 아쉬워 하는 대신 추억의 장소들을 부지런히 방문하고, 현재의 삶 속에서도 추억이 될 만한 것들을 유심히 발견해내야겠다고. 그리고 그것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음 속 추억계좌에 차곡차곡 쌓아놔야겠다.
추억이란 나이들수록 꺼내먹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쌓아올려야 한다는 것을, 추억은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부지런히 쌓아올려야 할 현재진행형의 것이라는 것을 학동문구사가 오늘 내게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