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대체 : 29일 오후 5시 53분]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번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우리 국민이 쌀을 얼마나 소비하느냐와 상관없이 농민이 초과 생산한 쌀은 정부가 다 사들여야 한다는 '남는 쌀 강제매수 법'입니다. 이런 법은 농민을 위해서도, 농업발전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에서 처리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대통령의 재의 요구, 즉 '거부권 행사'를 공식 건의했다. 이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은 이르면 내달 4일 국무회의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윤 대통령 취임 후 '대통령 거부권 1호 법안'이 되는 셈. 이미 민주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시 새로운 관련 법안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라, 현 상황을 둘러싼 정부·여당과 야당 간의 극한 대치 상황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 총리는 29일 오후 대국민 담화를 통해 야당에 대한 유감 표명 및 재의 요구 건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그동안 정부는 이번 개정안과 관련해 문제점과 부작용이 많다고 국회에 지속적으로 설명했고 법안 처리를 재고해주십사 간곡히 요청해 왔다. 농업계에서도 많은 전문가들이 쌀 산업과 농업의 자생력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고 한농연·쌀전업농연합회 등 농업인 단체들도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며 "상황이 이런데도 국회에서 개정안이 일방적으로 처리됐다는 점을 저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말 농업을 살리는 길이라면 10조 원도, 20조 원도 충분히 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은 안 된다"라면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 산업을 더욱 위기로 몰 것으로 우려된다.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고 금일 당정협의를 한 결과 이번 법안의 폐해를 국민들께 알리고 국회에 재의 요구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특히 "문제가 많은 법률안에 대한 행정부의 재의요구는 올바른 국정을 위해 헌법이 보장한 절차"라고도 강조했다.
이는 앞서 이날 오후 국무총리 공관에서 열린 고위당정협의회 때 예고된 결과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 자리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 시행시) 정부가 점점 더 많이 생산된 쌀을 의무매입해야 해서 재정을 더 많이 투입해야 하고, 과잉생산된 쌀이 쌓이면 정부는 수년 뒤 헐값에 내다버리다시피 해야 해서 막대한 국민 세금을 그냥 버리는 셈"이라며 "또한 쌀 생산이 대폭 증가하면 다른 곡물의 다양성이 축소되는 것이라 식량 안보도 취약해지고 한국 농업을 장기적으로 망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회에서 어떤 방법을 쓰든 막았어야 했는데 소수 여당이란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법안의 폐단을 막고 국민과 농민의 보호를 위해선 헌법상 대통령의 재의요구권을 행사해 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 정부 탓' 빼놓지 않았다... "시장원리 거스르는 포퓰리즘 정책 성공 못해"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 수요 대비 초과 생산량이 3~5% 이거나 쌀값이 전년 대비 5~8% 내려가면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의무 매입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총리는 ▲쌀 시장 수급조절 기능 무력화 ▲미래 농업 투자 재원 낭비 ▲진정한 식량안보 불안 초래 ▲해외 등에서 실패 입증된 개입 정책 등의 이유로 반대한다고 밝혔다.
한 총리는 먼저 "쌀이 남아도는데도 영구히 무조건 사들이는 건 시장의 수급조절기능을 더욱 무력화 시킨다. 공급과잉이 더 심해지고 가격은 더 떨어질 것"이라며 "지금은 어떻게든 쌀 소비를 늘리거나 품질 좋은 쌀을 생산하고자 노력하는 농민들이 많지만 앞으론 그래야 할 이유마저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이어 "개정안에 따른 재정부담은 연간 1조 원 이상인데 이 돈이면 300개의 첨단 스마트팜을 조성하고 청년벤처농업인 3000명을 양성할 수 있다. 농촌의 미래를 이끌 인재 5만 명을 키울 수 있다"면서 "과잉생산된 쌀을 정부 창고에 수년간 보관하다가 5분의 1,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으로 주정용이나 사료용으로 처분하는 건 혈세의 낭비"라고 강조했다.
또한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식량안보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미 자급률이 높은 쌀을 더 생산하는 것은 합당한 결정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해외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밀, 콩 같은 작물의 국내 생산을 확대하는 것이 국가 전체와 농민을 위한 결정이다. 쌀만 가지고 식량안보를 따지는 시대는 지났다"고 주장했다.
특히 한 총리는 전임 정부인 문재인 정부 때도 같은 이유로 반대했고 오히려 그때 정책적 실기를 해서 쌀값 대폭락을 초래했다는 '전 정부 탓'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농산물 수급에 대한 과도한 국가개입은 이미 해외에서도 실패한 정책"이라며 "시장 원리를 거스르는 '포퓰리즘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이번 개정안은 지난 정부에서도 그런 이유로 이미 반대하였던 법안이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는 식으로 다시 추진하는 것은 혈세를 내는 국민들에게 도리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 정부는 정책실기로 쌀값 대폭락을 초래한 바 있다. 쌀값 안정과 수급균형 회복을 위한 우리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면서 ▲쌀 소비수요 확대 및 고품질 쌀 생산체계 강화를 통한 쌀 산업 경쟁력 강화 ▲밀·콩 재배 농민 직불금 지원 ▲가루쌀 산업 활성화 등의 정책 추진을 예고했다.
국민의힘 역시 같은 논리를 들면서 '대통령 거부권 행사' 공식 건의 결정에 힘을 실었다. 강민국 수석대변인은 논평에서 "민주당이 의회 폭거로 강행 처리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명백한 '포퓰리즘 악법'"이라며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 농가 일부에 선심성 공수표를 던져주고 표를 얻어보겠다는 얄팍한 계산이 깔린 '이재명 하명법'"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단 1원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소중한 혈세를 허공에 뿌리겠다는 민주당은 나라의 미래를 논할 자격조차 없다"며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는 생명 산업인 농업과 우리 공동체 터전인 농촌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미래를 반드시 만들어 내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윤석열 정부, 농민 생존권 요구 외면했다"
다만, 이는 앞서 정부·여당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했던 입장인 만큼 민주당 등에서 적극 반박했던 내용들이다. 무엇보다 야당에서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김진표 국회의장 중재 등의 과정을 거쳐 원안보다 대통령령을 통해 탄력적으로 접근할 길을 열었다는 점도 강조해온 바 있다.
당장,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은 따로 기자회견을 열어 "한 총리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한 축인 쌀 생산 조정은 외면하고 쌀 시장격리 의무화만 강조하며 대통령 거부권을 운운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면서 '팩트체크'에 들어갔다.
이들은 현 개정안에 담긴 '쌀 생산 조정'을 시행했던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 때 쌀 재배면적이 각각 2.4%, 연 2.1%씩 감소했던 점 등을 거론하면서 "(개정안 시행으로) 쌀 과잉구조가 더 심화될 것이라는 정부·여당의 주장은 명백한 거짓 주장"이라고 밝혔다.
또 한 총리가 "해외(태국)에서도 실패했던 정책"이라고 밝힌 데 대해서도 "태국은 현 개정안과 달리 쌀 생산 조정을 전혀 추진하지 않았다. 엄연히 다른 정책을 같은 정책이라며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전 정부 탓'을 했던 쌀값 대폭락과 관련해서는 "작년에 45년 만에 쌀값이 25%나 폭락한 것은 재정당국이 자의적 판단으로 논 타작물 재배지원사업을 폐지하고, 쌀 시장격리를 미루며 쌀값 폭락을 방치해왔기 때문"이라며 "그럼에도 정부·여당은 작년 쌀값 폭락 사태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아직도 전 정부 탓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오는 4월 3일 농해수위 전체회의를 열어 윤 대통령에게 양곡관리법 거부권 행사를 건의한 정황근 농식품부장관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윤 대통령은 (개정안의 부정적 측면만 강조한) 농촌경제연구원의 분석이 잘못된 분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 보고를 한 정황근 장관을 즉시 해임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한편, 민주당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서는 "오늘 윤석열 정부는 농민, 나아가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포기했다"고 혹평했다.
오영환 원내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참으로 뻔뻔하다. 대통령은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뒤로 숨기 바쁘더니, 국무총리가 나서 총대를 메고 재의 요구를 건의했다"며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농민의 생존권을 끊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은 것이냐"고 꼬집었다.
또 "양곡관리법은 '대한민국 쌀값정상화법'이다. 윤석열 정부는, 우리 농민들이 내년에도 쌀농사를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희망마저 짓밟은 것"이라며 "오늘 윤석열 정부는 농민의 생존권 요구를 외면하고, 나아가 국가의 식량안보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