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에 나가 사는 것도 어떻게 보면 슬픈 이야기입니다. (중략) 내가 태어난 곳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다시 묻힐 수 있다면 그것만 한 축복이 어디있겠습니까."
상춘객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봄꽃이 꽃망울을 터뜨린 지난 1일, 27년 전 최초로 서산시 해미천 벚꽃 식재를 성사시킨 (전)해미읍성역사보존회 김종완 회장을 만났다.
"해미에도 마르지 않은 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해미천변에 매년 벚꽃이 피면 많은 관광객을 모시고 축제를 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벚꽃이란 콘텐츠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해미천변) 벚꽃 식재를 기획하게 됐어요."
"이렇겐 희망이 없다, 벚꽃길을 만들자"
- 서산삼화목장(현, 축협 한우개량사업소 농장) 구제역의 대안으로 1996년 벚꽃길 조성사업을 기획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서산시 해미면은 평야지대로 1차 산업밖에 할 수 없는 당이었죠. 다른 읍면동보다 땅의 활용도 면에서 한계가 있다고 해야 할까요. 당시 옆 동네 운산면 삼화목장(현, 축협 한우개량사업소 농장)직원들 생활권이 해미면이다 보니 인구로는 약 1만8400명 정도 됐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죠.
1980년대 들어 공군 비행장이 들어오면서 그쪽에 거주하던 3500명 정도의 주민들이 빠져나가 버린 데다가 대산읍 삼길포항이 간척사업을 하면서 공단 유치로 3차산업이 활발하게 이뤄졌었죠. 많은 이주민들이 그쪽으로 빠져나가다 보니 인구가 확 줄어버렸어요. 더구나 한미 FTA가 발효되면서 주민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요.
인구가 유입되려면 뭔가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때 벚꽃을 생각해낸 겁니다. 주민들을 설득했죠. '황락계곡, 산수리계곡, 해미읍성, 마애삼존불을 아우르는 관광벨트를 만들자. 희망이 생기지 않으면 소용없다. 관광콘텐츠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해미천변 벚꽃이다'라고요.
1996년 제가 애향회라는 향우회의 사무국장을 맡았을 당시였습니다. 봄이 되자 해마다 반복되는 구제역이 극성을 부렸죠. 삼화목장은 일반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더 이상 대안이 없어 그해 9월 초부터 제1차로 2대 장석환 회장에게 건의, 회원 동의를 얻어 벚꽃길 조성사업을 기획·추진하게 되었습니다. 2차는 송관선 회장님께 연차사업으로 보고 및 진행했고, 그후 제3차 김기연 회장에 이르기까지 연차사업으로 (벚꽃 조성을) 이루게 되었지요.
조성사업의 비전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어른 키만 한 벚나무 묘목을 하천변에 심을 경우 15년 후에는 벚꽃이 만발하다. 그걸 보기 위해 방문객들이 늘어날 것이고, 자연히 그에 대한 각종 편의시설이 갖추어질 것이다. 지자체에서 벚꽃길 관련 행사를 진행한다면 주변 식당과 상점들의 매출은 늘어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심지어 포장마차를 하는 분들도 먹고살 수 있다.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만한 게 없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그 당시 포장마차 하시는 분들까지 성금을 낸다고, 반드시 추진하자고 뜻을 같이해 주었습니다."
- 관광벨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청년 시절 해미청년회의소 운영을 같이 하다 보니 사고가 좀 깨었던 것 같아요. 주일에는 교회를 다녔고요.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해미는 대원군 때 천주교 박해가 가장 심했던 곳이다. 하지만 순교 당하신 분들의 거룩한 뜻을 잘 섬긴다면 내가 태어나고 내가 살아가야 할 땅이 축복받는 곳이 될 수도 있겠다.' 저는 평소에도 인류 봉사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삶임을 믿었거든요. 특히 더불어 사는 세상이 돼야 하는 것, 능력을 키운다는 것은 사회에 봉사하는 가장 아름다운 삶임을 말입니다."
- 2.4km에 이르는 해미천 벚꽃길이 탄생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조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부분이 가장 어려웠는지요.
"먼저 어려운 부분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토론을 거쳐 의견을 수렴하고 난 후 시청 관계부서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하천법에 안 맞는다는 거예요. 하천 주변에 관상수를 심을 경우 홍수가 났을 때 나무에 부유물이 걸려 유속을 방해할 수 있다는 거죠.
처음부터 계획에 난항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동안 하천정비 작업으로 120mm 정도의 비가 와도 해미천이 넘치지 않는다'고 관계부서를 설득해나갔죠. 이 과정에서 (관계부서에서)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있다는 연락을 해오더군요. 그때마다 저는 몇 번이나 설명을 해야 했고요.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그해 10월 초, 특별조례법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천의 유속에 방해가 되지 않는 조건에서 시장·군수의 재량으로 관상수 조성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해미천 벚꽃길 조성사업은 차후 승인을 미리 받게 되었습니다. 해미 인터체인지에서 2km에 이르는 구간에 벚나무 묘목을 심게 됐어요. 해미천이 첫 사례가 됐던 거죠.
그때부터 가속도가 붙더군요. 그해 온양에서 87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온양천 벚꽃길을 조성하게 되었고, 후에 공주의 대교천과 서산의 청지천 등 곳곳에 벚꽃길이 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해미천 벚꽃길 조성사업은 1996년 9월 27일부터 시작하여 1999년에 이르는 사업이었고요. 저희는 1999년에 향우회(애향회)에서 자부담하여 나머지 구간 4km를 모두 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며 2.4km에 이르는 해미천 벚꽃길이 탄생 된 것이죠. 그러고 보면 세상에 거저 되는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 해미천 벚꽃길 조성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면서 우수 하천에 선정되는 쾌거를 얻었습니다. 그밖에도 회장님의 발자취가 묻은 해미의 대표적인 일들이 있다면요.
"해미공군부대 배후도시 추진사업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공군 20전투비행단 준공식에 참석하셔서 '관계기관은 충남도와 협의하여 해미를 배후도시로써의 면모를 갖출 수 있도록 최대한의 협조노력을 다하라' 하셨는데 임기 한 달밖에 안 남았음에도 이루어진 게 없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청와대와 관계부처는 대통령 특별지시를 왜 이행치 않는가'라는 탄원서를 청와대, 국방부, 재경원, 국회의원 한영수·변웅전, 충남도와 서산시에 제출했는데 10일도 안 되어 특별교부세 10억 원이 지원되어 해미면사무소에서 해미파출소 앞까지 도로가 정비됐죠.
또, 2020년도에 완공한 서산고등학교 앞 도로 4차선 확장 포상공사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이어서, 오제직 교육감 재직 시 2006년도에 해미중학교 졸업식에 오셨었는데 오찬자리에서 '해미 학생 수가 줄었다, 교육 여건이 좋지 않다'고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러자 교육감님이 장학재단을 만들자고 제안을 하셔서, 선배님들의 성금 등으로 (재)해미사랑장학재단을 설립하여 후학들에게 매년 장학사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산시에 건의하여 해미읍성캠핑장, 어린이물놀이장을 유치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해미읍성역사보존회장을 할 때였어요.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도 있고 뿌듯한 점들도 있습니다. 청년 시절, 그토록 그려왔던 청사진이 이제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는 듯해서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