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토요일. 이태원에 다녀온다며 집을 나선 자녀, 연인, 친구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애도할 새도 없이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 지 150일. 하룻밤 새 사랑하는 이를 잃은 유가족들이 다시는 이런 죽음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진상규명의 과제를 알리기 위해 버스를 타고 전국 일주에 나섰습니다. 그 현장을 기록합니다.[기자말] |
10.29 진실버스가 출발한 지 벌써 열흘, 참사 159일입니다. 5일은 수원을 거쳐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유가족은 "이제 서울합동분향소가 집 같다"고 말합니다. 집을 떠나 열흘간 전국을 돌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입니다.
5일 아침 8시, 수원지역 대책 회의 관계자 50여 명과 함께 수원역사 지하와 지상에서 피케팅을 시작했습니다.
지하철과 기차로 출근하는 시민들에게 10.29 이태원 참사의 밝혀지지 않은 의문과 특별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를 담은 유인물을 나눠드렸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분주한 출근길에도 시간을 내어 유인물을 받고,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159일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물음표'들
이후엔 민주노총 경기도본부에서 경기지역 주민 간담회도 진행했습니다.
희생자 최유진씨 아버지 최정주씨는 희생자들의 사망 시각이 전부 다르다며 "아이들이 언제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누가 살리려고 노력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저희한테 돌아왔는지, 옷은 왜 벗겨져 있었으며, 왜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하고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기간만 슬퍼해야 했는지, 무엇이 끝났는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며 특별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희생자 송채림씨 아버지 송진영 유가족협의회 부대표는 "진실버스가 국민동의 청원 5만 명을 달성하기 위해 출발했지만, 열흘간 진실버스로 전국을 다니며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시민들의 참여와 연대였다"면서 "앞으로도 진실을 찾기 위해 갈 길이 멀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희생자 오지민씨 아버지 오일석 씨는 대구 지하철 참사 현장에 다녀온 기억을 꺼내며 특별법 제정에 관심 가져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이번 대구 일정 중에 지하철 참사 현장을 갔는데 이태원하고 똑같아요. 대구 지하철 참사와 세월호 때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못 했으니까 이태원 사고가 또 난 거예요.
이번에는 반드시 특별법 만들어서 재발 방지 대책까지 확실히 세워서 다시는 그런 참사가 안 일어나도록... 애들이 걷다가... 무슨 땅이 꺼진 것도 아니고 건물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그냥 걷다가 159명이 그냥 선 채로... 그런 참사가 더 이상 안 일어나게 여러분들도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헌법 조항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은 수원에서 열리는 수요문화제에도 참석했습니다. 수요문화제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알리고 진정한 해결을 위해 매주 수요일 열립니다. 이날, 김동연 경기도지사와 이재준 수원시장도 방문해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위로했습니다.
희생자 최유진씨 아버지 최정주 씨는 "대한민국 헌법 제34조 6항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이 상식적이고 간단한 조항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159일 전에는 미처 몰랐다"면서 "수많은 재난과 참사 피해자분들을 만나며 겪어보고 나서야 그분들의 아픔을 알게 됐다"고 죄송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태원 참사의 피해자인 저는 저와 같은 아픔을 가진 국민이 다시는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재발 방지가 포함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진실버스를 탔고 이제 그 여정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안전을 원하면 참사를 기억하고, 국민의 의무를 원하면 국민을 보호할 국가의 의무를 다하라고 꼭 말하고 싶습니다."
진실버스는 수원 일정을 마치고 '2022년 10월 29일 밤'에 아이들이 죽어간 그 장소로 향했습니다.
유가족 중에는 아직 참사 현장에 가보지 못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 버스에서 내리기가 힘들 것 같다"고 걱정하는 유가족도 있었습니다.
진실버스에 함께 탑승한 유가족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었습니다. 긴장을 푸는 농담을 던지거나, 우비를 입혀주고 조끼의 글씨가 더 잘 보이도록 꼼꼼하게 챙겨주며 힘든 시간을 함께 견뎌줬습니다.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참사에 여야가, 좌우가, 보수-진보가 어딨나"
5일 오후 4시. 진실버스가 이태원 1번 출구 앞 '안전과 기억의 거리'에 도착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진실버스의 안전한 귀환과 국민동의 청원 5만 명 달성을 축하하며 진실버스 탑승자들을 반겼습니다.
희생자 이지안씨 아버지 이종철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10월 29일 참사 이후 159일의 황망한 밤, 슬픔과 분노로 가득한 낮을 보냈다"며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나라에 참사가 발생했는데 여야가 어딨고 좌우가 어딨고 보수와 진보가 어디 있느냐"면서 국회의원들을 향해 "정쟁으로 가지 말고 국회에서 특별법 개정의 힘을 쏟아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또한 "국회가 정쟁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국민들이 함께 감시하고 목소리를 내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희생자 오지민씨 아버지 오일석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은 지난 열흘의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13개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지역 피케팅 23회, 추모문화제 6회를 진행했습니다. 젊은 대학생들도 만났고 노동자들도 만났습니다. 지역의 언론도 만났고 교육감, 대주교님도 만났습니다. 5.18 어머니집에 가서 어머님들도 뵀습니다.
한결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같이 연대하겠다' '잊지 않겠다' '뭉쳐야 한다' '슬픔은 평생 간다. 밥 잘 챙겨 먹어라' 모두가 눈물 나게 고마운 말씀이었습니다. 국민동의 청원 5만 명이 달성된 대구에서는 지하철 참사 현장을 다녀온 직후라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는 "이제 겨우 긴 여정의 한 발을 내 디딘 것"이라며 "특별법이 제정돼도 우리 아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 더 이상 참사가 발생하지 않는, 일상을 살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대통령 집무실을 지나 서울시청광장에 설치된 서울합동분향소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장대같이 쏟아지던 비는 유가족들의 도착과 함께 서서히 그쳐갔습니다.
참사 장소인 이태원부터 대통령 집무실까지 행진 인원보다 몇 배는 더 많은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절반만이라도 그날 이태원에 있었다면'이란 생각이 들어 원통했습니다.
경찰은 대통령 집무실에서 멀어짐과 동시에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경찰이 옆에 서 있었던 것은 자동차로부터 유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통령 집무실로 향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만감이 교차했지만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시청광장 분향소를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막을 수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응당 막아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행진을 하며 희생자 159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고 참석자들 모두가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5일 오후 6시 34분. 10.29 진실버스가 공식 해산했습니다.
분향소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살펴봤습니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고,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지난 열흘간 진실을 밝혀달라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호소했습니다. 누군가는 욕설을 하고,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시민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힘을 보태준다' '함께 연대하겠다'고 이야기해줬습니다.
열흘간의 진실버스 일정을 통해 유가족들의 마음도 달라졌습니다. 처음 진실버스를 시작할 때만해도 반신반의 했던 마음이 이제는 확신이 됐습니다. 더 끈끈해졌고 더 단단해졌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특별법이 제정되고 제대로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져 다시는 우리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이 없도록, 제대로된 애도와 추모가 될 때까지 다 같이 함께하겠습니다.
[10.29 진실버스 열흘간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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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10.29 진실버스는 10.29 이태원 참사 진생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독립적 조사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며 3월 27일부터 열흘간 전국 전국 13개 도시를 거쳐 참사 159일이 되는 4월 5일에 서울광장 분향소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