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과 반성으로 시작한 이주활동가 구술 기록이다. 이주노동자로서 바라본 한국사회, 나의 투쟁뿐만 아니라 각자를 구성해온 역사, 문화, 지역적 배경 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한국사회가 이주노동자의 삶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이은주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상임활동가와 박희정·홍세미 인권기록센터 사이 활동가가 책 <곁을 만드는 사람들>(오월의 봄 간)을 출간한 이유다.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산추련)이 '차별에 맞서 삶을 일궈내는 이주활동가 이야기'를 기획해 나온 책이다.
베트남 이름 '팜 티 안 뚜엣'인 김나현 부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활동가, 이주노동자노조 수석부위원장을 지낸 방글라데시 출신 '섹 알 마문' 아시아미디어컬처팩토리 영화감독, 네팔 출신 '샤말 타파'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장(2기), 미얀마 출신으로 지난해 부산시청자미디어재단으로부터 세계평화상을 받은 '또뚜야' 부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노동인권상담활동가, 2019년 제1회 이주노동자 희생상을 받은 스리랑카 출신인 '프라사드 차민다' 금속노조 (대구)성서공단지역사회 부지회장, 필리핀 출신인 '놀리'(가명) 노동운동가를 소개해 놓았다.
이 이주활동가들은 "뿌리 없는 노동자에서 연대를 향한 활동가로, 쫓겨난 자리에서 세계를 잇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각 나라에서 태어나 산업연수생 내지 이주노동자, 혹은 자기 나라에서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쫓겨나다시피 해서 한국으로 온 이들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손을 내밀고 함께 고민하면서 여러 문제를 풀어나가는, 그야말로 '지구 공동체'를 실천하고 있다.
산추련은 "한국 이주노동의 역사가 시작된 지 30년이 넘었고, 올 2023년만 해도 11만 명에 달하는 이주노동자가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들어올 예정이다"며 "그러나 그들을 향한 한국사회의 시선은 좀처럼 연민과 불법 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이주노동자들이 차별과 배제로 인해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현실과 한국사회의 이주민 정책에 존재하는 명백한 한계를 방증하는 한편,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극히 평면적이고 단편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강조했다.
고용허가제와 명동성당 투쟁이 20년을 넘어서는 지금, 이주노동자의 노동 현장과 삶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기획된 책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
산추련은 이들을 이주노동자가 아닌 '이주활동가'로 불렀다. 이는 무엇보다 이주노동자로 살며 저마다 품었던 꿈과 고민을 확장하며 예술가, 활동가 등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간 이들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전히 일터 내 소통이 제일 힘들다고 말한다. 이는 본국에서 건너올 때부터 송출업체나 브로커를 통하는 데다 일터도 한국에 들어온 후에야 알음알음 결정되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여러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부당한 일을 보거나 당해도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할 만한 언어가 없다는 점이 가장 심각하다는 것. 책에서는 "출근하자마자 퇴근시켜놓고 '너는 무단결근을 했다'라고 회사에서 보낸 문자를 정작 당사자는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거나 "'맹장염 진단을 받았는데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당장 수술을' 하지 못했던 일" 등 여러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그런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김나현은 이주노동자가 '언어'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 자신이 한국에서 28년간 머물며 이주노동자로 일하다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그리고 이주 여성을 대상으로 상담하는 동안 한국말로 직접 소통하기만 해도 현실이 달리 보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한국에 들어온 지 8년이 다 되어서야 한글교실에 찾아갔다고 한 또뚜야는 "처음으로 '또뚜야 씨'라고 불렸고, 존중받는 그 느낌이 좋아 계속 찾아갔다"고 회상했다. 상담·통역에 대해 그는 "문제를 같이 해결하고 나면 안에서 에너지가 생기고 눈이 반짝반짝해지며,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했다. 그는 언어와 언어를 연결하는 소통 창구 역할을 지금도 쉼 없이 이어가고 있다.
마문은 캠코더를 들고 이주노동 현장과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담으며,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 <굿바이>, <기다림> 등 12편의 작품을 세상에 발표한 독립영화 감독이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한국에 대한 환상을 안고 왔지만 마석 가구단지에서 미등록노동자로 살기도 했고,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퇴직금도 못 받고 쫓겨날 뻔하기도 했으며, 명동성당 농성투쟁단에서 곡기를 끊으며 투쟁했을 정도로 강성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밝혔다.
스리랑카에 살 때는 정작 노조나 투쟁 활동을 거의 본 적 없다는 차민다는 "노조 조끼를 입으면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자신이 경험한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지만 노조 가입을 강요하기보다는 본연의 의지로 가입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라별로 정리한 "노조 신청서만 묶어놓은 서류철"을 책장의 가장 맨 앞에 꽂았다고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고, "돌아보면 정말 행복했어요."라며 자신 있게 말하기도 한다. 그는 노조의 역할을 알리면서 천천히 스미듯 이주노동자들에게 참여의 장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고 했다.
평등노조 이주노동자 지부 2기 지부장이자 명동성당 농성투쟁단의 대표를 맡기도 했던 샤말 타파는 출입국에 붙잡혀 여수 외국인보호소에 갇혔다가 본국인 네팔로 강제출국당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 했던 활동을 바탕으로 네팔노총에 들어가 "10년 가까이 (네팔) 노동부를 압박하고 인력송출 회사와 싸웠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을 떠나는 국가와 서로 협력 관계를 맺는 일이 필요하다고 한 그는 2010년 9월 민주노총과 네팔노총이 네팔 이주노동자 교육과 조직화를 위한 교류협정서를 체결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놀리는 '뉴에라'를 통해 한국 내 필리핀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을 시작으로 동료들과 함께 한국에 있는 크고 작은 필리핀 공동체들을 모아 카사마코(필리핀이주노동자단체연합)를 만들어 활동 중이다.
'사람이 되기 위해' 싸웠던 찬란한 저항의 순간들
이주활동가들이 털어놓은, 귀담아 들어야 할 말들이 많다.
"이주노동자들은 무력한 피해자로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사회가 자행한 인권침해와 노동착취에 저항했고 오랜 투쟁 끝에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을 합법화시켰습니다. 또한 공동체를 꾸려 힘든 이주 생활에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을 향한 이주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연대를 실현해오고 있습니다."
"한국에 온 지 25년이 됐어요. 처음에는 잘못 왔다는 생각도 했어요. 미등록 노동자일 때는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는데 그때 제 권리를 함께 주장해준 사람들이 있어요. 한국 국적이 생긴 후에는 제가 누군가를 위해 그런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동운동도 영화도 그렇게 시작한 거예요."
"추방당했을 당시 한국 생활 10년째였어요. 사람 인생에서 가장 아까운 나이라고 하는 시간을 모두 한국에서 보냈어요. 그래도 좋았어요. 한국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요. 한국에 가서 노동운동을 해온 선배들만 만난 게 아니라 학생이나 사회운동가도 만났어요. 그들이 줬던 기억으로, 그러니까 나쁜 기억이 아닌 좋은 기억으로 운동했던 거예요."
"퇴직금 문제, 임금 문제, 회사의 다른 문제들에 대해 상담할 때 통역해주다 보면 제가 가치 있게 느껴졌어요. 누군가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하면 이주민과함께에 데려갔죠. 친구들이나 옛날에 같이 활동했던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때 제 눈이 반짝반짝했다고 해요. 문제를 같이 해결하고 나면 안에서 에너지가 생겨요."
"이주민을 조직하려면 유연해야 합니다. 젊다고 다 진보적이거나 전투적이지 않아요. 뉴에라에도 진보적인 분들이 계시지만 집회에 나가면 경찰이 잡아간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세요. 집회에 함께하는 분들은 그분대로, 단순히 도움을 받기 위해 함께하는 분들은 그분대로 저희는 모두 좋습니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 책에 대해 김이찬 이주민노동인권단체 '지구인의정류장' 활동가는 "이주인권운동의 최일선에서 치열하게 활동해오신 여섯 분의 이야기를 읽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처럼 살아오면서 실천해주셔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한다"고 소개했다.
서선영 충북대 교수(사회학)는 "여섯 명의 삶의 기록은 각기 다른 배경의 이주자들이 한국사회에서 '사람으로 존재하지 못해' 겪은 극단의 고통·좌절과 동시에 이에 맞서 '사람이 되기 위해' 싸웠던 찬란한 저항의 순간들을 보여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