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지난 번에는 조선 땅에서 최초로 스케이트를 탔던 사람이 바로 나 조지 포크라는 사실과 스케이트를 처음 본 조선인들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조선인들이 난생 처음 본 스케이트에 대해 보인 반응이 몹시 강렬했던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케이트 타는 법뿐만 아니라 스케이트라는 물건의 생김새며 구조, 제작 방법에도 날카로운 호기심을 보였지요. 나는 그때 직감했지요. 아, 머지않아 조선인들이 스스로 스케이트를 만들 것이고 스케이팅에 탐닉하게 되겠구나 하고.
한 해 전 그러니까 1884년 어느날, 제물포에 주재하는 일본 영사를 만났는데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얼마전 조선인들이 찾아와 너무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는 거였습니다. 한양에서 어떤 외국인이 발을 땅에 대지 않고 쌩쌩달리는데 가마와는 쌩판 다른 물건을 타고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조선인들이 일본 영사관에 찾아가 그 신통방통한 물건이 무엇인지 아는 바 있느냐고 손짓 발짓을 다해가며 물었다는 겁니다. 일본영사는 내게 도대체 한양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거였어요. 그건 물론 자전거였습니다.
1884년 어느날 제물포에 정박 중이던 오시피 Ossipee호라는 우리 미국 군함에 승선 중이던 한 사관이 자전거를 끌고 뭍으로 내려와 한양까지 주행한 일이 있었거든요. 자전거를 타고 숭례문안으로 들어온 그는 대로를 쌩쌩 달리며 시내를 관통했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조선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호기심에 불타는 사람들 등쌀에 그 사관은 더 이상 바깥 출입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요. 그 일이 있은 지 몇 달 후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제물포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찾아가서 그 기이한 물건을 묘사하면서 그 모델이나 그림을 보여달라고 졸라댔던 것입니다.
나는 당시 자전거 및 스케이트 소동을 관찰하면서 조선 민중들이 유별난 호기심과 열정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그 점에서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달랐어요. 반면에 양반 보수층은 다른 어떤 나라 사람보다 고루하고 배타적이었습니다.
1884년 말 3일천하로 끝나고 만 갑신정변은 보수파에게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호기와 구실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때는 이때다 싶어 진보의 싹을 자르고 뿌리를 뽑으면서 권력의 철옹성을 쌓는데 급급하였지요. 한편 청나라와 일본은 그 틈을 타서 조선을 서로 먼저 장악하기 위한 암투에 돌입했습니다. 나는 당시의 상황을 부모님 전 상서에서 이렇게 요약했지요.
"사건의 전모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의 진보파는 다수의 나쁜 고관들을 제거하기 위해 거사하였고 국왕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본 공사와 호위병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거사가 완전히 성공했다 싶을 때에 청나라 군대가 궁에 들어와 일본군과 붙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중국인들은 조선 민중으로 하여금 일본이 임금에게 무언가 매우 흉측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믿게 만들면서 무기를 건네주고 일본인들을 학살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뒤이어 끔찍한 일이 벌어졌답니다. 35명의 일인이 살해되었지요. 일본 측은 청나라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으며 만일 철수하지 않으면 그 수효만큼 일본군도 주둔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간의 전쟁과 다를 바 없으며 조선은 종말을 고할지도 모릅니다." - 1885.1.18일자 편지
조선 민중은 일본이 앙갚음을 하기 위해 쳐들어 오지 않을까 공포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1885년 1월 1일 청나라 사절이 약 2500명의 병사를 이끌로 입성하자 조선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청나라 군대가 왜인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건 일본을 너무 쉽게 본 것이었지요. 이틀 후인 1월 3일 이노우에 카우루가 1000명의 병사를 데리고 와서 성문 밖에 주둔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사과와 함께 14만달러라는 거액의 배상을 요구해 와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제 나의 조국 미국, 아니 미국인의 졸렬함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소. 정변이 일어나자 미국 공사는 공사관의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고 말았소. 그리하여 나는 덩그러니 공사관에 혼자 남게 된 것이지요.
나도 마음 만 먹으면 서울을 떠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소. 혼자 서울에 남았던 것은 공사의 지시도 미국 정부의 훈령에 의한 것도 아니었소. 그건 순전히 내 자신의 결심에 의한 것이었소. 그렇게 되자 미국 정부는 나를 대리공사에 임명했다오. 세상에, 일개 해군 소위를 말이오. 나는 당시 상황을 편지에 이렇게 썼지요.
"푸트공사가 직원들을 데리고 줄행랑을 친(skedaddled) 12월 22일 이후로 나는 혼자 남게 되었답니다. 푸트는 12월 29일 몇 명의 오시피Ossipee 호 사관들을 데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더군요. 반은 일본으로 먼저 떠난 부인 생각 때문인 듯했고 나머지 반은 제가 까닭을 알 수 없는 무슨 일인가가 있는 듯했습니다.
그는 오시피호로 일본에 가기 위해 1월 12일 다시 서울을 떠났는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 일에 대하여 지금 제가 자세히 쓸 수 없지만 전반적으로 상황이 저에게는 안 좋아 보입니다. 국무부 내에서 한 바탕 소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대리공사직에 임명되었습니다. 저처럼 직급이 낮은 해군 사관이 그런 직책을 가진 일은 일찍이 없었을 겁니다. 저는 커다란 공사관에 홀로 남아 총괄하고 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제가 여기 잔류한 것은 순전히 자발적인 결정이랍니다. 떠나고 싶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양심에 의하면, 지금 이때야말로 이곳에 외교관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임이 분명합니다.
이번 정변은 그간 조선내에 미국이 이루어 놓은 영향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공복이라면 그러한 폐허를 딛고 재건축해야 하는 게 당연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몸을 던져 성과를 일궈 볼 결심입니다. 미국이 말로는 돕겠다고 하면서 한 민족이 살륙되는 것을 용인하는 그런 나라가 결코 아님을 저는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 1885.1.18일자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