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에는 가족이라는 특별한 이름이 숨어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함께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이다. 하지만 늘 그럴까를 생각한다. 피로 맺어졌다 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아닐 것이다. 믿고 싶진 않지만 흔들리는 가족도, 손을 놓아버린 가족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글 안에 자기 가족의 허물을 고스란히 녹여내기란 쉽지 않다. 그 원초적 관계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해서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한 작가가 있다. <밤으로의 긴 여로>의 유진 오닐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작가 유진 오닐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그러니 이 작품은 창작물인 동시에 그의 가족사인 것이다. 유진 오닐이 작품을 탈고하면서 아내 칼로타에게 자신이 죽은 후 25년 동안은 작품을 발표하지 말고, 그 이후에도 무대에는 절대 올려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세운 건, 그만큼 이 작품이 유진 오닐에겐 사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작품이었다는 것을 증명한 말이라 하겠다.
하지만 아내 칼로타는 유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가족의 수치보다 작품의 가치를 더 인정한 탓이리라. 유진의 작품을 접한 일부 평론가들은 그를 그리스의 비극 시인 아이스퀼로스와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대를 잇는 최고의 극작가라 평했다. 비록 작품 안에 죽음은 존재하진 않지만, 죽음만큼 처절한 우울이 가족의 몸을 비틀어대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나라인 미국보다 스웨덴에서 먼저 초연된 작품은 같은 해 예일 대학 출판부에서 책으로 출간되었으며, 곧이어 뉴욕의 무대에도 올랐다. 이후 '밤으로의 긴 여로'는 유진 오닐의 대표작이 되어, 퓰리처상까지 받는 영예를 안겨 주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티론 가족은 유진 오닐의 가족과 다름없다. 다만 어머니의 이름을 유진 오닐의 어머니 이름인 엘라가 아닌 메리로 쓴 것이나, 두 살 때 홍역으로 죽은 둘째 아들의 이름이 에드먼드가 아니라 셋째 아들 유진의 이름을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니 티론 가족의 셋째 에드먼드가 유진 오닐이라 생각하고 이 작품을 읽으면 이해가 쉬울 거라 생각한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총 4막으로 된 희곡이다. 제 1막에서 제 4막까지가 하루의 이야기인 것을 보면 이 책은 하루 동안 티론 가족에게 벌어진 일을 쓰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티론 가족의 삶은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서로를 배려하는 듯하면서 상처를 주고, 서로를 탓하면서도 금세 자책을 한다. 삶이 감정의 가면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한다. 그러니 그들 말 중에 어느 것이 진심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소리를 질러서라도 진실을 말하고, 문제를 해결하면 좋을 텐데 회피가 답인 것처럼 문제를 빙빙 돌려 피한다. 곪은 상처를 터뜨리지 않고 보이지 않게 꼭꼭 싸매 버린다.
이런 티론 가족의 비극은 누구에 의해 생겨난 것일까? 가난하고 무지한 이민자 출신으로 연극배우로 성공했지만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자린고비가 되어버린 아버지 제임스의 잘못일까? 마약중독자가 되어 온 가족을 떨게 만든 어머니 메리의 잘못일까? 술과 방탕한 생활을 하며 인생을 낭비한 첫째 제이미의 잘못일까? 아니면 나약한 마음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막내 에드몬드의 잘못일까? 누구 하나 정상적인 사람이 없는 것 같으나,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삶이 이해가 되니 이 또한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 메리는 자신이 아들을 돌보지 않아 아들이 죽었다는 자책과 함께 자신에게 그런 삶을 살게 한 남편 제임스와 병을 옮긴 첫째 아들 제이미를 원망한다. 제이미 역시 자신이 홍역을 옮겨 둘째 유진이 죽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자신을 원망하는 엄마 때문에 좌절한다. 막내 에드먼드는 자신이 태어났기 때문에 엄마가 아프게 되었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맞은 모르핀이 엄마를 마약중독자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은 뫼비우스 띠를 타고 흐르듯 서로를 원망한다. 돈을 아끼기 위해 아픈 아내에게 돌팔이 의사를 소개해 마약중독자로 만든 아버지를, 마약중독자가 되어 가족을 공포에 떨게 한 엄마를, 동생을 질투해 어린 동생에게 병을 옮겨 죽게 한 제이미를, 태어난 대가로 엄마를 아프게 만들어 마약중독자로 만든 에드먼드를. 그 누구도 다른 가족에게 불행을 전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불행의 전파자가 되었고, 서로를 망치는 존재가 되었다.
티론 가족의 불행은 작정하고 벌인 일이 아니었기에 안타까웠다. 미워하고 싶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그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그들도 알았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엄마의 회복을 기대했지만,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하찮은 감기이길 바랐던 에드먼드의 병은 악화되었고, 제이미는 모든 일에 무능했다.
단지 하루의 기록이라는 작품은 몇 년의 일상을 보는 것처럼 지루하고 고단하다. 가족들이 뿜어내는 고통이 읽는 내내 숨통을 조인다. 가족이라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진심어린 대화를 외면한다.
티론 가족에겐 따스한 냉정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가족을 위해 돈을 써야 했고, 어머니는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가 마약 치료를 해야 했다. 에드먼드는 나약한 마음을 극복하고 어떻게든 병을 이겨내야 했고, 제이미는 본연의 착한 성격을 드러내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야 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하지 않고 덮어버리는 건 사랑이 아니라 죄다.
그런 면에서 티론 가족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문제를 바로 보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뜻이니. 이는 외면해 버리고 싶은 가족이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붙들고 이해하려 노력했던 유진 오닐 덕분이라 생각한다. 유진 오닐은 살아 생전에는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질기고 질긴 가족사를 눈물과 피로 써냈다.
책을 읽고 나는 가족의 일원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가족이니 다 이해해 줄 거란 생각으로 모진 말을 쏟아내지는 않았는지, 타인에겐 친절한 얼굴을 보이면서 가족에겐 일그러진 얼굴을 보이진 않았는지 반성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 했다. 자신의 혀 하나를 다스리지 못해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어찌 밖에 나가 선한 얼굴로 입을 놀릴 수 있단 말인가? 선한 얼굴은 가족에게 먼저 보이고, 가족이 웃으면 밖에 나가 자유롭게 얘기를 하자. 그것이 가족이, 이 나라가, 나아가서는 이 세상이 웃는 확실한 길이다.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다음 브런치와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