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기획을 했던 사람이 '인쇄인들을 위하고 시민들에게 인쇄문화를 알리기 위한' 서울인쇄센터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용역으로 공공 기관을 운영하면서 공간을 꾸리는 일, 시민들을 대하는 순간들을 소소하게 일지 형식으로 담아내고자 합니다. [기자말] |
2020년 서울시에서 조사한 자료(2020 세운 일대 산업 특성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인쇄 분야 인력의 평균 연령은 56.5세다. 이는 우리나라 제조업 인력의 평균 연령 42.5세(통계청, 2020년)와 비교할 때 월등히 높은 수치다. 그만큼 인쇄업계의 고령화가 심각하다는 얘기다.
청년들이 인쇄업을 꺼리는 이유는 많다. 도제 방식의 기술 전수 과정이 청년 세대에게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을지로 일대는 40년 이상 재개발 예정지로 묶여 있던 탓에 제때 근무 환경을 개선하지 못한 곳도 많다. 특히 지난 20년간 인쇄 단가가 오히려 낮아진 것도 한몫을 차지한다.
그렇다고 마냥 전망이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인쇄 현장 곳곳에서 통계의 추세와는 다른 사례를 만날 수 있고, 이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례들은 인쇄 현장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준다. 이번에 만난 인쇄인 신유진씨(비쥬얼 봄)도 그런 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품질엔 타협 없다
신유진씨는 올해 나이 스물둘의 청년이다. 그는 부모님이 경영하는 비쥬얼 봄이라는 인쇄사에서 디지털 인쇄기를 다루고 있다. 그가 다루는 인쇄기는 X사에서 제작한 최상급 디지털 인쇄기로, CMYK 네 가지 원색에 더해 2가지 색을 더 사용할 수 있는 데다, 디자이너의 요구 사항에 따라 섬세하게 출력물의 품질을 조절할 수 있는 기기다.
최상급의 기기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기술자가 기기의 성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관리하고, 기기의 성능을 잘 파악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만 한다. 신유진씨가 인쇄기를 다루게 된 것은 1년 남짓이지만 그 어떤 인쇄인 못지않게 최고의 품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컬러 프로파일(디자인된 디지털 파일의 색 정보를 기계의 색 정보로 해석해주는 프로그램)도 적절하게 골라야 하고, (디자이너가 감리를 보면서) '색이 너무 노랗다'라고 하면 노란색만 1% 단위로 농도를 조절해요. 채도, 선명도도 그렇고요. 핀을 맞추기 위해서 칼로 찍어서 반대편이 완전히 맞춰 놓고. 이런 것들이 맞아야 인쇄에 들어가요. 어떨 때는 고객이 요구한 품질을 맞추는 과정이 한 시간 정도 걸릴 때도 있어요."
흔히 디지털 인쇄에 대한 편견이 있다. 오프셋 인쇄에 비해 조작이 쉬운 반면 색 재현 등 인쇄 품질 관리를 섬세하게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디지털 인쇄를 하는 인쇄사 상당수가 소량으로 빠른 출력을 원하는 고객들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신유진씨도 이런 '급한 인쇄'를 소화할 때도 있지만 품질에 관해서는 철저하다. 그의 부모님의 경영 철학이기도 하지만 최고의 품질을 위해 연구하고 배워나가는 것이 신유진씨에게 상당한 성취감을 주기 때문이다.
"최근 제작했던 건 백색을 인쇄하고 그 위에 자색을 다시 인쇄하는 포토카드였는데 결과가 상당히 만족스러웠어요. 그분도 만족하셔서 '역시 포토카드는 비쥬얼 봄이네요' 하시더라고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서 이제는 인쇄인으로
신유진 씨가 처음부터 인쇄로 진로를 잡은 것은 아니다. 그는 십대 때는 메이크업 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실제 방송사에서 일하기도 했었던 그는 그 1년 반의 시간을, '사람에게 치이는 게 힘들었던' 시간으로 회고했다. 부모님이 인쇄사 근무를 제안한 것은 그때였다.
메이크업과 전혀 다른 분야이지만 의외로 적성에 맞았다고 한다. 꼼꼼한 신유진씨의 성격에 세세하게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인쇄가 제격이었다. 그렇게 부모님의 인쇄소에 들어온 지 1년, 이제는 인쇄 경영을 꿈꾸는 인쇄인이 되어 가고 있다.
2세 인쇄인들의 가업 참여가 갖는 장점
기자가 근무하는 서울인쇄센터에서도 인쇄 분야 새 인력 유입을 위해서 여러 가지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지만, 유의미한 변화는 기존 인쇄인들의 2세에게서 발견하곤 한다. 우선 2세들은 부모 세대가 평생 일궈온 인쇄업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다소 부족한 근무 조건과 환경의 단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또한 2세들은 학창 시절에 부모님의 인쇄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의 경험이 있어, 인쇄 공정에 이미 익숙하다는 점도 진입 장벽을 낮추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가업에 참여한 2세들은 선대의 전통과 시대에 맞는 변화 사이에서 적절한 해결책들을 찾아내는데 훨씬 수월하다. 신유진씨의 회사 비쥬얼 봄도 신유진씨가 입사한 뒤로 근무 조건을 꾸준히 개선해 나가고 있다.
"원래 충무로 이쪽 일대의 여름휴가는 다 통일이에요. 8월 1, 2, 3일이죠. 그런데 이걸 제가 건의해서 이틀을 더 늘리게 되었어요.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8월 안으로 이틀을 더 쉬도록요."
그렇지만 인쇄사의 특성상 야근과 초과 근무가 없을 수는 없다. 캘린더 제작 시즌처럼 특정한 시기에는 며칠씩 연이어 초과 근무를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인쇄 일이 힘들다는 것을 호되게 느끼기도 하지만 한두 번 겪어나가면서 '힘듦이 지나고 나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경험을 쌓아나가고 있다고 한다.
청년 인쇄인, 그것도 20대 초반의 인쇄인이 정말 드문 인쇄 현장에서 나이가 어리다는 것 때문에 불편하거나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을까? 신유진 씨는 장점이 더 많다고 했다.
"먼저 좋았던 거는 어딜 가나 막내를 유지할 수 있는 게 장점인 것 같아요. 나의 실수를, 어리다는 이유로 아직은 감쌀 수 있거든요. 그래서 어디 가서도 (실수를 하면) 밝게 웃으면서 인사하고, 목소리 크게 또박또박 말하면 다들 반응이 좋으세요."
신유진씨는 요즘 비쥬얼 봄의 홈페이지와 인스타그램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장차 회사의 고객이 될 청년에게 맞는 미디어로의 전환을 회사 막내인 그가 주도하고 있는 셈이다.
신유진씨에게 '인쇄'란 장비 이상의 것
지금 다루고 있는 기계를 완전히 숙달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냐는 질문에 신유진씨는 자기의 노력에 따라 1년에서 1년 반이면 충분할 것 같다고 했다. 사실 신유진씨는 지금도 그가 다루는 디지털 인쇄기에 한해서는 어느 인쇄인에게 뒤지지 않는다. 디지털 인쇄기를 수리하는 업체 관계자도 신유진씨의 조작 능력과 지식에 놀랄 정도다. 질문을 바꿔보았다. 아버지처럼 인쇄를 잘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냐는 질문에는 대답이 달랐다.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아요. 그냥 좀 '짬'이라고 해야 할까요? 역시 그 일해오신 만큼의 시간이 느껴지는, 그 행동과 말과 (고객과의) 의사소통이 되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기계를 다루는 일은 모니터의 인터페이스를 조작하는 일로 쪼그라들었다. 어떤 이에게 인쇄란 그저 이 '조작법'에 불과했지만, 신유진씨에게 '인쇄'란 그 모니터 조작법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걸, 그것이 무엇이든 그의 부모님이 인쇄사에서 보낸 시간만큼 두터운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인쇄업계를 고려 중인 또래 청년들에게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현재 심각한 상태인 인쇄업계 인력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인쇄업계의 인력난을 보며 신유진씨 역시 인쇄업계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주변에 (청년이) 너무 없으니까. 만약에 제가 나중에 한 30, 40살 돼서 운영한다고 했을 때 직원을 구할 수 없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저도 인쇄 쪽은 젊은 사람들은 꺼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의외로 재밌어요. 유명한 기업이나 내가 알고 있던 브랜드 작업을 맡게 되면 더 잘해줘야지, 하는 마음도 들어요. 인쇄가 사양산업이란 얘기는 하기 나름인 것 같아요."
스물두 살의 인쇄인은 이제 막 '인쇄의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의 재미'를 더 크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만났던 인쇄인 중 가장 젊은 인쇄인과의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즐거운 반성을 하게 된다. 인쇄업계의 인력난이란 문제도 환경과 조건을 개선하는 일, 인력의 수요와 공급을 만나게 하는 일에 골몰하기 이전에 이런 '일의 재미'를 나누고 전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같은 글을 게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