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라는 이유로 참 오랜만에 각원사를 둘러본 후 태조산을 오르기로 계획을 세우고 아침 일찍 먼 걸음을 시작했다.
부슬부슬 봄비 내리는 각원사의 봄꽃과 분위기에 취해 한참을 머문 뒤 역시 나서기를 잘했다는 뿌듯함을 안고 청동 좌불상의 예쁜 꽃길을 지나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비는 내리지만 길이 잘 정비되어 오르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등산로 초입, 산 속의 여느 돌탑과 달리 너와집 기와처럼 납작하고 판판한 돌들로 쌓은 돌탑이 인상적이다. 운동삼아 사람들이 많이 다닐 거라 예상했는데 비가 와서인지 한 외국인 청년이 나를 앞서갈 뿐 다른 등산객은 보이지 않는다.
내일 나들이까지 감안하여 배낭이 아닌 가방을 들고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어서인지, 아님 히술한 양산에 의지해 한참 동안 사진을 찍느라 빗속을 돌아다녀서 그런지 몸이 그닥 가뿐하지 않다.
귀여운 다람쥐가 또르르 산길을 가로질러 간다. 요즘은 다람쥐를 보기도 쉽지 않아 사진에 담으려 재빨리 쫓아갔지만 어느 새 자취를 감춰서 실패, 아쉽다. 그래도 스쳐지나간 다람쥐 덕에 한결 정겨운 마음이 들었다.
한참을 올랐나보다. '사랑의 쉼터'라는 예쁜 이름의 정자에서 앞서 간 청년이 쉬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정자에 둘이 쉬면서 멀뚱멀뚱 있기도 어색해, 청년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도 어색해하지 않고 편안하게 대답을 해 준다.
어디서 왔냐기에 서울에서 왔다니까 KTX로 탔느냐고 묻는다. 전철로 와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니 급행으로 왔느냐고 묻는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보다. 태조산 정상에 가봤느냐고 물으니 여러 번 가봤다면서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니 생각보다 대화가 잘 이어졌다.
태조산 정상은 오른쪽으로 가면 그렇게 멀지 않아 정상이 나오는데 전경이 별로 볼 게 없단다. 오히려 반대쪽인 성거산을 추천하며 그쪽을 가다보면 천흥저수지도 나오고 훨씬 전경이 좋다고 한다.
아, 천흥저수지! 그의 말을 듣고 아주 오래전의 천흥저수지의 노란꽃이 떠올랐다. 친구네 집을 가다 보았던가? 우연히 마주한 천흥저수지 둑을 덮은 노란 꽃이 너무 예뻐 남자 친구가 생기면 여기를 꼭 같이 와야겠다 마음 먹었었다. 실제 남편을 만날 때 함께 그 둑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던 추억이 아스라히 떠올랐다. 여리여리한 그 노란 꽃이 금국화라는 걸 최근에 알았다.
이 자리에서 성거산을 지나면 위례성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는 안성의 무슨 산인가까지 갔었다고 한다. 태조산 쪽으로는 흑성산을 거치고 멀게는 진천까지 연결된다고 덧붙여 설명해준다.
Paul은 거의 태조산 지킴이 수준이다. 산을 좋아한다는 말에 작년 여름 혼자 한라산에 간 이야기를 했더니 Paul은 시간과 항공편, 숙소 등이 복잡해 한라산은 가보지 않았단다. 한국의 섬은 가본 데가 없고 가장 멀리 지리산을 갔다 왔다고 했다.
북한산도 다녀왔다기에 내가 신문에 썼던 북한산 산행기를 보여주니 족두리봉 사진을 보며 아는 곳이라고 반가워 한다. 첨부된 암벽 등반가들의 사진을 보고는 실제 암벽등반도 하느냐고 묻기에 사진은 그냥 사진일 뿐이라며 함께 웃었다.
그와 야구와 축구 등 스포츠까지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서 정상에 갈 거냐고 물으니 머리가 아파서 오늘은 그냥 거기서 하산을 할 생각이란다. 그는 나의 무사한 산행을, 나는 그의 두통이 낫기를 바란다는 덕담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며 헤어졌다.
이렇게 글로 쓰니 마치 영어가 능통한 가 싶지만 고백하건대 그저 겨우 의사소통 하는 정도, 나누는 주제가 어려울 것 없이 단순한 내용이라 가능한 정도의 근근한 실력이다. 그래도 쉬면서 나눈 Paul과의 대화로 몸이 많이 회복되었다.
Paul과 헤어지고 태조산 정상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정상까지의 길이 산책로처럼 수월했다. 간벌한 곳을 지나고 파릇파릇한 새순의 싱그러움에 취해 오르다보니 421.5m 태조산 정상석이 보였다.
산 정상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팔각정만 외로히 자리하고 있다. 그 무심한 팔각정에서 내려다보니 Paul의 말대로 전경은 정말 별 볼 것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정자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은 후 고려 태조 왕건에 대한 마지막 제10화를 읽었다.
태조산 정상에서 사람들을 따라가거나 물어서 태조산공원으로 하산 하려던 나의 계획은 이렇게 빗나갔다. 참, 비 좀 왔다고 그리 높지도 않은 산에 이렇게 사람이 없으리란 예상은 하지 못했다.
태조산 등산로나 푯말이 보이지 않아 반대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한참을 내려가다보니 직진과 우회전 두갈래의 길, 둘 다 예상 밖의 길이었다. 좀 더 유력하다 여겨지는 인재교육원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생각보다 급경사, 약간 난코스다.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등산 스틱 삼아 급경사 구간을 내려오다 감으로 들어선 곳에서 길을 잃었다. 산에서 길을 잘못 든 적이 처음은 아니어서 많이 당황스럽진 않았다. 서두르지 말자고 다짐을 하며 스스로에게 천천히, 천천히란 주문을 외운다.
등산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어디 계획한 대로만 이루어지던가? 다행히 비도 그쳤고 해가 질 시간도 그리 촉박하지 않다. 깊은 산이 아니라 위급할 정도는 아닐 것 같지만 초행길이니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요기할 간식과 물을 점검한다. 사진 찍느라 소비했던 배터리도 최대한 아끼며 침착하게 대처하려 마음을 다잡는다. 등산에서든, 인생에서든 계획에서 좀 틀어졌다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처해진 상황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등산에 대한 강의에서 등산할 때는 체력을 셋으로 안배해 올라갈 때 1/3, 내려갈 때 1/3, 나머지는 비상시에 대비하여 비축해두라 했을 때 '뭘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전문가의 조언은 듣는 게 맞다. 나름 준비를 한다고는 했지만 자신을 과신하고 오만했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다행히 크게 헤매지 않고 등산로가 나왔다. 일단 조난은 면한 셈. 휴우, 다행이다. 이후, 지인 찬스나 119 등 민폐끼치는 일 없이 산에서 무사히 내려왔지만 마음 속의 지도와 다른 현실에서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예상 밖의 현실에 직면하며 다시금 철저한 준비 없이 산행을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잠시 길은 잃었지만 자연 앞에서는 늘 겸손해야 한다는 소중한 깨달음으로 무사히 마무리된 오늘의 산행이 더없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