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배추 한 통이 냉장고에 한참을 있었다. 식구들이 병치레를 하는 동안 양배추 한 통은 랩도 벗지 못 한 채 야채칸에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켰다. 양배추는 소분해서 반통이나 4분의 1 통도 살 수 있지만 항상 한 통을 구매하게 된다.
가격 차이도 별로 없고, 소분해서 랩핑 하면 세균 번식이 잘 된 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 한통을 사도 어떻게 하다 보면 다 먹기 때문이다. 물론 내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몸에 좋은 양배추, 위장이 안 좋은 나에게는 특히 좋은 채소라 종종 구매해서 한 통을 다 먹는다.
제일 좋아하는 양배추 요리는 양배추 코울슬로이다. 양배추를 가늘게 채 썰고 (채칼 이용, 손 조심) 마요네즈, 레몬즙, 소금 약간, 홀그레인 머스터드, 채친 당근이 있다면 조금 더 넣어 버무린다. 한양푼 가득 만들어도 숨이 죽어 더 작은 밀폐용기에 딱 들어가게 되니 냉장고 자리 차지 하는 것이 훨씬 적다. 식사 때마다 빵 반찬으로, 밥반찬으로 한 그릇씩 꺼내놓고 먹다 보면 금방 먹는다.
아이들에게도 먹기 싫어도 한 입씩은 먹어보게 하는데 아무래도 홀그레인 머스터드가 입에 거슬리는 모양이다.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빼고도 만들어 줘 보았는데 그래도 딱 한 입만 먹어서 그냥 내 입맛에 맞춘다. 소화도 잘 되고 맛도 좋다. 마요네즈를 듬뿍 넣어서 건강에도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채소를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해 주는 마요네즈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채친 양배추를 케마소스에 비벼주면 아이들이 그래도 잘 먹는 편이다. 케마 소스란 바로 케첩 마요네즈 소스. 옛날 경양식집을 떠오르게 하는 비주얼이고, 정겨움이란 조미료가 추가되었는지 이건 이것대로 맛이 있다. 김치를 안 먹는 아이들이라 케마 소스 양배추라도 식판에 자주 올려주는데 큰아이는 케첩 범벅을 해서 먹는다. 나도 그랬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의 모습이 보일 때면 당황스럽다. 유전이란 이런 것인가.
채친 양배추를 쫄면 양념장에 비벼 면 없는 쫄면으로 먹었다. 저탄고지를 하는 식단은 아닌데, 쫄면은 정말 좋아하는 음식인데 먹었다 하면 체하는 음식이라 분식집에서 먹어도 면은 신랑에게 덜어주고 야채 위주로 먹는다. 집에서 초장에 양배추를 비비며 이건 쫄면이다 쫄면이다 생각하며 먹는다. 젓가락으로 비비고 참기름을 한 바퀴 두르고, 깨소금을 더 뿌리면 기분이 더 좋아진다.
양배추전도 빠질 수 없는 요리이다. 오코노미야끼라는 일본 요리이지만, 아마 내가 만드는 양배추 전은 정통 일본식과는 거리가 조금 있지 않을까. 채친 양배추에 부침가루를 조금 섞고 계란과 물을 소량 넣어 양배추끼리 엉길 정도로만 반죽을 한 뒤 두툼하게 팬에 올려 약불에 익힌다.
베이컨이나 새우가 있다면 넣으면 더 맛있다. 약불에 오래 익힌 양배추 전 위로 가쓰오부시를 얹고 마요네즈를 애들 약병에 덜어 가늘게 뿌려주면 멋진 한 그릇이 완성된다. 애들은 양배추를 이렇게 부쳐주면 제일 잘 먹는다. 역시 기름 맛이 빠질 수 없나 보다.
양배추 4분의 1통 정도는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려 쪄서 쌈으로 먹었다. 작게 잘라 한입 크기로 쌈을 싸서 입에 넣어주면 아이들도 한두 번은 먹는다. 그 닥 좋진 않은 표정이지만 식판에 있는 음식 한두 번은 먹기로 한 약속은 잘 지키는 아이들이다.
언젠가는 양배추의 달큼한 맛, 쌈장이나 고기, 하다못해 고추참치라도 곁들인 양배추 쌈의 참 맛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어릴 때 그랬듯, 아이가 더 커서, 채소의 쓴 맛에 어느 정도 둔해지고, 본연의 단 맛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미각이 발달하면, 조금 더 크면 자연스레 채소의 맛을 알게 될 것이라 믿는다.
자투리 양배추는 볶음 요리에 넣거나, 다져서 계란말이에 넣어 먹었다. 그렇게 양배추 한 통을 남김없이 해치웠다. 사놓고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며칠을 냉장고에서 미동도 없이 지내면서도 하나도 상하지 않은 양배추에게 고맙다. 양배추를 실처럼 가늘게, 혹은 조금 더 두껍게 원하는 굵기대로 채칠 수 있게 해주는 채칼도 고맙다. 아마 나에게 칼과 도마만 쥐어 주었다면 이런 양배추 요리들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양배추 한 통을 다 먹고 숙제를 마친 기분인데 또 양배추를 사야 하나 생각하고 있다. 맛있는 채소, 몸이 부쩍 쇠해졌는데 토마토와 함께 삶아서 해독주스를 해 먹어볼까 생각 중이다. 이번 감기가 독하긴 독한지 다 나은 듯 완전히 낫지 않고 있고, 몸과 마음이 부쩍 쇠약해진 느낌이다. 몸과 마음에 독소가 쌓였나, 싶어서 해독주스 생각이 난다. 몸의 독소보다는 마음의 디톡스가 필요할 것 같은데 몸에 좋은 채소를 먹으며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