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현 활동가와 녹색당 활동가들은 2021년 10월 포스코 국제회의장에서 포스코를 비롯한 산업계 온실가스 감축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150만원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상현 활동가는 포스코의 기후위기 책임을 고발한 직접행동에 대한 유죄 판결에 불복하여 벌금 납부를 거부하고 4월 18일~5월 2일 15일동안 노역을 수행합니다. 이에 기후재판 시민불복종에 연대하는 사람들이 기후정의와 시민불복종·직접행동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이상현 활동가의 노역 기간동안 연재합니다.[편집자말] |
열여덟 살의 여름, 학교에서 기후위기에 대해 토론을 했던 적이 있다. 나름 치열했던 토론은 기후위기를 가속화 하는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측과 개인의 삶의 양식을 바꿔야 한다는 측으로 나뉘었다. 나는 기후위기를 가속화 하는 기업을 막아 세우기 위해서 정치권력을 가진 이들을 압박해야 한다는 입장에 강경하게 섰다.
토론이 끝나고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사람들은 국가 권력을 압박하기 위해서 청와대와 서울 시청, 국회를 포위하기로 결의했다. 나는 10명 정도의 후배들과 시위를 하러 국회로 향했다. 내가 스스로 준비한 시위는 처음이어서 집회 신고도 안 하고 갔다가 경찰한테 끌려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막상 국회 앞에 갔을 때, 우리를 반겨주었던 것은 친절한 경찰들이었다. 우리에게 위치를 알려주고 언제 끝나는지 물었다. 순조롭게 피케팅 시위가 진행되었다. 국회를 지나가는 시민은 자기 갈 길 바빴고, 가끔 지나가는 검정 차량은 우리를 지나쳐 갈 뿐이었다. 유일하게 관심을 가져주는 경찰에게 고마울 정도였다.
나는 그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은 행동이었다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했다. 지금 돌아보면 사실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한 자기 위로였을 뿐이다. 그 이후에도 나는 몇몇 대규모 시위에 참여했다. 그때마다 경찰의 바리케이드 안에서 시위했고, 가드레일을 따라 행진을 했다. 바리케이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나의 목소리는 꽤 무기력하고 수치심마저 느껴졌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형식을 획득한 대한민국에서 시민들의 평화로운 집회와 기자회견 등 기성의 운동 방식은 이제는 '허용 가능한 것'이 되었다. 시위대 옆으로는 냉소적인 시민들이 지나가고, 시위의 대상인 권력은 무시로 일관한다. 오히려 정치적 자유라는 이름으로 관용적 태도를 취하며 시위대를 기만한다. 그 자체로 국가가 허용한 운동의 형식은 체제의 일부를 이루는 백색소음이 된 것이다.
우리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투쟁을 통해서 획득했지만, 우리가 획득한 민주주의의 형식 안에 갇혀버렸다. 권력자의 미소와 시민들의 냉소와 경찰의 바리케이드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억압과 착취를 통해 돌아가고, 폭력은 허용된 평화의 이면에 이미-늘 존재하고 있다. 억압과 착취의 구조 속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존재들은 지금도 바리케이드를 넘어서고 있다.
지난 20년간 비장애인 중심 체제를 뒤엎기 위해서 비장애인 시민들을 볼모로 잡고 지하철을 멈춰 세운 장애인들이 그들이다. 2018년 뿌리 깊은 가부장제 사회를 뒤엎기 위해서 남성들을 추방하고 혜화역에 모인 여성들이 그들이다. 2022년 이윤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생존을 외치며 자신을 1M짜리 철장에 가둔 노동자가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착한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며, 권력자들로부터 혐오와 탄압을 받는다.
권력자들과 사회는 집회 신고를 하고, 피켓을 들고, 즐겁게 행진하는 온건한 행사와 같은 시위는 가능하지만, 시민들을 볼모로 잡고 자신들을 불편하게 하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의 시위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폭력은 침묵 속에서 지배자들로부터 먼저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가. 우리는 우리를 착한 시위대의 이미지로 가두는 평화의 바리케이드를 넘어서는 저항을 수행할 때 수치스러운 침묵을 뚫고 저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세상을 열어낼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기후위기의 시대이다. UN과 같은 국제기구에서는 온실가스 배출 감축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말하고, 한국 정부는 2050 탄소 중립을 선언했으며, 기업들은 그 흐름에 맞춰 ESG 경영과 RE100 등을 선언한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 흐름에 발맞춰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일회용품 덜 쓰기, 채식하기, 전기차 타기, 공정무역 제품 이용하기, 따위의 것들만 하면 된다.
온갖 좋은 말들이 난무하는 이 시기는 마치 모든 이들이 나서서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민중을 억압해왔던 지배계급은 한순간에 착한 친구가 된 것인가? 그럴 리가. 그들에게는 새로운 돈벌이의 기회가 생겼을 뿐이고, 국제적 압력에 못 이겨 검은 속을 가리기 위해서 새로운 녹색 포장지를 마련했을 뿐이며, 중산층 시민들만 실천 가능한 새로운 소비양식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리고 문제를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며 민중을 비정치화된 소비자로 만드는 것이다.
평화로운 친환경 세상의 이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나는 기후위기가 인간 역사의 모든 불평등 중 최후의 불평등한 폭력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금껏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여성의 돌봄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고, 남반구와 이주민들의 노동을 수탈하며, 장애인이나, 노인 등 생산에 쓸모없는 존재들을 배제 시키며, 이윤 창출과 경제성장을 위해 달려온 자본주의 열차의 마지막 폭력이다.
그들은 성장의 동력으로 화석연료를 무한정 꺼내썼으며, 무분별한 생태학살을 자행했다. 그 결과가 기후 생태위기이고, 그마저도 불평등하게, 서서히, 세계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찾아온다. 그러니 이러한 구호가 들리는 것이다. "자본주의냐, 생존이냐." "멸종이냐 체제전환이냐."
기업과 국가의 온갖 기만적 행태 속에서 생존을 택했던 이들이 있다. 그들은 착한 환경주의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생태학살을 자행하며 녹색 분칠을 하는 기업들을 고발하고,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법질서에 불복종하기를 택했다. 그들은 생존과 정의를 위해 평화의 바리케이드를 넘어서기를 택해야만 했다. 녹색당의 포스코 기후 불복종 직접행동이 그랬으며, 멸종반란의 가덕도 신공항 반대 민주당사 직접행동이 그랬고, 청년기후긴급행동의 붕앙-2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 반대 직접행동이 그랬다.
내가 작년 말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청년기후긴급행동은 참 이상한 단체이다. 청년이란 범위는 너무 넓어서 단일한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 성별, 이념, 살아온 삶이 모두 이질적이다. 그러니 2020년, 단체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기후위기의 긴급한 대응이라는 목적 하나만으로 뭉쳐서 활동했었고, 이는 뿌리로부터의 힘을 만들어 내기에는 금방 휘발되어 버리는 공허한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2021년 2월 청년기후긴급행동은 앞에서는 친환경을 외치며, 베트남 하띤성에 붕앙-2 신규 석탄발전소를 짓고자 하는 두산 에너빌리티와 삼성물산 등 기업들의 생태학살과 녹색 분칠을 고발하기 위해서 분당 두산타워 조형물에 녹색 스프레이 칠을 했다.
그러나 청년기후긴급행동에게 날아든 것은 민·형사 재판의 기소장이었다. 선진국 대한민국의 기업이 자신들의 이윤과 경제성장을 위해서 개도국인 베트남에 지역 생태계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석탄발전소를 수출한 것은 명백한 생태학살이며 기후 부정의를 초래하는 행위이지만 법질서는 그들을 수호했다. 청년기후긴급행동의 활동가들은 한국의 시민으로서 가해의식을 느꼈고, 이는 곧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삶을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각자가 경험해 온 억압과 폭력들을 말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닌 억압과 착취의 사회 구조 속에서 발생한 것임을 말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경험했던 젠더폭력에 대해서 말했고, 누군가는 아픈 것이 비정상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자신이 겪었던 병에 대해서 말했으며, 또 누군가는 학교 폭력 가해 경험에 대해서 말했다. 우리는 억압과 착취의 구조에서 피해자이거나 가해자로, 또는 방관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모든 위치에서 우리는 억압 당하고 있다. 청년기후긴급행동은 본격적으로 나의 억압이 곧 베트남 하띤성 주민에 대한 억압이며, 나의 해방이 모두의 해방임을 말할 수 있는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해방과 모두의 해방을 위해서 기존의 모든 폭력을 수호하는 질서는 우리가 넘어야만 하는 바리케이드가 된 것이다. 대한민국 사법부는 2023년 4월 12일 형사재판 2심에서 '피고인들의 선의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보다 적법한 방안을 강구하라'는 소견과 함께, 5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우리를 둘러싼 바리케이드의 형태를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다.
우리는 바리케이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 보기로 했다. 그곳에 어떤 혼돈이 있을지 모르지만, 불가능한 것을 넘어서는 상상을 해보기로 했다. 잘못된 기업과 법질서를 고발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대안이고, 우리의 대안을 그려내 보기로 했다. 지난 4월 9일 광주에서 CICC 세대 간 기후범죄 재판소가 열렸다. 우리는 기업을 수호하는 법질서가 아닌 지구 공동체를 수호하는 새로운 법을 통해서 우리를 법정에 세웠던 두산 에너빌리티와 포스코, 기획재정부를 우리의 법 앞에 세웠다.
그리고 지구 상에 살아가는 모든 이웃 생명과 가진 것이 없어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자들을 위한 법으로 그들의 죄를 따졌으며, 현장에 모인 약 70명의 시민과 활동가들은 그들에 대한 판결을 진행했다. 결과는 유죄였다. 현행법을 넘어선 도래해야 할 세상에서 그들은 유죄였다. 비록 모의재판이었지만, 우리는 비로소 상상할 수 있었고, 대안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기후악당 포스코와 산업부 장관에게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했던 녹색당의 활동가들은 무죄이다. 그들은 불이 난 공동의 집에 불을 끄고자 했을 뿐이며, 이는 상을 줘야 할 일이지, 벌을 줘야 할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벌금을 부여한 국가야말로 생태학살과 기후부정의의 방관자이며, 주범이다.
녹색당 이상현 활동가는 자신이 받는 벌금의 부당함을 말하며 국가에 불복종하는 노역에 들어갔다.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벌금 감형을 기후재판의 승리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순응하지 않겠다며 끝까지 투쟁의 짊을 짊어진 투사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나와 청년기후긴급행동도 함께 연대하고자 하는 바이다. 우리가 드러낸 바리케이드는 더욱 선명해질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봤던 해방을 이제는 땅 위로 가져오기 위한 지난한 입법적, 정치적 투쟁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여기 바리케이드에 불복하는 불온한 해방의 주체들이 모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 활동하는 길핀풀 활동가가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