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5박 7일(4월 24일~30일) 간의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국빈 자격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건 2011년 이명박 대통령 이후 12년 만입니다. 조 바이든 행정부에선 지난해 12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 이은, 두 번째 국빈입니다.
미국이 1년에 최대로 두 번 국빈을 맞는다고 하니, 미국이 윤 대통령을 크게 환대한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뉴스 초점이 지나치게 '국빈' 방문에 맞춰지고 있는 것은 옳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초청국인 미국으로서는 국빈이라는 '최대의 예우'를 무기로, '최대의 국익'을 뽑아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화려한 행사의 이면을 보지 않는 분석은 허망하고 무익할 뿐입니다.
도청 사건 속 국빈 방문, 10년 전 브라질과 정반대
2013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 요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의 정보기관이 동맹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도청을 벌인 사실을 폭로해 세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른바 '스노든 게이트'입니다.
이때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대화 내용이 도청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해 10월 말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두고 있던 호세프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합당한 해명이 없으면 국빈 방문을 취소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충분한 해명을 내놓지 않자, 행사를 1달 앞두고 미국 방문을 전격 취소했습니다.
뭔가 비슷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나요.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한 달여 남겨 둔 무렵에, 10년 전과 비슷하게 미국 정보기관이 우리나라 안보실장을 비롯한 동맹국의 요인들을 도청한 자료가 공개됐습니다. 그러나 윤 정권의 선택은 브라질의 호세프 정권과 정반대였습니다.
도청에 대한 해명 요구는커녕 '국가 간에 할 수 있는 행위' '악의 없는 행동'이라며, 피해자가 가해자를 변호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아마 국빈 방문 취소 같은 '담대한 구상'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겁니다. 되레 잘못하다간 12년 만의 국빈 방문이 어그러질까봐 초조해했을 게 분명합니다.
윤 대통령은 방미 중 미국 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앵커가 "친구가 친구를 도청합니까?"라고 묻자 "친구끼리는 그럴 수 없지만 국가의 관계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현실적으로"라고 답했습니다. 이 답변을 들으면서 국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빈 방문이라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내용이 받쳐줘야 형식도 빛이 납니다.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역시 화려한 행사가 아니라 두 나라가 합의해 내놓은 외교 합의문서입니다. 외교 문서도 그때그때 채택된 것을 따로 살펴보는 것보다, 시간 추이에 따른 변화의 관점에서 관찰하는 게 더욱 잘 눈에 들어옵니다.
점차 강경해지는 반러·반중 성향
그래서 윤 대통령 취임 직후 바로 열렸던 1차 한미 정상회담의 공동성명과 이번의 제2차 정상회담 공동성명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2022년 11월 13일의 한미일 프놈펜 공동성명을 비교해봤습니다. 프놈펜 성명은 한미일 3국 정상이 공동으로 낸 최초의 성명이자, 한국이 미일 주도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을 공개 지지한 문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3개의 성명이 윤 정권의 출범 뒤 나온 외교 문서 중 가장 중요한 문서입니다. 또한 윤 정권의 외교·안보 정책의 지향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먼저, 우크라이나 전쟁에 155mm 포탄 지원 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는 러시아 정책을 살펴보겠습니다. 1차 한미 정상회담 성명을 보면, '상황에 따라 살상 무기도 지원할 수 있다'는 윤 대통령의 최근 <로이터> 인터뷰 발언이 하늘과 땅처럼 멀게 느껴집니다. 물론 2차 정상회담 성명에 들어 있는 문구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중간에 끼어 있는 한미일 프놈펜 성명(2022.11.13.)이 변화의 단서를 보여줍니다. 그것 말고도 윤 대통령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2022.6.29.~30.),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의 방한(2023.1.29.~30.)을 비롯한 공식 또는 비공식 작업이 어떤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1차 정상회담 성명에서는 러시아에 대해 매우 절제된 표현이 쓰였습니다. "러시아의 추가 공격을 반대"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필수적인 인도적 지원"과 더불어 "러시아 및 러시아 단체에 대한 금융제재와 수출통제" 정도의 얘기만 나옵니다.
하지만 2차 성명에서는 논조가 비약적으로 강해집니다. "러시아의 행위를 가장 강력한 언어로 규탄"하고, "필수적인 정치·안보·인도·경제적 지원 제공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지"하겠다고 목소리를 한층 높였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공동성명 내용이 '<로이터> 인터뷰에 비교했을 때 온건해졌다', '살상 무기 지원 얘기가 빠져 다행'이란 반응을 보였지만, 실제로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1차 성명 때 가장 앞에 있던 인도적 지원이 2차 성명에서는 정치·안보 뒤로 밀린 게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안보'라는 단어가 두 번째로 배치된 것에 큰 함의가 있다고 봅니다. 살상 무기 지원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다기보다 '안보'라는 추상적인 단어 속에 포함돼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의 선전 포고 직전에나 쓸 법한 "가장 강력한 언어로 규탄"이란 표현도 러시아와 한국의 다각적인 관계를 고려할 때 '너무 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브레이크 풀린 중국 비판, 대만 위기 개입
러시아 비판과 함께 중국 비판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점차 강해지고 있습니다. 1차 성명에서는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해 "일방적 현상 변경"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프놈펜 성명 때부터 이 표현이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2차 성명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중국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대만해협과 관해서도, 1차 성명에서 "대만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문구가 2차 성명에 거의 그대로 되풀이됐습니다. 프놈펜 3국 정상 성명과도 같은 수준입니다.
이것은 윤 대통령이 방미 직전 <로이터> 인터뷰에서 한 발언 수위에서 크게 물러선 표현입니다. 윤 대통령은 회견에서 "(중국과 대만 사이의) 긴장은 힘으로 현상을 바꾸려는 시도 때문에 벌어진 일이며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 "대만 문제가 단순히 중국과 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문제"라고 말해 중국을 강하게 자극한 바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표현이 완화된 것은 중국의 맹반발을 염두에 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3개 성명을 시계열적으로 관찰하면, 윤 대통령의 중국관(觀)이 미국과 일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차 성명에서 '인도·태평양 전역에서의 협력 확대'라는 항목에 들어 있는 내용 대부분은 중국을 겨냥한 것입니다.
특히 "양국은 경제적 강압과 외국기업과 관련된 불투명한 수단의 사용을 포함한 경제적 영향력의 유해한 활용에 대해 깊은 우려를 공유하고, 반대를 표명하며, 경제적 강압에 대응하기 위해 유사 입장국과 협력해 나갈 것"이라는 말은 누가 봐도 중국을 겨냥한 게 분명합니다. 중국의 경제 활동과 관련해 이렇게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도 처음입니다. 앞으로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뒤 나올 중국 및 러시아의 반발이 궁금합니다.
'워싱턴 선언'의 음과 양
윤 정부는 이번 방미의 가장 큰 성과로,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핵우산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워싱턴 선언을 꼽습니다. 한미 두 나라가 북한의 핵 공격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정상 차원의 공동합의문이 처음 나온 것은, 북한의 도발 대응에서 보면 긍정적인 요소입니다. 차관보급의 상설 핵협의그룹(NCG, Nuclear Consultative Group)을 신설하고, 북핵 공격 때 즉각적·압도적·결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확인한 것, 미국의 핵 잠수함의 정례적 한반도 전개 등은 모두 북핵 도발 억지력이 이전보다 커진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핵협의그룹의 신설이 미국과 나토의 핵 공유 정책을 뛰어넘는 '한국형 확장억제'라는 홍보는 과장된 것입니다. 미국의 전술핵이 실전 배치된 나토에는 핵협의그룹보다 강력한 핵계획그룹(Nuclear planning Group)이 설치돼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필 필요도 없이 '협의'와 '계획'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그룹의 비중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워싱턴 선언 내용을 보면, 미국으로서는 한국이 북한의 핵 위협을 빌미 삼아 독자적으로 핵무장을 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것이 핵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미동맹의 연합방위태세에 한국의 모든 역량을 기여할 것임을 확인했다"는 대목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방위비의 대폭 증액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매우 우려됩니다.
워싱턴 선언이 가져올 가장 큰 부정적인 효과는 오히려 북한에 핵 능력 강화의 명분을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과 미국이 강하게 억지할수록 그것을 명분으로 북한이 핵 능력을 강화해 나간다면 한반도의 핵전쟁 위기는 더욱 심화하는 딜레마를 워싱턴 선언은 피할 수 없습니다. 또 남북문제의 주체적 해결은 더욱 멀어질 게 분명합니다.
남북 양쪽의 '강 대 강' 대치와 폭주가, 1970년대 초 국제 정세의 유동기에 유신독재와 김일성 유일 체제 강화로 나타났던 남북한의 '적대적 공존' 상황의 반복으로 이어질까,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시의 푸들' 블레어, '트럼프의 푸들' 아베, '바이든의 푸들'은?
2003년, 미국이 대량살상무기 개발이라는 허위 정보를 이유로 이라크를 침공할 때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세계 정상들 가운데 가장 앞장서 조지 부시 미국 정권을 지지했습니다. 병력도 미국 다음으로 많이 파견했고, 많은 사상자도 냈습니다. 그래서 블레어 총리가 얻은 별명이 '부시의 푸들'이었습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예상을 뒤엎고 당선되자, 그가 취임도 하기 전에 미국을 방문해 회담하면서 골프채를 선물로 줬습니다. 그리고 럭비공 같은 그가 어떤 대외정책을 내놔도 트럼프 지지를 가장 앞장서 했습니다. 심지어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그를 추천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얻은 별명이 '트럼프의 푸들'이었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미국의 말을 잘 듣는 지도자를 뽑으라면, 모르면 몰라도 윤 대통령이 가장 앞 열에 설 것입니다. 북한 문제야 우리나라 보수세력의 대표주자로서 강경책을 선도한다고 쳐도, 경제와 안보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걸쳐 깊고 넓게 형성돼 있는 중국·러시아의 관계를 일거에 파탄 낼 수 있는 무모한 발언을 마구 해대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윤 정부 출범 이후 나온 중요한 3개의 외교 문서가 그에 대해 조금은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의 표현이 미국과 일본이 즐겨 쓰는 어법을 점차 닮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외국 매체와 인터뷰를 통해, 미국과 일본의 속내를 알아서 척척 발신하고 있습니다.
조직 생활을 해 본 사람은 알지만, 상사의 귀여움을 가장 독차지하는 부하는 상사의 의중을 잘 헤아려 그가 하기 어려운 궂은일을 처리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상사가 곤경에 처할 때 가장 먼저 내동댕이쳐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물며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국제사회에서는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윤 대통령이 미국과 일본의 지도자가 쏟아내는 칭찬에 취해, 나라의 이익과 자존심을 내던지는 지도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미국 국빈 방문과 그 전후에 보인 언행을 보건대, 머지않아 블레어나 아베처럼 '바이든의 푸들'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