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은 '근로자의 날'이다.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하여 정한 날'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많은 직장인들에게 휴일인 날이 우리에게는 가장 분주한 날 중 하루이다.
5월 1일 열리는 '홈커밍데이'
경증의 성인 발달장애인들이 다니는 우리 학교에는, 5월 1일이면 졸업하고 취업하여 직장 생활을 하는 '근로자'들이 몰려든다. 처음에는 근로자의 날 휴무인 취업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모교를 방문하던 것이 해가 거듭되고 취업생들이 늘어날수록 규모가 커져 어느 순간부터는 사전에 인원을 파악해 식사나 프로그램 등을 준비하지 않으면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지난 3년간 멈췄던 '홈커밍데이'가 다시 열리게 되어 졸업생들이 한껏 기대하고 있었다. 5월 1일에 보자는 연락이 학기 초부터 빗발쳤고, 오랜만에 열리는 행사에 우리도 제자들을 맞이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드디어 5월의 첫날이 되었고, 졸업생들은 일찍부터 학교를 찾아왔다. 교사들의 출근은 학생들의 등교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이른데도, 출근 전부터 도착한 졸업생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손에는 각종 비타민 음료, 건강 음료, 과일주스, 쿠키 등을 하나씩 든 채로.
제 월급으로 교수님들을 위해 샀다며 생색을 내는 게 취업자들에겐 하나의 낙이다. 남들이 그러면 생기려던 고마움도 사그라들 텐데 제자들의 생색은 기껍고 어여쁘기만 하다.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보란듯이 큼직하게 이름을 붙여 교무실 가운데에 놓았다.
하나둘 도착한 졸업생들이 명찰을 달고 인원을 파악하는 동안 재학생들은 세미나실에 모여 선배님들을 환영할 준비를 했다. 후배들의 환영피켓과 우렁찬 박수를 뚫고 70여 명의 취업생들이 입장했다. 연예인마냥 한껏 폼을 잡으며 등장하는 아이도 있고, 쑥스러운 듯 빠르게 지나는 아이도 있지만 하나같이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열렬한 환영을 받는 선배들을 보는 후배들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동시에 동경의 빛이 떠올랐다. 특히 졸업을 앞둔 3학년과 이미 졸업을 했으나 각자의 이유로 취업을 미루고 인턴 과정을 밟고 있는 몇몇 학생들은 부러움 가득한 얼굴이었다.
"저도 취업할 수 있을까요?" 의기소침해하는 아이도, "빨리 취업해야겠어요!" 의지를 불태우는 아이도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마음은 똑같았다. 꼭 취업해서 다음 근로자의 날에는 선배들처럼 위풍당당하게 학교를 찾아오고 싶다는 마음. 취업생들을 과할 정도로 환대하는 것은 취업생들의 자존감 향상을 위함과 더불어 재학생들의 동기부여를 위함이다.
갓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 취업은 막연한 꿈이면서 막상 다가오면 두렵기도 한 현실이다. 구체적으로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 내가 해낼 수 있을지,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예측되지 않아 막막하고, 그냥 익숙한 현재에 안주하고 싶기도 하다. 그럴 때 비슷한 길을 조금 먼저 겪은 선배들의 경험담은 큰 도움이 된다.
취업생들이라고 모두 능력이 우수하고 부족함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번듯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모교에 찾아와 인정받는 모습을 보며 다른 아이들의 마음에도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근로자의 날은 오로지 취업생들을 위한 날로 운영한다.
학생들의 '잘난 척'도 그저 좋습니다
아침마다 드리는 채플도 이날만은 취업생들이 주인공이었다. 본래는 예배부 동아리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와 율동을 하는데, 예배부 출신의 졸업생들에게도 무대를 허락하자 십여 명의 학생들이 단숨에 뛰어올라왔다. 15분 정도의 예배를 위해 베이스 기타를 짊어지고 온 졸업생도 있었다.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주목받고 관심받기도 좋아하는 발달장애 아이들에게 무대는 너무나 서고 싶은 곳이지만 살면서 그런 기회가 흔치는 않다. 그나마도 우리 학교를 다닐 때에는 축제며 캠프며 행사마다 기회가 있지만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한 번씩 학교에 놀러 올 때마다 주어지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노린다.
재학생들이 돌아가며 하는 대표기도도 졸업생의 몫이었다. 학교를 방문할 때마다 대표기도를 도맡아서인지 써오지 않고도 유창하게 학교와 후배들을 위한 기도를 쏟아내는데, 이제는 나이도 꽤 들어서인지 흡사 어느 교회 장로님 같은 포스가 풍겼다.
그렇게 축제인지 예배인지 모를 시간이 끝나고 졸업생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하는 자리를 가졌다. 무대가 좁을 만큼 인원이 많아 졸업 연도 별로 순서를 나눠 인사를 했다.
어찌나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은지 마이크만 잡으면 놓지 않고 회사 자랑과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지만 실컷 자랑할 수 있는 기회는 따로 마련했기에 간단한 인사와 소개만 하도록 했다. 그래도 70여 명이 인사를 하니 한참 걸렸다. 그러나 긴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가슴 벅찬 광경이었다.
소개 후에는 오후에 있을 취업자 간담회를 위해 각각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전에 학생들에게 간담회에 대해 안내하며 질문과 답변을 연습하도록 했었다. 재학생들은 취업 선배들에게 궁금한 것들을 생각해 보고 질문 목록을 작성하고 역할극을 통해 간담회를 해보는 연습을 했다.
발달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들은 대화를 주고받는 게 원활하지 않다. 비교적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아이들도 대체로 일방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거나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하는 데에 그칠 뿐 자연스러운 대화를 '주고받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
대화를 주고받으려면 적당한 질문을 해야 하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해야 하고 공감할 줄 알아야 하고 관련된 주제로 대화를 연결해 나가는 등 일련의 과정을 매끄럽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막상 연습을 해보면 첫인사부터 먼저 꺼내야 하는 질문거리를 찾는 것, 상대가 답을 했을 때 반응을 보이는 것, 잘 듣고 기억하는 것, 이어질 수 있는 다음 질문을 하는 것 하나하나가 쉽지 않은 과정이다.
재학생들은 따로 모여 연습한 것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찾아가고 싶은 선배를 추렸다. 같은 학과 출신이어서, 10년 이상 근속해서, 이름을 들어본 대기업이어서, 8시간 정규직이어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제각각 관심을 보이는 직장과 선배가 있었다.
그리고 취업생들에게는 예상 질문지를 주어 답변을 준비해 오도록 했고, 명함과 사원증, 유니폼, 회사 홍보물, 표창장 등 자랑거리들을 챙겨오게 했다. 근로자의 날은 본격적으로 마련된 잘난 척의 장이었다. 취업생들은 설렘과 약간의 긴장 속에서 후배들의 질문에 대답할 것들을 점검했다. 예상 질문지에 답변을 빼곡히 적어 준비해 온 모범생들도 있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오랜만에 만난 선후배, 교사들과 자유롭게 회포를 푸는 시간을 가진 후 대강당에 모여 취업자 간담회를 가졌다. 재학생들은 각자 활동지를 들고 학과별로 앉아있는 선배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70여 명의 취업생과 100여 명의 재학생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열정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물론 그중엔 엉뚱한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가기도 하고, 후배들에게 허세를 부리느라 과장된 무용담이 펼쳐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반짝거리는 눈으로 선배를 찾아가고, 자부심 가득한 낯으로 후배들에게 조언하는 모습은 그저 대견하고 기특했다.
교사들의 보람으로 가득 찬 하루
한편에서는 아이들을 더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교사들이 소시지를 굽고, 예쁜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간담회를 마친 재학생들은 '취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여러 가지 팁을 얻었다,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취업한 선배들을 보니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나도 지금보다 100배 더 노력해야겠다, 빨리 취업해서 돈을 벌고 싶다' 등 의욕이 가득한 소감을 남겼다.
취업생들은 후배들에게 '청결과 위생이 중요하다, 체력과 건강관리를 잘해야 한다, 학교 수업을 성실하게 들어라, 일이 힘들어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포기하지 마라, 끈기가 있어야 하고 감정조절을 잘 해야 한다, 상사들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 지각은 절대 안 된다' 등 제법 사회생활을 한 티가 나는 성숙한 조언들을 했다.
때로 아이들에게는 교사나 부모의 말보다 선배나 또래 친구들의 조언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어른들의 말은 그저 흔한 잔소리 같지만 비슷한 친구들의 말은 훨씬 더 실제적으로 와닿는 것이다. 항상 누군가에게 배우고 도움을 받는 입장이다가 후배들의 선망 어린 시선을 받으며 조언자 역할을 하게 된 선배들도 한껏 어깨가 올라갔다.
하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 착한 잘난 척들을 마음껏 한 취업생들은 6월 학교 축제 때 연차를 내 또 오겠다며 떠나갔다. '좋은 제자를 두셨으니 교수님들도 힘내세요'라며 자화자찬 가득한 응원을 남기고 간 아이도 있다.
교사들도 근로자인데 쉬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냐마는 이런 제자들이 있어 휴무도 수당도 없는 근로자의 날을 기껍게 보낸다. 취업생들의 자긍심과 재학생들의 꿈, 교사들의 보람으로 풍성했던 하루가 모두의 삶을 단단하게 채우는 시간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
▲ 한 땀 한 땀 교사들의 사랑으로 채운 포토존. 무려 1박2일의 전체 MT 후 야근이었다.
|
ⓒ 권유정 |
관련영상보기
|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brunch.co.kr/@h-teacher)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