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군산 수라갯벌 가는 길 군산공항 쪽에서 수라갯벌 입구를 향하는 길에 미군기지가 위치하고 있다.
군산 수라갯벌 가는 길군산공항 쪽에서 수라갯벌 입구를 향하는 길에 미군기지가 위치하고 있다. ⓒ 김규영

날이 궂다.

4월 29일, 잔뜩 찌푸린 하늘이 언제 비를 뿌릴지 모르니, 서두르기로 한다. 군산교육희망네트워크,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군산평화박물관이 준비한 2023년 첫 번째 군산미군기지생태평화답사는 '미군기지 바닷길'이다. 전국 각지에서 왔다는 참여자들 소개도 뒤로 미루고 인원수 확인 뒤, 바로 걷기 시작한다. 옆에서 걷는 분과 인사와 안부를 나누니 혼자 온 내게도 동행이 생긴다.

미군기지 바닷길

'미군기지'가 붙어 있으니 애초부터 '바닷길'의 낭만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대신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 '미군기지'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곱씹어 본다. 나는 휴전상태의 대한민국에서 미국 군대가 주둔한 기지 근처에서 살고 있다. 만약 중국과 국지전이라고 발생하면 바로 가까이에서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먼나라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는 셈이다. 나는 무엇을 믿고 이토록 여유로웠던 것일까.

미국이 세계 곳곳의 안보를 챙긴다면서 해외로 파견한 병력 중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가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다. 전국에 퍼져 있는 주한미군이 평택과 대구 중심으로 정리·재편되고 있다는데, 중국을 코앞에 둔 군산 미군기지는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군산공항 앞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미군기지 철조망 앞에 이르니, 군산공항과 1.3km 떨어져 있다는 새만금 신공항 예정부지가 얼마나 가까운가를 실감할 수 있다. 두 공항 사이에 유도로가 만들어진다고도 하고, 관제탑도 하나만 있을 것이라고 하니, 지금 걷고 있는 수라갯벌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걸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수라갯벌 소나무들 수라갯벌 모래사구에서 바라본 소나무들. 오른쪽 철조망 너머의 소나무와 수라갯벌의 소나무의 크기가 다르다.
수라갯벌 소나무들수라갯벌 모래사구에서 바라본 소나무들. 오른쪽 철조망 너머의 소나무와 수라갯벌의 소나무의 크기가 다르다. ⓒ 김규영

소나무 군락지의 후손을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

철조망 근처 미군기지 안쪽에 잘생긴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늘어서 있다. 한반도의 여느 해안가처럼 이곳도 소나무숲이 울창했다고 한다. 100여 년 전일까, 새로운 문물을 들고 온 일본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닷가에서 물장구치는 해수욕이라는 것으로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어 인근 땅을 잔뜩 사들였단다. 웬걸, 비행장 만든다고 나무고 모래고 죄 뽑고, 엎고, 덮어버리니 고스란히 쪽박을 찼더란다.

그때의 소나무 자손들이 미군기지 안쪽에만 살아났을까. 당연히 캘리포니아 철조망 밖 군산 땅에도 소나무가 자랐다. 전과 달리 파도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씩씩하게 자라나던 소나무들은 세상 돌아가는 일을 이해할 수 있기도 전에 목이 베이듯 밑둥을 잘려 쓰러졌다. 녹슨 철조망에 감기고 쓰러져 죽어있는 소나무들 더미를 만나고 또 만났다.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나무 그루터기들도 여럿 봤다. 
 
죽은 소나무 어린 소나무들이 밑둥이 잘려 쓰러져 죽어 있다.
죽은 소나무어린 소나무들이 밑둥이 잘려 쓰러져 죽어 있다. ⓒ 김규영
 
누가 이곳까지 와서 애꿎은 소나무를 죽이고 있을까. 옹벽에 감시초소를 만들어 둔 '미군'은 유력한 용의자다. 갯벌 너머의 바다를 관찰하고 있는지, 염습지를 활보하며 식물 뿌리를 헤집어 먹고 다니는 멧돼지를 감시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시야에 거슬리는 것을 없애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2008년에 새만금 수라 지역을 이미 신공항 혹은 미군기지 확장 부지로 계획해 뒀던 미군은 소나무 벌목범으로 다시 용의선상에 오른다. 공항 혹은 확보해야 할 공여지 예정지가 울창한 소나무숲이거나 크게 장성한 나무들이 많으면 '처리'하기 난감할 수 있을 테니. 

이 지역은 소나무뿐만 아니라 왕버들 군락지이기도 하다. 나무는 새들의 둥지가 돼주며 더 많은 생명들을 불러들인다. 새들은 비행에는 장애요인으로 분류될 것이고, 모든 위험요소는 미리 미리 손을 보는게 현명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미군기지 철조망 외에는 야생동물의 발자국과 새들의 날개짓, 염생식물의 생명력과 풀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 있을 뿐이니 소나무를 쓰러뜨린 다른 범인을 도저히 특정할 수가 없다. 
 
수라갯벌의 꼬마소나무와 왕버들 꼬마 소나무는 포기하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나고 있다.
수라갯벌의 꼬마소나무와 왕버들꼬마 소나무는 포기하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나고 있다. ⓒ 김규영
 
장화 신고 걷는 것보다 어려운 '현실' 자각

장화를 신고 걷는 것은 걱정만큼 어렵지 않았다. 물과 진흙을 찰박거리며 갈대를 헤치고 길없는 길을 만들며 나아갈 수 있으니 설렘으로 기운이 솟는다. 어려운 것은 내가 멀리 떠나온 여행지가 아니라 집에서 고작 30분 거리에 있는 '동네'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바로 옆의 철조망 너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주소지를 가지고 있고, 철조망 외에는 인공구조물이 보이지 않는 널따란 자연생태계가 모두 매립돼 소음 낭자한 비행기가 뜨고 내리게 될 것이라는 '현실'이 현실 같지 않았다.

군산공항 쪽에서 하제포구 방향으로 걸을수록 미군기지의 옹벽이 점점 높아진다. 신공항 건설에 앞서 지형의 높낮이를 맞추기 위해 우리가 걷고 있는 찰박한 습지 전부를 2~3미터의 높이로 매립할 예정이라고 한다. 머리 위로 흙이 쏟아지는 것처럼 숨이 답답해진다.
 
미군기지 바닷길 걷기 하제포구 방향으로 갈수록 미군기지 철조망이 높이 솟는다. 지형 탓이지만, 머리 위 1-2미터 위까지 매립되는 생각을 하면 숨이 조여온다.
미군기지 바닷길 걷기하제포구 방향으로 갈수록 미군기지 철조망이 높이 솟는다. 지형 탓이지만, 머리 위 1-2미터 위까지 매립되는 생각을 하면 숨이 조여온다. ⓒ 김규영
  
죽은 줄 알았던 새만금

2006년 방조제 끝물막이 공사로 새만금이 다 죽어버린 줄 알았다. 방조제 안쪽에 남아있던 물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썩어가는 냄새를 견디다 못해 잠시 수문을 열었을 정도였다.

부드러운 흙 속에 숨어 악착같이 버티고 있던 조개들이 바닷물 소리에 환호를 지르며 고개를 내밀었다. 뻐끔뻐끔 생명수를 들이마시던 조개들은 그대로 입을 벌린 채 죽어버렸다. 그렇게 숨이 끊긴 조개무덤이 수라갯벌 곳곳에 화석처럼 남아있다. 죽은 조개껍데기를 바닷가로 휩쓸어 올려버릴 바닷물이 다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민들을 먹여 살리던 조개들,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던 희귀한 철새들이 다 떠나버린 줄 알았다. 계획대로 다 죽여버린 땅에서는 처음 생각대로 쌀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강바닥의 모래를 긁어와 만든 땅이라 물이 땅속에 머물지 못하고 빠져나간다. 바닷물도 섞여 있으니 인간이 만든 땅은 짜고도 짰다. 논농사든 밭농사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을 키우려면 해수가 아닌 담수를 수없이 들이붓고 부어 짠기를 없애주어야 한다. 결국 사람이 먹지 못하는 가축 사료용 풀만 기를 수 있을 뿐이다.
 
수라갯벌의 염생식물 해홍나물과 퉁퉁마디는 대표적인 염생식물이다. 수라갯벌에 비단처럼 깔려있다.
수라갯벌의 염생식물해홍나물과 퉁퉁마디는 대표적인 염생식물이다. 수라갯벌에 비단처럼 깔려있다. ⓒ 김규영
 

장화를 신어야 하는 이유는?

주최 측은 미군기지 바닷길 답사를 위해 모자와 물, 우비, 그리고 '장화'를 준비하라고 했다. 아무리 '바닷길'을 걷는다고 해도 말라 죽어있을 땅을 걷는 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비가 온다고 해도 3시간 이상을 걸을 테니 발편한 운동화나 등산화가 낫겠지 싶었다.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은 답사길의 선두에 섰다. 땅을 밟을수록 물이 배어 나와 질퍽거렸기에 장화가 없는 사람들을 배려한 것이다.

땅은 살아서 젖어 있었다. 몇 차례의 수문 개방으로 해수가 유입됐고, 고작 그 정도의 바닷물이 닿았을 뿐인데 염생식물이 비단처럼 깔리고 흰발농게가 구멍만 뚫어놓고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지구의 날에는 소등보다 운항 중단을

조개무덤이 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철썩거리면 염습지는 언제든 갯벌로 돌아갈 준비가 돼 있다. 30년 전, 땅도 아니고 물도 아닌 염습지와 갯벌을 쓸모없는 곳이라고들 했다. 땅이자 곧 물이었기에 염습지와 갯벌은 수많은 생명의 터전이며, 산림보다 더 많은 탄소를 흡수하는 지구의 호흡이다.

지난 4월 22일, 각종 기관에서 지구의날 기념으로 10분 소등 캠페인을 벌였었다. 저탄소 생활 실천은 매우 중요하다. 고민없이 누려왔기에 몸에 익어버린 편리함을 포기하는 것은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실천하는 연습이 어느새 생활이 돼 프랑스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처럼 짧은 거리의 항공 운항을 금지하고, 갯벌을 매립해 비행장을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수라갯벌 비가 내리는 궂은 날에도 수라갯벌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생명이 있는 곳은 늘 아름답다.
수라갯벌비가 내리는 궂은 날에도 수라갯벌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생명이 있는 곳은 늘 아름답다. ⓒ 김규영
 
봄날이 궂다... 2023년 새만금 수라갯벌의 처지가 궂다

베이고 베여도 다시 자라는 소나무들의 철없음이 부럽다. 우리 땅에서 크고 자라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인간사를 살아가고 있기에, 곧 잘려나갈 생명이 애잔하고 기특해 보인다.

오래 살 수 없을 거라는 사람의 판단에 굴하지 않고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소나무처럼, 끝물막이로 끝난줄 알았던 새만금에도 생명이 살아있었다. 나와 함께 발자국을 남겼던 삵, 멧돼지, 너구리, 고라니와 같은 야생동물 그리고 새들, 자라고 또 자라나는 꼬마 소나무들과 위가 아닌 옆으로 자라나는 향긋한 순비기나무, 붉은 해홍나물과 오동통한 퉁퉁마디들이 오늘의 나와 함께 숨을 쉬었듯이 내일에도 매립되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거칠게 쏟아지는 비에 옷이 젖고 시야가 흐릿하다. 비를 피해 화산 지붕바위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김밥을 먹었다. 서로 양보하며 좁은 공간을 함께 나눈다. 바람 소리가 거세니 서로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더 가까이에서 집중한다. 궂은 날, 더이상 궂지 않을 내일을 위해 우리는 함께 걸었다.  
 
화산 지붕바위  화산의 신비한 지형 중에 지붕처럼 비를 피할 수 있는 바위가 있다. 바위 아래에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 앉아 김밥으로 점심을 먹으며 쉬고 있는 답사 참여자들 모습이다.
화산 지붕바위 화산의 신비한 지형 중에 지붕처럼 비를 피할 수 있는 바위가 있다. 바위 아래에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 앉아 김밥으로 점심을 먹으며 쉬고 있는 답사 참여자들 모습이다. ⓒ 김규영

덧붙이는 글 | 개인 SNS와 블로그에 게재 예정이다.


#군산미군기지생태평화답사#군산미군기지#평화박물관#새만금신공항반대#수라갯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 사람의 발자국. 그 힘을 믿는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