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철교
지난 5월 3일, 단양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을 메모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단양강 잔도'였다. 유명 관광지 내 강이 있는 곳마다 강가 옆으로 만들어 놓은 둘레길 중 하나라 여겼다. 아마 단양역에서 가까운 곳이라 이곳을 선택한 것 같다. 그런데 이곳은 벼랑길이었다.
초입의 잔도는 두 개의 철교 밑을 지난다. 하나는 낡았고 하나는 최신식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오른쪽은 중앙선 복선화 작업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다리다. 활 모양의 아치형 구조물이 위쪽으로는 길게 아래쪽으로는 짧게 번갈아 세워져 있었다. 아주 튼튼해 보였다. KTX-이음 열차가 쌩쌩 달려야 하니까. 아! 저 다리 건너 바로 단양역이 있으니 다리 위를 오고 갈 때는 서행을 하겠네.
왼쪽의 다리는 중앙선이 단선일 때의 철교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영주, 안동을 갈 때 무궁화호를 타고 지나갔던 다리. 맞은편에서 다른 열차가 가까이 접근하면 어느 역에선가 멈춰 서 그 열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던 시절의 철교. 열차 속도가 빠르지 않아 창밖의 풍경이 더 섬세하게 보이고, 복선화 전이라 터널도 적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골길을 도맡아 다녔던 시절의 철교.
이 두 철교의 이름은 똑같이 상진철교다. 세대교체 무렵의 어정쩡한 동명의 두 다리다. 단양군은 구(舊) 상진철교를 수리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새 철교가 인접해 있어 시끄럽고 너무 낡아 철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고 한다. 내가 봐도 저 위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일이 무의미해 보였다.
다리 기둥에 세월의 더께가 더덕더덕했다. 구교와 신교가 이렇게 인접해 공존하고 있는 경우는 참 보기 드문 일이어서 자꾸만 쳐다보았다. 왠지 서로 친해 보이지 않았다. 구교도 한때 위용을 자랑하며 넘실거리는 단양강의 상징이었을 테니까.
잔도 위에서
'잔도'가 뭘까? 3일과 4일 이틀 동안 단양을 여행하는 내내 궁금했다. 심지어 '단양강 잔도'를 걷고 있을 때도 그 의미를 몰랐다. 팸플릿에는 명확하게 설명돼 있지 않았고, 잔도 어디에도 설명 문구가 없었다. 의미를 모르는 길을 잘도 감상하며 걸었다. 집에 와서 사전을 뒤진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사다리 잔' 자를 쓰는 '잔교'(棧道)란 "험한 벼랑 같은 곳에 낸 길"을 말한다.
나무 패널로 잘 만든 이 벼랑길을 조성하느라 자연경관을 해쳤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그저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음미하며 천천히 걸었다. 강과 산을 감상하며 그 풍경에 젖어들었다. 손에 닿을 거리에 있는 벼랑 바위와 끈질기게 이 바위와 자신의 생(生)을 접합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여행 때 내겐 의도치 않은 운이 따르곤 한다. 어딜 가든 내 주위에 여행객들이 적다는 점이다. 사진을 찍거나 혼자만의 호젓한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이런 환경은 무척 도움이 된다. 사실 정오가 한 시간도 안 남은 무렵 햇볕이 강할 때 여길 온 것도 그렇고, 여행객들이 잘 가지 않는 시골길이나 골목길을 걷곤 했으니 으레 그럴 만도 하겠지만 그것 이상의 운이 따랐다.
그래서 잔도 위에서 더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게다가 스파이더맨처럼 벼랑에 바짝 붙어 다니고 있으니 평소에 볼 수 없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폰 카메라를 수시로 작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어디를 찍든 사진이 잘 나오고 마음에 드는 사진이 많이 나온 것은 순전히 벼랑 덕분이었다.
<벼랑에서 (힘겹지만 꿋꿋하게) 살다>라는 책도 있고 벼랑 끝은 죽음의 문턱일 경우가 많은데, 벼랑이 고마운 존재라고 느낀 적은 생전 처음이다. 여기서 부는 바람은 흡사 연극 무대에서 적절한 순간에 희미해지고 밝아지는 조명과 같았다.
바람이 관통하는 전망대
남한강 주변의 만학천봉(첩첩이 겹친 골짜기와 수많은 봉우리) 중, 잔도가 가로금을 긋고 있고 단양강과 인접해 있으며 조망이 최고인 봉우리 정상에 전망대가 있다. 이름에서 거만한 느낌이 드는 '만천하스카이워크'의 무대는 잔도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입장권을 사고 셔틀버스를 탔다. 셔틀버스는 봉우리를 굽이굽이 돌고 돌아 정상 '만학천봉전망대' 앞에 섰다. '만천하스카이워크'는 여러 시설을 통칭한 것이고 그중 제일 중요한 곳이 '만학천봉전망대'이다.
조금 이상했다. 전망대 하면 건물의 맨 위쪽 특정한 곳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비스듬한 달걀 모양의 이 전망대는 입구에서부터 360도 사방이 전망대이다. 나선 모양으로 올라가는 길 자체가 전망대인 것이다. 그러니 단양강뿐 아니라 사방의 수많은 산과 골짜기, 봉우리를 전부 돌아보며 천천히 오름길을 걷는 식이 된다.
외벽이 없는 전망대는 중앙의 기하학적인 철골 구조물이 전망대 전체를 지탱하고 있었다. 전망대 정상의 철재 덮개만이 유일한 보호막일 뿐이다. 내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외벽이 없어 바람이 드나드는 날것의 전망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은 입장할 수 없다.
전망대 맨 위쪽에 올랐다. 밖으로 툭 튀어나왔고 바닥이 투명유리인 일명 '쓰리핑거'(세 손가락)에도 들어갔다. 그리고 단양읍내와 단양강 물줄기, 단양역 그리고 수많은 산을 보았다. 그러다 저 끝 소백산맥 능선까지 눈에 들어왔다. 비로봉이 보이고 천문대 부근도 보였다. 괜히 아득한 세상을 만난 듯했다.
관람 후 '영묘한' 세상에서 나올 때도 잔도를 이용해야 한다. 분명 위 세상과 아래 세상은 달랐다.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세상을 보아야 함을 알았다. 자기 해체적이고 세상 수용적인 모양새를 보고 '전망대가 다 그렇지' 하는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다행이다. 잔도 가는 길을 그래서 권하고 싶다. 단양 읍내엔 볼 것이 많다. 그 소박한 것들은 다음 글에서 소개하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했습니다.